나는 해방이 된 이듬 해 여름 깡 농촌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더불어 혼란한 사회와 국가적으로도 너무나 어렵고 힘든 시기에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입이 짧은데다가 먹을 것이 없어서 등짝에 달라붙은 배를 채우기 위해서 산으로, 들로, 바다로 다니며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후려서 연명을 하였고 일곱 식구의 생계를 위해서 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대목장으로 일을 하여 일당을 받아 오는 날은 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일이 없거나 일당을 못 받은 날은 굶거나 이것저것을 넣어 멀건 죽을 끓여서 끼니를 때우곤 하였다. 고구마와 강냉이 죽이나 보리 개떡이 주식이었으며 그것이라도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그렇게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 아버지나 형님들은 밥벌이를 하느라 밤낮의 구별이 없었고 어머니는 이웃에 다니며 날품팔이로 가족의 생계를 잇는데 손발이 부르트는 것이 일상이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가족의 건강과 미래의 삶, 그리고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서 때때로 점쟁이를 찾거나 무당을 불러다가 궂을 하였으며 신 새벽에 우물에 가서 손수 떠오신 정한수를 장독대 위에 올려놓고 두 손을 비비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54년 4월, 아버지가 부산으로 일하러 갔다가 채 한 달도 안 되어 병명도 모른 채 객지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고 불과 4년 뒤에는 집안을 책임졌던 큰 형님마저 가난과 무지의 소행으로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서 죽어가는 것을 두 눈을 뜨고 지켜봐야만 하던 안타까운 현실에 어린 나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정한수와 미신을 떠받드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이 집안의 형편은 나아지기는 켜녕 액운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큰 형님의 죽음을 맞게 되었고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보니 죽은 넋이 저승에를 가지 못하고 집안에 맴돌고 있으니 영혼을 달래서 저승으로 가게 해야 한다는 점괘를 믿고 연속되는 집안의 액운을 쫒느라고 어느 날 큰 굿을 하였는데 무당 두 사람이 와서 한 사람을 주문을 외우며 밤새 징을 두드리고 한 사람은 집안사람들에게 그때그때마다 할 일을 지시하고 온 식구들은 숨을 죽인 채 굿이 잘 되어 저승으로 간 영혼이 좋은데 갈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평안하기를 간절하게 빌면서 꼬박 밤을 새웠다. 그런데 새벽녘 굿이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안방에서 사립문까지 긴 천으로 연결하여 저승 가는 길이라며 영혼이 타고 갈 광주리 하나를 올려놓고 한 무당은 징을 두드리고 한 무당은 안방에서 출발한 광주리를 잡고 운전을 하는데 가다가 중간에서 멈추어 서며 노자가 없어서 못가겠다거나 정성이 부족해서 못 간다며 광주리가 뒷걸을 치거나 그 자리에 멈추어 꼼짝을 안 하면 가족들은 애가 타서 탄식을 하며 돈이나 귀중품을 있는 대로 광주리에 올려놓으며 좋은 곳으로 가기를 절절한 마음으로 비는 것이었다. 그렇게 밤새 하던 굿이 아침 해가 돋을 때쯤 되니까 죽은 넋을 실은 저승 가는 광주리가 사립문 밖을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죽은 영혼이 좋은데 간 것이라고 믿고 굿을 구경하던 동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가족들은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긴장이 풀리고 밤새 한 잠도 못잔 피곤함이 전신을 엄습하는 것이었다. 먹을 것도 없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 밤새 굿을 하는 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렇게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우상을 섬기거나 미신에 얽매인 채 그냥 그것이 생활이었고 전통적인 기복 신앙에 젖어서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대학을 가게 되면서부터 도시로 가서 누님 집에서 지내게 되어 어머님이 내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 같이 생활하는 중에 어느 여전도사님의 전도를 받아서 작은 누님이 먼저 교회를 가게 되었고 훗날 어머니와 나도 교회에 등록을 하였으며 고향에 계시는 형님과 그 가족, 일찍 시집을 가신 큰 누님까지 온 가족이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그 자녀들까지 모두 신앙인으로 하나님의 축복 속에 믿음을 지키고 있다. 그 중에 큰 누님은 완고한 시집의 전통을 버리고 예수 믿는다고 집안 어른과 매형으로부터 핍박을 엄청나게 받다가 결국은 이혼을 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지만 자녀들은 모두 신앙을 지키며 목사로 전도사로 시무를 하고 있고 작은 누님은 목사 사모가 되어 교회를 섬기다가 은퇴하여 노후를 보내고 있으며 나는 장로로 18년을 섬겼고 안식구는 권사로 은퇴를 하였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성경 말씀이 보잘 것 없는 우리 집안에 결실을 맺은 것 같아서 마음 뿌듯한 것이 진심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무지와 가난에 찌들려서 세상의 물정도 모르고 무지하게 살던 우리 가정의 구원은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기적이라고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1967년 겨울에 처음 교회에 등록을 하였고 그 후로 주일을 꼬박꼬박 지키며 이왕 신앙생활을 하려면 제대로 잘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며 열심을 다하다 보니 직분을 받게 되고 시골 면소재지에서 교직 생활을 하던 나는 서울로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구로동에 있는 서울남교회로 출석하게 되면서 안수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 17년 7개월을 장로로 시무하다가 만 나이 칠십이 되는 2016년 12월에 은퇴를 하였고 지금은 편하게 주일을 지키며 생활을 하고 있다.
천하에 시골 촌놈이요, 보잘 것 없는 집안 형편과 인맥 하나 없이 지방 대학 출신에 당시에는 몸이 좋지 않아서 군대도 못간 상태다 보니 어디 취직하기가 만만치 않아서 대학 졸업을 하고도 일 년을 백수로 지내며 누님 집에 얹혀서 밥만 축내며 지내다가 세상 말로 참으로 운 좋게 평택의 어느 고등학교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엉뚱하게 면소재지의 시골 중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교장 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1971년 2월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다.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에 나도 이제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너무나 감사하였고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고 요즘 시대 같으면 나 같은 변변치 않은 사람은 취직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취직을 못하면 결혼도 못하는 것은 뻔한 사실을 생각하면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서 때로는 아찔할 때가 있다.
성경에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이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씀인 것 같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은 진실로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맨 땅에 헤딩한다는 말처럼 참으로 힘들게 살았고 옛 말에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고 했듯이 나의 성장기와 학교를 다니던 1950~60년대는 모두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으로 국민 소득이 100달라도 안 되었고 집이라고는 움막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경제라고 말할 것도 없이 하루하루 끼니 해결이 어느 것보다 급선무요 미래의 꿈이나 삶을 위한 계획 같은 것은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가난과 무지는 사람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참으로 나쁜 바이러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대학 3학년 겨울 즈음부터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사람의 참 가치와 삶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씩 깨치게 되었고 우리의 육신이 이 땅에서만 살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미래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영혼구원의 원리를 깨닫게 되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이고 앞으로 내 자신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방향을 잡고 노력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 등록을 한 이후로는 보다 바르게, 좀 더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고 부지런히 살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으며 무엇이든지 기본과 원칙을 중요시하며 평생을 살았다. 다들 하는 재태크라는 것도 할 줄 모르고 꼬박꼬박 월급에 의지해서 규모 있게 살려고 노력하였으며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근면 성실하게 살다보니 별스럽게 이룬 것도 없고 내로라 할 것도 없지만 그저 노년을 평안하게 살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 늘 감사하면서 살고 있다.
지난날들의 수많은 우여곡절을 생각해 보면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 실감을 하며 때로는 안도의 한숨을 쉴 때가 있다. 지금처럼 엄청난 정보와 지식이 넘쳐나며 물질 만능주의와 첨예한 경쟁 시대가 아닌 조금은 덜 개화가 되고 덜 발전이 되었던 40년대에 태어나 60년대에 학교를 다니고 70년대에 사회 진출을 하게 된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마음에 때로는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정말 다행이라며 자위하곤 한다.
내 나이도 이제 산수(傘壽)를 바라보고 있으니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될는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고 다만 한 가지 변함없는 진실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영위하며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모든 것이 소중하고 특히 하루하루가 얼마나 의미가 깊고 중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늘 염두에 두고 지내고 있다.
누구나 다 똑 같이 태어날 때 가진 것 하나 없이 맨손으로 왔고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빈손으로 가게 되어있다. 그러니 뭐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살 이유가 없고 가진 것을 나누며 즐기는 삶이 보다 중요하다고 하겠다.
다만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욕 안 먹으면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남은 인생 최선을 다하려고 다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