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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 흑산도 목포 여행기
여행일자 : 2015년 6월 12일 ~14일
여 행 자 : 이 형 재외 7명
친구들과 홍도여행을 하기로 한 전날 전야제로 간단한 만찬을 즐기고 2015년 6월 12일 새벽 5시 제천출발, 목포에 도착하니 10시. 1시 여객선이라 시간이 있어 산낙지에 연포탕을 먹었지만 우리가 음식점 선택을 잘못하여 음식이 그렇게 맛없는 것은 처음 먹어보았다. 그리하여 일행은 짐들고 여객터미널로 가고 나와 친구1은 조기매운탕을 먹기로 하고 시켰는데 먹을만하고...
메르스의 영향인지 여객선의 승선 인원은 많지 않다.
여객선에서 올갱이 안주에 오미자주로 거나하다보니 홍도 하선하여 숙소에 짐을 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관광에 나선다. 홍도생태체험과 당산 등등 바다의 조망은 가히 압권이다. 그래도 홍도에 왔으니 최고봉인 깃대봉에 오르는데 날씨는 흐리지만 부부바위 방향의 일몰과 석양은 자주 접하지 못하는 광경을 연출하고
오르는 길엔 청어미륵탑, 연리지,
숨골재
등이 나의 눈을 반기고 깃대봉 정상의 조망은 형용 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저녁노을이 지고 있는 관계로 하산이 염려되어 서둘러 하산하는데 친구1,2는 막걸리로 등산 대산하고 모두들 부두로 나갔다. 가이드가 소개한 집으로 찾아가니 아주머니께서 반갑게 맞이한다. 점포 주변 전체에 사람들이 없어 아주머니께 여쭈니 메르스의 영향으로 주말이면 1,000여 명 이상이 방문하는데 오늘 들어온 관광객이 100여명 남짓이라고 한다. 장사가 되지 않아 걱정이란다. 우리 일행은 전복, 해삼, 멍게, 홍합 등을 시켜 잎새주와 정겨운 여행의 이야기꽃을 피우고...
이튿날 일출을 보려고 전망대에 올랐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사 구름이 가려 일출을 보지 못하고 하산 길의 산위에서 보니 6년 전보다 홍도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걸 느꼈다. 현대화 된 여객터미널이 건설되어 있었고, 방파제가 많아졌고 마을의 지붕과 벽체가 파란색 계통에서 붉은색 계통으로 바뀌어 있었다. 홍도의 이름과 같게 색깔을 의도적으로 바꾸는 것인지?
2009.11.23.
2015.6.13
유람선을 승선하니 안내자의 전라도특유의 욕지거리가 섞인 구수한 설명에 심취되고
유람선에서 먹은 바다회와 소주 한 잔은 홍도에서만 체험하는 관광의 홍일점이다.
(홍도의 10경 설명은 안내판 설명으로 대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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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에 대하여
○ 홍도연혁
1678년 조선 숙종4년 : 고씨 최초 입도
1965년 섬 전체 천연기념물 제17호 지정
1981년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지정 (제478호)
2007년 문화관광부 가고싶은 섬 지정
2009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 지정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주관 한국관광 100선 1위 선정
홍도의 유래와 천연보호구역
홍도는 바위들이 홍갈색으로 섬이 빨갛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홍도의 바위들은 전체적으로 붉은 색조를 띠고 있다. 지금은 홍도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섬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매화꽃과 흡사하다하여 매가도라 불리기도 하였다.
홍도는 1965년 4월 천연기념물 제170호로 지정되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호받고 있다. 홍도가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것은 지질구조, 육상화 해양 동식물 등에서 우리나라 서남단 섬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도의 크기와 지형
홍도는 전라남도의 목포시 서쪽 115km의 거리에 위치하며 면적은 6.47㎢이고, 해안선의 길이는 20.8㎞이다. 북북동~남남서 방향으로 길게 연장된 형태의 본섬과 약20여개의 부속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발 365m인 깃대봉을 중심으로 한 큰 섬과 양산봉을 중심으로 한 작은 섬이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다. 해안가에 이르러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홍도는 바위섬으로 해안에 평지가 거의 없으며 침식작용으로 인한 해식절벽으로 형성되어 있다. 홍도1구와 2구에 마을을 형성하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홍도의 암석
홍도의 해안은 중생기 백악기에 형성되어 운반작용에 의해 입자들이 쌓여 만들어진 쇄설성 퇴적암으로 구성된 암석해안으로 붉은색을 띠는 사암 및 규암질 사암, 적자색 내지는 적회색 사암, 역암 및 이질암 등의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암석은 비교적 풍화나 침식에 대한 내구성이 강하여 돌출지형이나 급경사 지형을 이루는 특징이 있다.
홍도의 기후
홍도의 기후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기온차를 나타내며, 겨울에는 대륙성기후와 여름에는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받고 있어 대륙성기후대와 해양성기후대가 교차하는 해양성내륙 기후이다. 지형적인 영향으로 여름에는 태풍의 내습과 농무가 끼는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연평균 기온은 13.5℃정도이고, 강수량은 1149.99㎜로 다우지역에 속하며 홍수기가 6~9월에 걸쳐 길게 형성된다. 태풍이 부는 날은 평균 25.3일정도로 내륙지역보다 많이 발생하며 풍속이 강하고 폭우를 동반하여 위력이 커서 선박, 인명등에 큰 피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동백숲이 자라는 홍도의 식생
홍도의 수목은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등 274종이 자라고 있는데 특히 홍도 1리의 당산림은 흰동백, 식나무군락 등 상록활엽수 24종과 낙엽활엽수 30종으로 구성된 원시림을 이루고 있어 관광객 가치가 크다. 특히 홍도 전체가 동백숲이라 해도 될 정도로 수령이 약 300년 정도 된 동백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흰동백은 슬픈녀 계곡 해발 95m의 연못가에 단 한그루가 자생하고 있는데 그 나무의 높이는 3.6m, 지름은 10cm이다. 다른 식물이 모두 지고 난 겨울에 피는 동백꽃은 3~4월에 만개하여 홍도의 대표적 관광자원으로 자리하고 있다.
홍도 10경
1경 남문바위 : 남쪽에 위치한 바위섬에 구멍이 뚫려 있어 소형 선박이 왕래할 수 있는 석문으로 이 곳을 지나가면 행운을 얻게 된다.
2경 실금리굴 : 굴속에서 가야금을 타면 아름다운 소리로 울려퍼지는 신비한 석굴로 눈을 감고 묵상하면 가야금의 아름다운 선율이 들린다.
3경 석화굴 : 천연동굴로 석양에 이 굴을 바라보면 굴 속이 햇살에 반사되어 오색찬란한 꽃이 핀 것처럼 보인다.
4경 탑섬 : 수많은 탑의 형태로 이루어진 섬으로 편히 휴식 할 수 있는 넓은 평지가 있고 낚시터로 좋은 곳이다.
5경 만물상 : 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만가지 물상이 새겨져 있는 자연 예술 조각공원이다.
6경 슬픈여 : 부모를 기다리던 일곱 남매가 바다로 걸어 들어가 그대로 굳어 바위로 변해 버려 일곱 남매의 가련한 넋이 마치 부모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여 슬픈여라 불린다.
7경 부부탑 : 아이없는 부녀자들이 이 탑에서 축원하면 아이를 얻게되며 부부금실을 좋게 하는 영험이 있다하여 부부탑이라고 한다.
8경 독립문바위 : 옛날에 중국으로 가는 배들이 드나드는 북문이며 모양이 서울에 있는 독립문과 같이 독립문 바위라 불린다.
9경 거북바위 : 홍도를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용신을 맞이하고 액귀를 쫓고 섬사람의 생사화복을 관장하여 풍어와 안전항해를 보살펴 준다.
10경 공작새바위 : 공작새가 마치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형상이며 이 주변의 산새의 풍치가 빼어나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하는 곳이다.
홍도의 등대
: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졌다고 하네요.
홍도의 풍어제 : 정월에 풍어와 안녕기원
청어미륵
높이42cm, 둘레85cm 크기의 타원형의 한 쌍으로 각각 여자미륵과 남자미륵으로 불린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주민들의 계속된 출어에도 고기가 잡히지 않고 매번 둥근돌 2개만이 그물에 올라와 빈배로 입항 하던 중 한 어부가 그 돌을 홍도가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모셔 출어 때마다 기원을 하면 만선을 할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 그 후 주민들이 제단을 만들어 청어미륵으로 모신 후 홍도에 청어파시가 형성된 영험한 미륵으로 현존하고 있다.
홍도의 당산
홍도의 숯가마터
콜라병바위
선바위
부부바위
깃대봉
깃대봉은 해발 365m로써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홍도의 최고봉이다. 깃대봉은 독립문바위, 석화굴 등 해안절경과 조화를 이루어 홍도의 수려한 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후박나무, 소사나무 등이 숲터널을 이루고 있고 등산하는 동안 곳곳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
홍도 1구 마을에서는 1시간, 2구 마을에서는 40분 가량이 소요되며, 동남쪽으로는 흑산도와 태도, 만재도, 가거도 등 다도해를, 북쪽으로는 홍도2구와 독립문, 띠섬, 탑섬 등 부속도서를 조망할 수 있으며, 서쪽으로 가면 중국 상하이에 이르게 된다.
깃대봉을 오르면 1년 365일이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속설이 있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꼭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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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을 하선하여 홍도의 특산물 구입과 어제 많이 먹은 전복, 해삼에 미련이 있어 구입, 배에서 먹으려 했지만 잠이든 관계로 먹지 못하고
흑산도
흑산도에 도착 하선. 관광버스투어로 돼지곱창길을 오르니 흑산도아가씨 노래비가 덩그러니 우리를 맞이한다. 여기도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
한반도바위와
정약진의 유배지를 지나 칠형제바위 전경과
흑산도에서 제일 큰 해수욕장은 기사님의 설명으로만 구경한다.
점심은 홍도에서 구입한 안주를 반주 한 잔 하고 홍어회에 막걸리 한 잔으로 입맛을 보고 목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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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연혁
흑산도는 우리나라 최서남단에 위치한 천혜신비의 웅도(雄島)이다.
사면이 바다와 접해 있고 크고 작은 100여개(유인도11, 무인도89)의 아름다운 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섬 전체가 검게 보인다하여 黑山島라 칭해졌다 한다.
신석기시대 사람이 거주한 흔적은 있으나 문헌상 기록은 없고 통일신라시대 828년(흥덕왕 2년)에 張保皐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교역시 중간기착지로 부각되면서 주민이 거주해 왔다.
1018년(고려 현종 9년) 거란군의 난을 겪은 후 각 지역의 명칭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월산군(추정)에서 黑山縣으로 승격했으며, 그 후 왜구의 잦은 침탈로 1363년(고려 공민왕 12년)에는 주민을 양산강 하류 남포(영산포)로 집단이주시켜 空島가 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 후 왜구들이 물러가면서 주민들의 정착이 시작되었다.
1791년(정도15년)에는 김이수의 격쟁원정(擊錚原情)으로 닥나무세금의 감면을 받았던 곳이며, 1801년(순조1년) 신유사화로 손암 정약진이 귀양와서 1816년까지 거주하면서 14년만(1814)에 자산어보(慈山漁譜)를 집필하여 우리나라 해산물 및 어류연구에 한 획을 그은 곳이기도 하며, 1876년(고종13년)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다 귀양 온 면암 최익현선생의 유허비가 있는 곳으로 자랑스런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828년 (신라 흥덕왕 2년) 住民立島
1413년 (조선 태종 13년) 나주목에 편입
1678년 (조선 숙종 4년) 흑산진 설치
1896년 (조선 고종 33년) 지도군에 편입
1914.4.1. 무안군에 편입
1969.1.1. 신안군에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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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목포에는 숙소를 예약하지 않아 숙소 찾아 헤메이는 찻길 눈앞에 베네치아호텔이 있어 들어가니 메르스 때문에 손님이 없어 착한가격에 저녁식사 먹을만 한 곳을 알려달라고 하니 직접 운전하여 식당 관광 안내까지 하고 차를 호텔로 몰고 간다.
서비스 최고.
저녁식사 후 목포 신시가지까지의 해상 조명과 분수의 이색적인 볼거리에 웃음꽃이 활짝 피고 다음날 목포 관광길에 나선다.
갓바위의 모양에 심취하여 나의 생각에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걸작품을 감상하고 삼학도로 향한다. 삼학도에는 김대중기념관,
목포 어린이 바다 과학관이 있지만 문을 열지 않아 건물만 보고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섬이 3개라 삼학도라고 한다는데 삼학도의 느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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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 전설
여기 서 있는 한 쌍의 바위에는 몇 가지 전설이 내려온다.
아주 먼 옛날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살림살이는 궁핍하였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착한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부잣집에 머슴살이로 들어가 열심히 일했으나 주인이 품삯을 주지 않아 한 달 만에 집에 돌어와 보니 아버지의 손과 발은 이미 식어 있었다.
젊은이는 한 달 동안이나 병간호를 못한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저승에서나마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 바른 곳에 모시려다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불효를 통회하며 하늘을 바라 볼 수 없다며 갓을 쓰고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는데, 훗날 이곳에 두개의 바위가 솟아올라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라 하고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고 불렀다.
또 한가지는 부처님과 아라한(번뇌를 끊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성자)이 영산강을 건너 이 곳을 지날 때 잠시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놓고 간 것이 바위가 되어 이를 중바위(스님바위)라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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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으로
임진왜란의 역사가 어린 노적봉과 이순신장군 동상, 목포의 눈물기념탑, 오포대, 새천년 시민의 종 등이 산재해 있어 관광하기 좋고, 바로 아래에는 근대역사박물관(구 일본영사관,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에 전시물을 둘러보니 나라의 힘이 있어야 한다. 이미선 한복선의 현저고리 검정치마의 만세 삼창이 그럴싸하고요
. 늦은 점심은 무안낙지. 저녁은 능이백숙. 잘먹고 잘놀고 건강하게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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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이순신장군 동상
여기 한국 민족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서 계시다.
장군은 죽음 속에서 나라를 구원해 낸 민족의 은인이요,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 계신 애국정신의 상징이시다.
장군이 일찍 임진왜란 때 1597년 9월 명량승첩 뒤
10월 29일 우수영으로부터 이곳 고하도에 이르러
이듬해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옮기기까지
무릇 108일 동안 여기서 머무르며 서해를 가로막아
전선 만들고 군량 모으고 군사를 훈련하며 진을 쳤었다.
그러므로 목포 앞바다에는 장군의 숨결이 배어 들었고
지금도 다도해 하늘을 바라보면 장군의 모습 나타난다.
저 산 저 바다에 서려 있는 님의 맹세 조국의 제단에 자기 한 몸 바치셨네.
피묻은 발자국 따라 나도 그 길 가오리다
노적봉“큰바위 얼굴”
이순신 장군이 호령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큰바위 얼굴은 맞은편 이순신장군 동상과 함께 서남해안의 관문인 목포를 수호하고 있다.
노적봉의 기를 받으면 건강에도 좋다고 하여 다산목과 함께 소원을 빌기 위해 찾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아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구 목포일본영사관
구 일본 영사관 사적 제289호
전라남도 목포시 대의동 2가 1-5
1897년10월1일 목포항이 개항되고, 1897년10월26일에는 목포 일본영사관이 설치되었다. 이 건물은 일본영사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1월에 착공하여 같은 해 12월에 완공한 것으로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띄고 있다. 이후 한일간의 국제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목포이사청, 목포부청,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등으로 사용되었다.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지은 좌우대칭 사각형 모양의 건물로 중앙에 있는 현관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벽돌의 허리 돌림띠를 두었으며, 창문 왼쪽과 오른쪽에 흰색 벽돌을 반듯하게 장식하였다.
실내의 천장장식, 벽난로, 거울 등은 건축 당시의 모습대로 남아있다.
이 건물은 목포의 개항과 관련하여 역사적, 건축학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근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1981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지정일자 : 1999.11.20.
종 목 : 전라남도 기념물 제174호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한국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 1908년에 설립한 특수국책회사이다. 동척 목포지점은 본래 나주 영산포에 설립(1909.8.31. 출장소 개설, 1920.4.1. 지점 승격)되어 있던 것을 1920년 6월 1일자로 목포로 옮겨 온 것이다. 본 건물의 신축년도는 1921년 11월 7일로 여겨진다. 광복이후 1946년부터 1974년까지 해군 목포경기부가 창설되어서 이 건물에 주둔하였고, 1974년부터 1989년까지는 목포해역사 헌병대로 사용되었다. 이후 목포해역사가 전남 영암으로 이전해 감에 따라 1989년부터 1999년까지 약10년간 빈 건물로 폐허처럼 방치되었다가, 부속건물은 1999년 철거되고 현재 본동만 남아있다. 이 건물은 2006년도에 내외부를 개보수 하였고 현재는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의 내부는 많은 변형이 되었으나, 외부는 건축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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