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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평론 2023년 6월 칼럼
제목 : 초등학교 4학년 ‘의대반’과 국민 의료
저자 : 안재오
초등학교 4학년 ‘의대반’과 국민 의료
1. 서론 : 학벌주의의 역사적 배경
「어린 시절의 공부 성적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학벌주의 열풍이 식지를 않고 있다. 「공부 잘하면 출세한다」 혹은 「공부 잘하면 명문대에 간다」 는 학벌주의 풍조와 또 그런 사회적, 교육적 여건이 한국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가고 있는 와중에
초등 4학년 ‘의대 입시반’의 등장은 국민들을 더욱 낙담(落膽)시킨다.
물론 이런 학벌주의 풍조는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이런 학벌주의 의식과 또 이를 뒷받침하는 교육 제도는 입시지옥을 초래하여 학생들을 인권을 억압하는 제도이며 이제는 이것이 단순한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소멸의 위기로 발전되었다.
그 이유는 “공부 잘하기” 혹은 “좋은 성적 받기”가 극히 힘들다는 것이다. 다 아시다시피 한국의 고교생들은 모두가 소위 인서울 대학에 진학을 원하지만 실제로 거기 가는 사람은 상위 10%이다. 나머지 90%는 교육의 실패자,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공부 잘하는 것이 개인적인 재능이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부모와 가정의 뒷받침이 거의 절대적이다. 이런 심각한 교육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당연히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런 교육 경쟁을 감당할 수 없는 젊은이들은 당연히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게 된다.
한국의 극단적인 결혼율 감소, 출산율 감소, 노령화 등의 현상이 모두 이런 학벌주의에 기인함을 필자는 여러번 밝혔고 또 이를 방지하고 나라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교육공화당 (www.edupublic.kr) 창당 활동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런 학벌주의는 누가 인위적으로 나쁜 의도로 심은 것이 아니다. 이는 벌써 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려 광종 때 중국에서 온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한 과거 제도가 바로 학벌주의를 형성시킨 장본인이다. 이런 출세를 위한 시험 덕분에 한국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공부를 장려했다. 과거시험을 출세를 위한 만능의 수단으로 본 중국인들은 책 속에 금은보화가 있다고 시를 지었다. 송나라 황제인 진종은 권학문(勸學文)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富家不用買良田(부가불용매양전)
집이 부유해지려고 좋은 밭을 사지 말라
書中自有千鍾粟(서중자유천종속)
책 속에 스스로 천종(많은)의 곡식이 있다.
安居不用架高堂(안거불용가고당)
편하게 살려고 높다란 집을 짓지 말라
書中自有黃金屋(서중자유황금옥)
책 속에 스스로 황금으로 지은 집이 있다.
<宋나라 眞宗(진종)皇帝(황제)의 勸學詩(권학시)>
당시 학문으로 불리던 것이 일제 시대 이후부터 공부(工夫)라고 불린다. 위의 권학시에서 보는 것처럼 공부만 하면 즉 책만 보면 그 곳에 곡식이 있고, 집이 있고 황금으로 만든 집이 있다 라고 한다.
문제는 이런 출세를 위한 학문 연구 혹은 공부는 학문의 발전에 전혀 기여를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이나 동양에 과학이란 없었고 고작해야 고전에 대한 해석이 전부였다. 인문학의 중국 문화권에서는 전부였다.
이런 현상은 학문 내지 철학의 발생부터 서양과 동양은 큰 차이가 있었음을 주시해야 한다. 서양 철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 의욕이 학문 연구를 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그의 책 「형이상학」 (metaphysics) 1권에서 중국과 달리, 벼슬이나 돈이나 집 혹은 곡식이 학문 연구의 목적이나 동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인 탐구욕이 연구의 동력이라고 밝혔다. 즉 「인간은 본성상 알기를 원한다」 “All men by nature desire to know” 라고 갈파한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연구의 대상이 동양과 중국처럼 성현들의 말씀, 즉 경전이 아니라 사물의 원인 (cause)과 원리 (principle) 그리고 법칙임을 밝혔다.
물론 서양에서도 종교는 말씀에 기초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진리로 알고 여기서 삶의 구원과 도덕성을 찾는다. 이런 면에서 동양은 경전과 공자, 맹자 등 성현들의 말씀을 종교로 삼은 듯이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배경은 필자가 “누구나 서울대 갈 수 있는 나라 만들어야 한다” 라고 거리 연설을 할 때 어떤 서울대 학생이 “그러면 누가 공부하겠느냐?” 라고 반박을 한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필자는 독일의 경험을 예를 들어 필자의 주장을 방어했다.
필자는 독일 유학시절 한국교민 교회에서 청소년들을 지도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독일 학생들의 모습과 교육 시스템을 많이 알게 되었다. 독일는 명문대도 없다. 그레서 명문대에 가야 하다는 다는 강박관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공부하고 싶은 애들을 미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어떤 여고생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교과서를 끌어 안고 잠을 잘 정도로 학습을 열심히 했었다.
이런 사심없는 사물과 우주의 탐구에서 과학의 발전이 일어난다.
학문 연구 즉 공부를 오직 대학입시를 위해서 하는 것은 공부하는 학생 자신이나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극히 해롭다. 가령 수학의 경우 아직까지 한국에 이렇다할 세계적인 수학자는 없다. 그래도 최근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필즈 상을 받은 미국 프리스턴 대학의 한국인 교수 허준이 교수는 수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수능시험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책속에 금은이 없고 좋은 집이 없어도 사람들은 책도 보고 연구를 한다. 수학 잘하면 의대 간다는 현실적인 이익이 없더라도 수학을 좋아하고 연구할 사람들은 많다. 이처럼 순수한 지적인 호기심과 사물의 이치에 대한 흥미가 과학과 학문 발전의 원동력이다.
물론 대학 이후부터는 자신의 앞날과 이익을 위해서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 할 수 있다. 단 초•중•고에서는 그러면 안된다는 것이 필자의 논리이다. 즉 사물의 원리 탐구와 직업적인 관심이 결부될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예를 들어, 의사 될려고 특별 과외를 받는 다는 것은 극히 불합리하다.
2. 초등 4학년 ‘의대 입시반’
망국적인 학벌주의 광풍이 점점 거세게 불고 있다. 어린 시절, 초•중•고의 성적이 향후의 긴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아니 “초등 4학년 의대 입시반”에서 보듯이 이제는 초등학교 4학년의 성적이 그 후의 7~80년 간의 긴 인생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이다. 한국처럼 역사가 길고 비교적 동질적인 인간성을 유지하는 사회에서 이런 차별과 특권은 결코 용납될 수가 없다.
지난달 김모(47)씨는 새 학기에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딸이 다닐 수학 학원을 찾다 ‘의대반’이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서울 대치동의 한 수학 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초6 커리큘럼이 ‘의대반’과 ‘SKY(서울·고려·연세대)반’ ‘일반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김씨가 “아이를 의대에 보내고 싶다”고 하자 “너무 늦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학원 관계자는 “요즘은 의대에 보내려면 최소 초등 4학년부터 준비해야 한다”며 “초등 6학년 커리큘럼의 경우 중학교 1~2학년 과정은 여러 번 공부하고 중3 기본 개념까지 공부한 학생들이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4년 치 선행 학습이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6 수학만 예습했던 김씨 딸은 테스트 결과 일반반 대상이었다. (조선일보 2023.02.18.)
의대 선호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가운데, ‘의대 열풍’이 초등학생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최근 학원가에선 ‘초등부 의대 준비반’이 성행하고 있다. 이 같은 초등부 의대 준비반엔 최소 1년 이상의 선행 학습을 했다는 것을 전제로 ‘입학 고사’를 치르는데 경쟁률이 높게는 10대1까지 올라간다.
이렇게 의대 입시 준비 열풍이 거세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초등학교 의대 열풍은 지방으로까지 전염되어 시골학원에도 초등 의대반이 터졌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충남 홍성군의 한 읍에 위치한 수학학원에 지난달 14일 새로운 수업반이 개설됐다. 학부모들의 요청을 반영해 개강한 반의 이름은 ‘초등 의대반’.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 우등생 10명이 이 수업을 듣고 있다. 이 반의 목표는 의대 진학. 수도권 의·약대보다는 지역인재전형으로 지방 의대와 약대에 합격하는 것이다. 학원장 김모(52)씨는 “서울의 ‘초등 의대반’처럼 고교 수준의 내용을 선행해서 가르치진 않지만, 초등학교 범위 내의 최고난도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심화 수업을 진행한다. 이곳 초등학교 학부모들도 의대 진학 문의를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골의 학원가도 변하고 있다. 과거엔 교대, 경찰대 준비반이 많았는데 요즘은 ‘의대반’이 대세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 23.04.24.)
의대 졸업자 즉 의사가 안정적인 고수익을 가지기 때문에 의대 입시 준비를 어린 시절부터 준비한다는 것은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과연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좋은 일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의사 직업은 산업이나 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못한다. 한국에서 의대를 나와서 의학 과학자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의술(醫術)이 인술(仁術)이다」 라는 말은 이제 영원히 사라진 말이 되었다. 인간의 생명을 구한다는 의사직의 숭고한 사명이나 소명감은 더 이상 없다. 그래서 진짜 환자의 목숨에 관련된 의술 즉 응급의학이나 산부인과, 외과 그리고 소아과 등은 지원자가 드물다. 소아과 전문의가 없어서 지방에서는 어린 환자들이 앰뷸런스를 타고 이 병원 저 병원 돌아 다니다가 불행을 당하는 경우가 자주 신문에 등장한다.
도대체 이게 나라인지 다시 묻고 싶다. 거기다가 지방이나 농어촌에는 종합병원이 없어서 중환자들은 서울로 와야 한다.
「초등 4학년 의대반」과 더불어 한국의 국민복지와 국가의 정체성은 사라져 간다.
지난 연말 강원도 홍천에서 7살 아이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전전했던 이야기를 하던 지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여행지에서 잘 놀던 아이의 체온이 밤늦게 갑자기 40도까지 치솟았고 아이는 열경련을 일으켰다. 119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수소문했지만 “소아과 전문의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당했다. 울며 사정한 끝에 아이는 응급실이 아닌 구급차에서 해열주사를 맞을 수 있었다. 이후 소아 야간진료가 가능한 곳을 수소문해 도착한 경기도 한 병원은 독감·코로나 환자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응급실 못 간 애들 거기 다 모여 있더라. 애 수액 맞히면서 생각했어. 진짜 여기 의사들이 의인이다.” (한겨레 23.04.27.)
3. 결론 : 학벌주의와 더불어 무너지는 국민 정체성
의대 정원을 늘인다고 필수적인 의료 서비스 부분이 개선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모두가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산주의 국가처럼 강제적으로 의료 인력과 의학 시설을 국가 차원에서 분배할 수도 없다. 문제는 무너진 수도와 지방간의 균형이다.
이를 다시 복구하는 것이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교육의 역할이다. 서울과 수도권이 이렇게 비대해진 것은 역설적으로 교육 때문이었다. 즉 서울에 집중된 좋은 교육 기관들이 인재들을 서울로 불렀고 지금도 그런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교육의 균형을 통해서 국가의 자원과 인재를 다시 분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실업 교육 혹은 직업 교육의 활성화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고 전문 직업 교육을 받으면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에서 행해지는 일-학습 병진제와 도제교육(Ausbildung)이 도입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방의 활성화를 위해서 좋은 대학을 지방에 설립해야 한다. 이런 것은 현행 법의 체계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교육에 대한 국가적인 관리와 지원이 필요하다. 설령 사립 학교라고 해도 국가의 통제와 감독을 받아야 한다. 헌법에 명시된 대학의 자율성 부분은 수정되어야 한다. 헌법 31조 4항 즉
「④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는 수정이 필요하다.
설령 사학재단들이 자율적으로 대학을 운영하더라도 학사 관리, 대학 재정 운영 그리고 교육의 질적 수준에 대한 국가적 관리와 통제가 필요하다.
대학의 자율성은 교수의 권위와 성적 및 졸업 관리에 대한 권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대학의 자율성이 아니라 교사와 교수의 자율성이 중요하다.
의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성립한다. 즉 일단 모든 학생을 국비 장학생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 조건 위에서 의료 서비스의 수요와 공급을 참조하여 분야별 입학 정원을 조정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국민의 건강보다는 미용에 치중하는 피부과, 성형외과만 번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대학의 자율성이 아니라 국민 공공 복리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교육의 수준과 관리의 측면에서 공립이나 사립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