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수 서 원
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1963년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중종 36년(1541) 7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이듬해인 중종 37년(1542) 8월 이곳 출신의 성리학자인 회헌 안향(安珦, 1243~1306)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했다가, 중종 38년(1543) 8월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사당 동쪽에 설립하여 사원(祠院)을 완성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서원 이름 백운동은 중국의 주희가 강학한 백록동서원을 모방한 이름이다.
주세붕은 그가 편찬한 ≪죽계지(竹溪志)≫ 서문에 사묘와 서원을 세우게 된 동기에 대하여,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존현(尊賢)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을 봉사하는 사묘를 세웠고, 겸하여 유생들의 장수(藏修)를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서원이 들어선 곳은 숙수사(宿水寺) 옛터로서 안향이 어린 시절 공부를 하던 곳이다. 서원은 성종 39년(1544)에 안축(1287~1348)과 안보(1302~1357)가 추가 배향되고, 명종 1년(1546)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후손 안현(1501~1560)의 노력으로 서원의 경제적 기반이 확충되고 운영방책이 보완되어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명종 3년(1548)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1501~1570)은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이듬해인 1549년 1월에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1499~?)에게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1484~1555)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여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는 뜻을 담은 ‘소수(紹修)’로 결정하고 백운동 소수서원이라고 명명했다.
‘소수’는 순흥에서 폐지된 학교를 다시 세워 단절된 도학을 잇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세조 2년(1456) 9월에 순흥으로 유배된 세종의 다섯째 아들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1457)의 단종 복위 밀모사건으로 인해, 순흥부가 풍기군의 한 면으로 편입, 강등되고 순흥향교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명종 5년(1550) 2월 21일 ‘백운동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는 왕명에 의하여 성리학의 정통성을 서원도 인정받게 된 것으로 이전의 서원과 다른 차원의 서원이 되었다.
그 후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이 추가 배향되었으며,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하지 않고 존속한 마흔 일곱 개 서원 중의 하나가 되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민족 교육의 산실이자 인재 배출의 요람이었다.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들 대부분이 소수서원 출신이며, 소수서원에서 배출된 인재는 4,000여 명에 이른다.
소수서원의 입구까지는 소나무 숲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이 소나무는 겉과 속이 모두 붉다 하여 적송이라 하며, 학자수(學者樹)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일본의 국보 제1호인 미륵반가사유상 또한 이 고장 적송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본래 서원은 교육을 하는 곳이지만 서원마다 받드는 분이 있어 제사도 중요시 여긴다. 때문에 서원의 공간은 크게 교육공간과 제사공간으로 나뉜다. 소수서원은 사묘에서 출발하여 교육기관이 된 만큼 그 배치가 엄격한 규칙에 의하기보다는 매우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소수서원은 건물들이 놓인 방식이 자유롭다.
강당에 견주어 사당공간이 왼쪽 뒤켠으로 치우쳐 있고 사당의 자리도 매우 부적합하니 최소한 사당을 뒤에 놓고 강학공간을 앞에 놓는 ‘전학후묘(前學後廟)’조차도 염두해두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소수서원은 도산서원의 엄격한 계층성도, 병산서원의 단아한 짜임새도 없으며, 어떤 위계질서가 주는 엄숙함보다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아마 소수서원이 최초의 서원이어서 어떤 규칙이 정해지기 이전에 형편과 필요에 따라 건물을 세워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서원에 들어서면 서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당간지주 한 쌍이 보이는데 숙수사의 옛터였기 때문이다. 절의 흔적은 이 당간지주나 소수서원 사료전시관 마당에 모아놓은 석등, 석탑의 부분으로 남아 있는데, 1953년에는 손바닥만한 금동불 수십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소수서원을 들어서서 오른편 개울을 보며 죽계천 멀리 퇴계선생이 창건했다는 취한대(翠寒臺)가 남아 있다. 그리고 정자 오른쪽 숲에는 돌탑이 있다. 돌탑은 인근 청구리 사람들이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모여 제사를 지내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곳이다. 현재 죽계천 건너 취한대와 돌탑은 소수서원 관리상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취한대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취한대의 앞에는 주세붕 선생이 직접 썼다고 전하는 ‘白雲洞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소수서원 정문 좌우에는 성생단(省牲壇)과 경렴정(景濂亭)이 자리하고 있다. 성생단은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바치는 제물을 선별하고 잡던 제단터이다. 우측의 경렴정은 1543년 주세붕 선생이 지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중의 하나이다.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를 숭상한다는 뜻에서 주돈이의 호인 ‘염계’의 첫 글자인 ‘濂’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소수서원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학당(명륜당)과 마주하게 된다. 강당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는 곳으로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이 달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이 강학당은 동향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팔작기와집이다.
북쪽에만 방이 있고 건물 주위로는 툇마루가 조성되어 있다. 대청의 문들은 모두 들어 올려 열 수 있게 되어 있다. 강당 안의 대청 북쪽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紹修書院’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니 바로 서원의 중심건물임을 말해준다.
그 뒤에는 선비들의 기거공간인 일신재와 직방재가 나온다. 원래 서원은 ‘전학후묘’라 하여 학당을 앞쪽에 그리고 뒤편에 사당을 세우는 것이 상례이다. 하지만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라 해서 동쪽에는 학당을 서쪽에는 사당을 세워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
‘이서위상(以西爲上)’이라는 우리나라 전통의 위차법(位次法)에 따르고 있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명륜당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원장, 교수 및 유사들의 직무실 겸 숙소이다. 독립된 건물이 아닌 연속된 한 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편액으로 구분하고 있다.
직방재의 직방은 마음과 행실을 곧고 바르게 닦음을 뜻하고, 일신재의 일신은 몸과 마음을 나날이 새롭게 함을 뜻한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중앙의 우물마루 2칸과 양쪽 협실 앞의 툇마루로 조성되어 있다. 집들은 가운데 각각 한 칸짜리 대청이 있고 양옆으로 벌어져 온돌방이 있는데, 집중하여 공부하기에 큰 방이 필요치 않다고 여겼던 옛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 오른편 개울 쪽으로는 ㄱ자로 앉혀진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지락재는 개울을 마주한 담장에 이어져 있어 많은 유생들이 이곳에서 자연의 기운을 만끽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 연마에 힘을 썼으리라 생각된다. 지락재와 학구재는 학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던 곳으로 일신재 동북쪽에 ㄱ자로 배치되어 있다.
남향을 한 학구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중앙에는 우물마루, 좌우에는 온돌방 각 한 칸을 두었다. 서향을 한 지락재는 북쪽의 한 칸은 온돌이고, 나머지 두 칸은 우물마루로 처리했는데, 외부로 면한 면은 모두 개방했다. 지락재와 학구재는 선생들의 거처인 일신재와 직방재 건물보다 바닥면의 높이를 낮게 조성하여 건물간의 위계를 나타냈다.
직방재 왼편으로는 장서각이 자리하고 있다. 장서각에는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어제 내사본을 비롯 3천여 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으로, 서책은 좌우지선(左右之先)의 예에 따라 왼편에 세워져 있다.
장서각의 뒤편으로는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수를 준비하던 전사청(典祀廳)과 회헌 안향 선생, 신재 주세붕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영정각이 자리하고 있는데, 영정각에는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가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장서각과 직방재 뒤에 위치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소수서원 내에는 1993년 신축한 건물로 사료전시관과 충효교육관이 있으며, 전시관에는 회헌영정(국보 제111호)과 문선왕전좌도(보물 제485호) 등 중요 유물과 각종전적을 소장하고 있다. 그 외 소수서원을 창건한 신재 주세붕의 영정, 조선 명신 오리 이원익의 영정, 명종이 창덕궁 서총대에서 문무백관들과 연회하는 모습을 그린 서총대친림연희도 등이 소장되어 있고 기타 회헌글씨, 역범도병풍, 명나라 사람 주지번이 쓴 회헌시호족자, 소수서원의 창설과정에서부터 서원 관련 사실을 적은 운원잡록, 소수서원이 소유한 토지목록인 소수서원 전답안, 경상감사가 풍기군수에게 보낸 공문인 관찰사 관문, 역대 서원장의 이름을 적은 소수서원 임사록, 소수서원에서 학문을 닦은 유생들의 명부인 소수서원 입원록, 안축의 죽계별곡이 수록된 죽계지 판목 등 소수서원과 관련된 다수의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부 석 사
부석사는 오늘날까지 규모를 잃지 않고 보존해 온 천년 대찰 중에서 그 창건 유래와 역대 고승의 활약이 비교적 확실한 보기 드문 절이다. 부석사는 신라의 삼국통일기인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에 의해 창건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창건 연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당나라 종남산 화엄사에서 지엄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도를 닦은 의상이 670년에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돌아온 뒤 다섯 해 동안 양양 낙산사 수행 다음에 전국을 돌며 자신이 체득한 화엄종지를 펼 수 있는 자리를 찾던 끝에 마침 이곳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절을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의상이 절을 지으려 할 때, 이곳에 있던 생각이 다른 무리들이 창사를 방해하였다. 그들 무리를 물리치고 절을 세우는 데는 국가적인 지원도 필요했지만 그들 반대세력을 굴복시킬 수 있는 화엄의 위력도 필요했다.
그런데 바위가 공중으로 떠서 그 무리들을 위협하는 신변이 생겨 그들이 도망을 간 후에야 의상은 순조롭게 절을 지었다. 그리고 절 이름도 공중에서 신묘한 변화를 일으킨 바위의 이름을 따서 부석사라고 하였다. 부석사의 창건 걸림돌이었던 무리들은 전통적인 사고에 집착하여 통일을 즈음해서 크게 변화해 가는 신라 사상계의 추세에 맞서고 있던 세력으로 보인다.
의상이 화엄사상을 펼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부석사는 화엄종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인 의상의 문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출신은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9세기에 들어 부석사는 대덕의 호칭을 받은 법사가 많이 배출되었고 승려가 되기 위해 부석사에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대중적인 지위를 확보하였다. 절의 규모도 커져서 대석단 위에 여러 당우를 갖춘 거대한 가람이 이루어졌고, 재정 기반도 넉넉해졌다.
부석사는 초창 때보다도 9세기 이후 왕권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후삼국이 쟁투를 벌일 때 궁예가 부석사에 쳐들어와서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내리쳤다는 기록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원융대덕이 대장경을 찍었는데, 그 경판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고 고려 말에 이르러 공민왕 때에 국사로 봉해진 진각국사 원응은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중건하였다.
세월을 거듭하면서 부석사는 초기에 의상이 터를 잡을 때의 모습보다 더욱 규모가 커지고 위엄을 더해갔다. 배불숭유의 조선시대에도 부석사는 어느 정도의 사세를 유지했다. 성종 21년(1490)에 조사당을 중수하고 1493년에는 단청을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1555년에 소실된 안양루를 20년 뒤인 1576년에 중건하는가 하면 범종각도 1746년에 불탔을 때에 곧바로 다시 지을 만큼 부석사는 힘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기록인 ≪순흥읍지≫에는 무량수전, 조사당과 취원루, 장향대, 상승당, 법당, 선당, 승당과 종각 아래에 당우가 대여섯 채나 있던 모습을 전하고 있어 지금보다도 절이 더 꽉 차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에 들어서는 1916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하였고,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고 했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전체 사역을 정비하면서 일주문과 천왕문, 승당 등을 새로 지었으며, 1996년에는 보장각을 개수하여 유물전시각으로 꾸몄다.
[가람배치]
부석사의 가람배치는 산자락 경사를 최대한 이용하여 아래에서부터 위로 상승해간다. 부석사의 공간을 크게 나누어 보면 아래로부터 일주문 공간, 천왕문 공간, 안양루 공간, 무량수전 공간이 차례로 이어지고, 무량수전 뒤쪽으로 조사당과 자인당 공간이 있다.
‘태백산 부석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은 1980년 부석사를 정비할 때 새로 세운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양쪽으로 사과밭이 나오고 길의 왼쪽에 당간지주가 보이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 천왕문과 사천왕도 1980년에 새로 마련한 것으로 조선시대 후기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여기에서 요사채를 거쳐 범종루,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에 다다르기까지 아홉 단의 석축 돌계단을 넘어야 하는데 그것은 곧 극락세계의 구품만다라의 이미지를 건축적 구조로 구현시킨 것이다. 이 대석단을 올라 무량수전까지 오르게 되면 꽤 힘이 드는데 이것 또한 극락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힘이 드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말도 전한다.
천왕문에서 세 계단을 오른 넓은 마당은 삼품삼배관 가운데 하품단 끝이다. 문을 나서 대석단을 오르면 삼층쌍탑이 있고 그 왼편으로 요사채가 있다. 여기서 다시 세 계단을 올라가면 범종각과 괘불지주를 볼 수 있다. 중품단의 끝은 범종루가 된다.
서쪽의 건물을 조사당 옆에서 옮겨온 취현암으로 17세기의 건물로 여겨진다. 이 건물을 1980년도 보수공사 때 이쪽으로 옮겨 온 것이다. 범종루에서 다시 세 계단을 오르면 상품단이 되며 마지막 계단은 안양루 누각 밑을 거쳐 무량수전에 당도하게 되어 있다. 무량수전 앞에는 석등이 있고 오른쪽 뒤편으로는 부석과 선묘각이 있다.
부석을 돌아 아래쪽으로는 삼성각이 있고 그 옆의 요사채는 주지스님의 거처로 사용하는 삼보전이다. 무량수전 오른쪽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갈래 길이 나온다. 오른쪽 길로 가면 조사당이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응진전과 자인당이 나오는데 이 두 전각은 세운 지 몇십 년이 되지 않은 건물이다.
19세기 중엽의 기록인 ≪순흥읍지≫에 전하는 부석사의 세부 모습은 지금과 다른데 응진전과 자인당이 있던 곳에는 영산전과 응신암이 있었다. 그리고 무량수전의 서쪽에는 취원루가 있었고 그 북쪽에 장향대, 동쪽에는 상승당이 있었다.
안양문 앞에 법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괘불대 바로 윗단 낮은 석축 한단으로 높인 자리이다. 법당의 왼쪽에는 선당, 오른쪽에는 승당이 있었다. 그 앞에는 종각이 있었고 지금의 요사채가 있는 곳에 대여섯의 당우가 있다고 했다. 그 앞으로 회전문이 있었고 그 아래로 지금의 천왕문 자리에 일주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배치를 보면 종국에는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발길이지만, 중심에서 법당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된다. 학자들은 그곳이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석사의 전체 계획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에서 한번 마무리되며, 나아가 한 단 더 오른 영역에서 다시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으로 가도록 한 것이 된다.
부석사의 가람배치는 대석단이 가르는 큰 경계 셋이 다시 낮은 경계들로 갈라지면서 아홉 단을 이루며 극락세계에 이르는 구품만다라를 이루고 있다고 풀이되고 있다.
경계를 나누는 것에는 약간 차이가 있는데, 천왕문에 이르렀을 때까지가 하품, 천왕문에서 범종각까지가 중품, 범종각에서 안양루 아래까지가 상품 영역이고, 안양루를 거쳐서 무량수전 영역에 이르면 극락에 이른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천왕문에서 범종각까지가 하품, 범종각을 지나 안양루까지가 중품, 안양루 아래에서 무량수전 단 아래까지가 상품이며, 무량수전 안에 들어섰을 때에 극락에 이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모두 정토신앙을 기준으로 부석사를 해석한 것이다.
부석사의 이러한 배치에 대하여 일반적으로는 아미타불을 모신 곳으로 구품만다라의 형상을 펼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화엄사상에 근거하여 ≪화엄경≫에 나타나는 34품 8회 10지의 단계를 상징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부석사에 이르기 전까지는 세 칸이고 첫 석축 공간이 제9지가 되며 가람의 마지막 단계인 무량수전 단은 제10지로서 제34품인 ‘입법계품’ 대자재천(大自在天)이 되는 것이다. 괘불지주 바로 위 빈터에 있던 법당에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셨다고 보면, 화엄의 세계 맨 위에는 아미타불이 계신 화엄경과도 일치한다. 이러한 해석으로 보면 부석사는 화엄경을 현실로 펼쳐 보인 화엄의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가람구조는 의상 당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왕의 뜻을 받들어 세운 가람이므로 그랬을 가능성도 있지만 의상의 수도행을 보면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있는 기록으로는 궁실을 수리하고 높은 담을 쌓으려는 문무왕에게 의상이 만류하는 편지를 보내자 왕이 덕에 감복하여 그 뜻을 받아들이고 빈한하게 살고 있는 그에게 많은 땅과 노비를 보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모일 때면 내려와 초가를 짓고 강론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의상이 거처하던 곳은 조사당을 중심으로 한 자리에 있던 매우 협소한 초막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과 같은 규모와 배치는 의상보다 훨씬 후대인 9세기에 들어서서 화엄종이 큰 종파로 성장했을 때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본다. 그때 대석단과 무량수전도 세웠으며 석등이나 당간지주 같은 석물들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의상의 제자들은 신라말까지에 걸쳐 불국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귀신사, 갑사 등 화엄십찰을 세웠는데 이들 사찰 중 상당수가 중요한 산들에 높직하게 쌓아올린 구조를 갖고 있어 부석사의 모습을 그대로 계승하는 양상을 보인다.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창건 연대가 확인된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보 제18호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 건축 양식의 가장 완숙한 형태를 보여주는 고려 사원건축의 백미로 일컬어지고 있다. 무량수전이라고 안진경체로 쓰여진 현판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무를 때 썼던 친필이라고 전해 온다.
1916년 해체․수리할 때 발견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 따르면 이 법당이 공민왕 7년(1358) 왜구들에 의해 일부가 불탄 뒤 우왕 2년(1376)에 원응 진각국사가 중수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구조미나 부재의 다듬는 수법 등이 다른 고려 건축물에 비해 앞선 형식을 보이므로 원 건물은 이때보다 한 세기쯤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며 주심포집으로 고려시대 주심포양식의 모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 기둥의 배흘림과 안쏠림, 귀솟음과 평면의 안허리곡 같은 수법이 쓰여지고 있다.
무량수전 앞면의 3칸에는 분합문과 광창, 좁은 맨 가장자리 칸은 두 짝 창으로만 되어 있다. 창들은 모두 위쪽으로도 올려 고정시킬 수 있는 들어열개 형식으로 되어 있어 큰 재를 올릴 때에는 활짝 열어 개방할 수 있다. 천장을 보면 기둥과 보가 역이고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장을 볼 수 있다. 건물안의 천장을 막지 않고, 모든 부재들을 노출시킴으로써 기둥, 들보, 서까래 등의 얽히고 설킨 엮임이 공간을 확대시켜 주는 효과는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특징이다.
이러한 방식은 아름답게 보이려고 치장한 것이 아니라 지붕의 무게를 고루 분산시키는 노력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바닥에는 원래 녹유를 두껍게 입힌 전돌이 깔려 있었는데 극락세계의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녹유전을 걷어내고 마루를 깔게 된 것은 엎드려 절을 하는 풍조가 일반화된 조선시대의 예배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불상은 아미타여래로 뒤에 나무로 새긴 불꽃무늬의 광배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2.78m 높이의 소조상으로 국보 제45호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 방식으로 옷을 입었고 옷주름은 굵으나 자연스럽게 흘러 내려서 석굴암 본존불과 유사한 균형미를 갖추고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다.
이 아미타불의 경우 협시보살이 없는데, 본래 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주존불은 온 세상을 두루 비춘다는 법신 비로자나불이다. 그런데 이 화엄종찰에 아미타불이 모셔진 것은 후대에 변형된 것이 아니라 창건 조사 의상의 의도대로 처음부터 이렇게 모셔온 것이다.
원융국사의 비문에 의상은 원래 불전 안에 오직 아미타불만을 모시고 협시보살은 모시지 않았으며 또한 탑도 세우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의상이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신 것은 의상의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상은 화엄사상의 요체를 터득하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으나 그러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출가수행자는 그리 많은 숫자라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수행정신의 참뜻을 살려 아미타불의 큰 힘을 빌려 일반인들을 진리에 접근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아미타불은 본래 법장 비구라는 보살로 48가지의 큰 서원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을 통해 이를 이루어낸 결과로 현재 서방 극락세계에 머물러 계신다는 부처이다.
그 서원 하나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한 자비에 가득찬 것들로서 모든 생명이 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구도형의 구체적 내용들이다. 극락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아미타불의 본원에 따라 구도행을 실천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염불이다. 한결같은 정성으로 간절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며 정토에 나기를 원하기만 해도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행은 그가 지닌 사회경제적 배경이나 제반 조건을 떠나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열려 있는 통로였다. 그러니 신라 당시의 일반 대중에게는 가장 절실한 신앙이었을 것이고 그 문을 열기 위해 부석사에 본존으로 아미타불을 모시게 되었을 것이다.
[석등]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국보 제17호이다. 석등은 높이가 2.97m이고 네 창 사이의 면에 볼록 솟아 나온 공양보살상이 있다.
사각의 대석 위에 여덟잎 연꽃이 피어나는 모양으로 하대석을 조각하였는데, 꽃잎끝마다 귀꽃이 솟아오른 모습은 9세기 석등이나 부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팔각 간주석이 화사석을 받치고 있고 상대석은 피어오르는 여덟잎 연꽃인데, 꽃잎 한 장마다 보상화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다. 무거운 듯한 지붕들도 처마선의 반전으로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며 아래쪽으로 절수구 홈이 나 있다. 석등 앞에는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난 모양을 조각해 놓은 배례석이 있다.
[삼층석탑]
본래 탑을 모시지 않은 의상의 뜻으로 보면 부석사 초창 때에는 없었으며 9세기에 중창되면서 자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5.26m로 이층기단 위에 3층으로 쌓아 석가탑을 본뜬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보물 제249호이다. 하층기단이 넓어 안정감이 있으나 지붕돌은 다소 무거운 느낌이다.
1960년에 해체․수리할 때에 3층몸돌 중앙에서 사리공을 발견했지만 사리구는 없었고 기단부에서 철제탑, 불상조각, 구슬 등을 찾았다고 한다. 석탑이 여기에 놓은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서쪽에 앉은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마주하는 자리가 동쪽 끝이므로 여기에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무량수전 마당은 이미 석등이 자리 잡고 있고 탑을 앉힐 너비도 되지 않으므로, 비껴서 동쪽에 놓았다는 것이다.
[조사당]
국보 제19호인 조사당은 그 절의 조사스님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전각으로 바로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을 모신 곳이다. 절을 창건했거나 종파를 연 고승을 모시는 조사신앙은 선종에서 하는 신앙방식이다. 선종이 도입되어 자리잡은 것은 9세기의 일로 부석사의 조사당도 9세기 이후에야 세워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의상의 부도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고 조사당은 의상이 초창하고 수도하던 자리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 있는 조사당은 1366년 원응국사가 부석사를 중창불사하면서 다시 세운 것이다.
조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주심포집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처마의 서까래가 길게 내려 뻗어 지붕의 무게가 무거워 보이지만 그로 인하여 이 전각은 작은 건물이지만 왜소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정면의 가운데 칸에는 문이 있지만 양옆으로는 바람과 빛이 드나드는 살창이 있다. 최근에 보수하면서 부재를 많이 갈아 끼웠다. 내부에는 의상대사상을 모시고 일대기를 그린 탱화를 걸었는데 다 20세기 들어서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들이다. 바닥에는 고려 때처럼 전돌이 깔려 있다. 벽에는 볼래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그려져 있었다.
이 고려시대의 벽화는 조사당을 해체․수리할 때에 벽채로 떼어서 보관하였다가 지금은 유물전시각에 진열해 놓았다.
동쪽 창 밑에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면서 “싱싱하고 시들음을 보고 나의 생사를 알라”고 했다는 선비화(仙扉花)라고 전한다. 학명으로는 골담초라고 하며 “스님들은 잎이 피거나 지는 일이 없어 비선화수(飛仙花樹)라고 한다”고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의상대사가 꽂은 바로 그 나무인지는 알 수 없다.
순흥 벽화고분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에 위치한 벽화고분으로 사적 제313호이다. 고분의 분구는 원형이지만 지금은 경사진 남면에 분구의 유실토가 퇴적되어 남북으로 약간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분구 아래쪽에는 막돌로 호석을 돌렸다.
분구의 높이는 경사진 남면에서 4.1m, 현실바닥에서 5.6m이다. 고분의 내부 주체인 묘실은 현실 남벽의 서쪽에 치우쳐 달려 있는 연도와 현실로 이루어진 횡혈식 석실이며 현실의 크기는 동서 3.55m, 남북 2.02m로서 평면이 동서로 긴 장방형을 이루었고 높이는 2.05m이다. 연도는 짧으며 입구에는 돌문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묘실은 구릉 경사면의 자연암반을 파낸 장방형 광내에 축조했는데, 현실의 네 벽은 거칠게 다듬은 네모진 돌로 위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았고 벽 안쪽면에는 석회를 발랐으며 천장에는 2매의 큰 판석을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덮었다.
현실 바닥의 시상대는 막돌을 쌓아서 만들고 윗면과 서측면에는 두껍게 석회를 발랐으며 서벽과는 떨어져 있으나 동․남․북 벽면과는 맞붙어 있다.
벽화는 석회를 바른 현실의 네 벽, 연도 좌우벽, 시상대의 앞면 등에 그려져 있는데먹선으로 윤곽을 잡고 그 안에 붉은색․노란색 등의 약간의 색채를 칠해 넣은 일종의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을 위주로 하고 있다. 이밖에 먹선에만 의존한 백묘법(白描法)도 보인다.
그러나 북벽의 서측에 그린 연꽃무늬의 경우와 같이 먹선 대신에 주선(朱線)으로 윤곽을 잡고 노란색을 칠해 넣은 것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먹선이다. 벽화의 배치상태와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댓글 몰랐던 사실 알려줘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