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절약생활과
각종 주변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올려본다.
여기에 올린 글들은 이미 책자나 각종 자료,
인터넷 등에서 여러차례 나왔고 어느 정도 검증이 되었든 내용들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렇지 않는 내용도 있을 수도 있지만 무조건 아니라고 하지말고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 준다면 받아들이고 수정을 할 생각이다
우리가 선대에게 배우는 것은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만 배우면 된다.
일부 사람들에 의해 나쁘게 주장이 되기도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들어보면 요점이 없다.
있다면 군사독재를 했다는 주장밖에 없다.
항상 어떤 대상을 평가할 때 객관성이 있어야 하고 그 때 당시의 환경이 어떠했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잘못 배운 것이라고 본다.
군사독재를 했건 민주투사이건 간에 어느 역대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만큼 생활하고 통치를 했을까 ?
그가 여론조사에서 항상 1위로 나오는 것은 국민들이 모두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세대가 많이 죽고 신세대가 주축인 지금 박정희가 1위로 나오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
앞으로는 어떤 평가가 이루어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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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를 싫어하는 대통령]
고 박정희 대통령은 공짜를 매우 싫어하셨다고 한다.
권력자가 되면 당연히 공짜였을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하는 판에 군부독재
시대때는 당연히 그렇지 않겠냐는 것이 지금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아니엇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대통령 경호차가 요금을 내지 않고 지나가면 경호실장을 혼냈다. 그 뒤로는 반드시 경호 선도차에서 대통령 일행의 통행료를 한꺼번에 지불하곤 했다. (요즘은 어떤지 ?)
[국산애용과 한 번 사면 다 떨어질 때까지, 수선해서 사용]
박대통령은 옷가지와 구두를 꼭 돈내고 맞추어 신고 있었다.
와이셔츠는 삼도물산, 트레이닝복은 한일합섬, 양복은 세기양복점, 구두는 금강제화의 제품을 썼다.
박대통령은 말년에 축농증 수술을 받고 담배를 끊었다. 몸무게가 4kg쯤
불어 64kg쯤 되었다.
헌바지의 허리쪽을 늘리는 수리를 해서 계속 입고 다녔다.
꼼꼼한 성격의 박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자로 허리를 잰 다믐 부속실 직원을 불러 『요 만큼만 늘리라』고 지시했다.
박대통령은 단순한 스타일의 복장을 좋아했다.
양복 웃옷은 뒤에 한 줄로 가른 것을 입었으며 구두도 고전적인 투박한 형식이었다.
국산시계를 차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칼국수, 국수, 비빔밥를 좋아했던 대통령]
박대통령은 칼국수를 즐겨 먹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칼국수를 좋아했던가? ) 점심의 태반은 국수로 때웠다고 한다. 반찬이라야 김치, 깍두기 정도로 단출한 칼국수점심이었다.
박대통령에게 초대받아가면 배고프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 요리사들이 칼국수에 새알크기의 쇠고기 덩어리를 서너개씩 넣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어린 시절 선산에서 즐겨 먹었던 비름나물 비빔밥을 그리워하였다. 청와대 직원들은 비름나물을 구하기가 어렵자 청와대 터밑에 비름나물을 심었다.
박대통령은 간식을 거의 먹지 않았으나 커피를 좋아했다.
[양주가 아니라 막걸리를 좋아했던 대통령]
박대통령이 최후의 반찬자리에서 양주를 마셨기 때문에 시바스 리갈과 같은 양주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때 시바스 리갈 ~ 국산양주는 고등학생들 소풍갈 때도 가져갔다.
식품점에서는 얼마 안했다.
술집에서는 비싸겠지만..지금 국산양주가 이마트 매장에서 2만원 하면 술집에서는 20만원 한다.
사실 박대통령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 양조장에서 만든 빽빽한 막걸리를 가장 즐겨 마셨다.
대통령부속실직원들은 대통령이 막걸리를 과음할까봐 신경을 썼다.
[골프 대신 배드민턴으로 바꾸다]
박대통령은 말년에 가서는 골프를 자주 치지도 않았다.
대통령 행차 때문에 교통이 통제되고 수십명의 직원들이 후일에 동원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배드민턴으로 바꾸었다.
[청와대 집무실의 에어컨 가동을 중단시키다]
1979년에 제2차 석유파동이 밀어닥치자 박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의 에어컨 가동을 중단시켰다.
그 더운 한 여름에도 창을 열어두고 부채와 선풍기로 견뎠다.
겨울의 청와대는 대통령의 지시로 난방기 가동이 제한되어 늘 한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그린벨트 등 박정희 대통령의 고집에 의한 작품]
박대통령의 머리에는 자나깨나 국정에 관한 구상이 들어 있었다.
경부 고속도로 건설, 포항종합제철 건설, 그린밸트 설치, 제주도 개발,
경주개발 등은 순전히 박대통령의 개인적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
업적이었다.
우리는 지금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 건설에 목숨을 걸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정치인(대표적인 인물: 김대중, 김영삼 등 지금 정치인들 상당수)들의 과오에는 관대하고 박대통령의 치적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한 그런
분위기에 살고 있다.
[죽을 때 발견된 양변기의 벽돌 한 장]
오일 쇼크 한파가 한국을 기습한 74년초, 중앙청 무역진흥 확대회의에
들어서던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장예준 상공장관에게 속삭였다.
"이봐, 온나라가 에너지 절약에 한창인데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봤어.
지금까지는 수돗물을 틀어놓고 세수했는데 이젠 물을 받아놓고 해야겠더군. 그리고 말야, 양변기 있잖아. 그 물통 안에 벽돌을 한장 넣어두면 그만큼 물이 절약되지 않을까. 그 두가지를 요즘 실천중이야.
" 유명한 "박정희의 양변기 벽돌" 은 그렇게 시작됐다. 벽돌은 79년 10월26일 그가 서거한 후 화장실에서 발견됐다.
[다시 등장한 야전 점퍼]
중동전쟁으로 오일 쇼크가 터진지 한 달 후인 73년 11월 8일 정부는 국민.기업.정부가 참여하는 대대적인 에너지 10% 절감운동을 발표했다.
朴대통령과 청와대가 운동에 앞장섰다.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 (金正濂) 씨의 기억이다.
"朴대통령이 근무하고 기거한 청와대 구본관 (현정부가 헐었음)은 난방
온도를 낮추고 전등불을 줄여 춥고 컴컴했습니다.
朴대통령은 집무실에서 5.16혁명 때 입었던 그런 야전 점퍼를 입고 일했습니다. 朴대통령은 집무실의 샹들리에 (천장 전등) 도 끄고 스탠드 하나만 켜고 서류를 봤습니다."
대통령이 먼저 절약을 실천하니 장관과 공무원들도 자연히 따랐다고 한다. 실장방엔 인왕산쪽으로 창문이 나있어 그는 스탠드조차 켜지 않았다.
장예준장관은 "정부청사도 전등을 형광등으로 바꿨고 그나마 줄여서 켰다. 나도 겨울 내복을 꼭 껴입고 다녔다" 고 회고했다.
[대통령의 전속 이발사가 중앙일보 기자에게 말한 증언]
"박 대통령, 그 양반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런닝셔츠를 입었는데 낡아 목 부분이 해져있고 좀이 슨 것처럼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있었어요.
허리띠는 또 몇십년을 사용했는지 두세 겹 가죽이 떨어져 따로 놀고 있고 구멍은 늘어나 연필 자루가 드나들 정도였다니까요.
자기 욕심은 그렇게 없던 양반이......"
[파리채를 든 에피소드]
김정렴(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말 -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여름에 대통령 집무실에서 늘 파리채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은 집무실의 에어콘을 전기 아끼느라고 틀지 않고 늘 유리창문을 열어놓기 때문에 밖에서 파리들이 날아 들어와서 늘 파리채로 잡거나 쫓아야 했던 것이다.
세상에 어느 최고 통치권자가 그 집무실에서 파리채로 파리를 쫓으면서 집무를 하였을까.
[박대통령 서거 당시 현장에 있었던 군의관 정규형의 증언]
박 대통령이 서거 당시 서울육군통합병원의 당직 군의관이었던 정규형 대위는 자신이 10.26 당일 담당한 응급 환자가 대통령이었던 사실을 몰랐던 이유에 대해 합수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이 차고 있던 시계는 평범한 제품이었고, 넥타이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어져있어 대통령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후속정권들이 박정희에 대한 부정부패 들추기 불구 보이지 않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최고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재임기간 내내
국민들에게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서거 이후에 국민들 속에 남아 있는 그의 향수를 지우기 위해 후속
정권들이 집요한 노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재임기간 중 본인의 부정축재나 권력남용형 비리 사실이 들리지 않는다,
택시 운전수들이 역대 대통령은 욕해도 박정희는 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축농증 수술 - 시간 걸린다고 마취하지 않고 해]
66년도 쯤인가 박대통령은 평소 측농증증세가 있었다.
어느 날 낮에 시간을 내어 서울대학병원으로 차를 타고 가서 수술을 했다. 수술하기 전 박대통령은 의사에게 몇 시간이나 걸리겠냐고 물었더니
의사말이 수술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으나 마취깨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대답하자 박대통령은 "그러면 마취하지말고 그냥 하시요,
그렇게 한가하게 보낼 시간이 어딨나" 놀랜 의사가 그건 통증이 너무
심해서 안 된다고 하자
박대통령은 고집대로 마취하지 말고 바로 수술에 들어가자고 우겨서
기어이 마취없이 그대로 했다.
[혜화동의 막걸리 할매집]
70년대 중반쯤에 혜화동 로타리 근처의 막걸리집은 박대통령이 애용하는
단골집이었다.
죽마고우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나 고심이 있으면 조용히 여기를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에 막걸리집 주인은 박대통령인줄 몰랐는데 박대통령이 혼자 들어와서 막걸리 한사발을 시켜서 김치를 안주삼아 마셨다.
조금있다 막걸리주인이 부스럭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박대통령이
막걸리독에서 직접 또 한잔을 퍼고 있더란다.
다 먹고나서 얼마냐고 묻고는 호주머리에서 동전을 꺼내어 계산하고
나간 뒤에야 알게 되었다는 것
[영국 런던의 도시계획 직접 시찰 권유에 돈도 없는데]
이동원비서실장이 박대통령의 서독방문시 오는 길에 바로 옆에 있는 영국의 런던에 가서 도시계획을 직접 한번 보시는게 좋겠다고 하니까
박대통령이 버럭 화를 내면서 "돈도 없는데 관광이나 다니게 됐어?" 했다.(이동원 회고록에서)
[교사 시절 때의 에피소드]
대통령이 문경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어느 날 학교근처에서 여학생이
물에 빠져서 야단이 난 적이 있었다.
교사들이 우왕좌왕 하면서 소리만 지르고 있을 때 어깨에 트럼펫을 맨 어느 선생님이 트럼펫을 맨채로 물에 뛰어들어 그 여학생을 구했다 한다,
그 선생님이 박정희선생님 이었다고 당시의 학생이 증언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99년 KBS프로에서)
대구사범 학교시절의 학생 기록부에 "일본인 교사에게 반항 적이며 불손하다."고 적혀있다 "(99년 KBS 제작프로에서)
당시 동급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항시 나폴레옹 사진을 가지고 다녔으며
프루타크 영웅전을 손에 들고있던 걸 기억한다고 증언
[문세광 사건 때]
문세광이 쏜 총알이 연설대 모서리를 맞고 튕겨 나가자 그때서야 위급함을 알아차린 박대령통은 얼른 자세를 낮춰서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상황이 종료되자 박대통령은 아까 읽던 문장의 단어까지 정확하게 찾아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침착하게 연설문을 읽어나갔다.
연설문을 읽고난 뒤에 무대위를 훑어보고는 육여사의 신발을 발견하곤
주워서 손에 든 채로 걸어나갔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다 총맞을 뻔 해]
자유당시절 장군들 끼리의 회식 자리에서 박통이 이승만을 비난하자 다른 장군이 흥분해서 권총을 꺼내어 "이 새끼. 금방한 말 취소해, 안 하면 죽이겠어!"하고 소리지르며 머리에 권총을 갖다대자
모두 놀라서 숨죽이고 봤다.
박대통령은 눈도 깜짝 안 하고 앞에 있던 빈 술잔에 술을 따라서 붓고는
태연하게 마셨다.
권총을 겨누고 있던 그 장군은 한참 있다 스스로 권총을 내렸다.
[가수 심수봉의 증언]
김재규의 총을 가슴에 맞고도 꼿꼿한 자세로 그대로 있어서 옆에 있던
심수봉은 총알이 빗나간 줄 알았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앞으로 쓰러지자 놀란 심수봉이 "각하! 괜찮으십니까?"
하고 묻자 "응, 나는 괜찮아."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후 유족들의 차 대접에서]
박정희대통령이 돌아가시고 얼마뒤 朴대통령의 일본 지인들이 서울 신당동으로 유족들을 위로방문한 자리에서 차대접을 받는데 이 사람들이 가만보니 찻잔하고 잔받침하고 하나도 짝이 맞는게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에 이 일본인들은
"아! 박정희는 죽어서도 교훈을 주는 사람" 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하더라는것입니다.
18년간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집에 제대로된 다기세트 하나가 없으니
놀랄수밖에요.
[유가파동시 부채사용으로 무더위를 견디다]
"여름 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맥도날드 더글라스사의 중역)는 대통령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대통령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진 서류더미 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더 커보이는 책상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 라지만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 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리에 걸린 양복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런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사에서 오신 데이빗 심프슨씨입니다.
" 비서가 나를 소개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게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바람 하나면 바랄 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 놀음이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동안 에어컨을 트는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의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 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 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M-16 자동소총 과 박정희]
한국군 육군 맹호부대의 파병으로 월남전의 열기가 한참 뜨겁게 타오르고 있을 때였다.
월남전 참전 당시에 전세계가 한국을 비난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였지만 그들은 그런 한국을 보고 비난만 해대었을 뿐이었지,
누구도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쌀한톨, 기름 한방울 원조해주지
않았다.
그런 우리에게 그나마 조금의 원조라도 해준 나라가 지금 일부 사람들의
데모의 대상이 되는 미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과거 남로당의 행적이 미국 수뇌부의 의심을 받아, 미정부에서는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복조치로 당시 대한민국 1년 예산의 80%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우리는, 당장 미국이 제공해주는 원조를 중단
당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전 국민이 그야말로 아사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음을 느껴야만 했었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서 한국과 미국이 다시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박정희대통령의 월남전 참전결의였다.
당시 우리에게는 주어진 선택의 길이라는 것이 없었다.
월남전에 참전해서 미국이 원조를 재개해준다면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임을 옳게 알아야만 할 것이다.
반드시 생각해두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가난한 대한민국, 굶어죽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쌀한톨, 기름 한방울 제공해주지 않았음을..
그러면서 그들은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대하여 내정간섭을 시도할려고 했다는 것을. 나라가 가난하면 전세계가 그 국가를 자신의 노예로 인식하려
한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는 그 당시의 미국의 유명한 군사무기 제조업체인 맥도널드
더글라스사(한국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의 발사때 많은 기술자문과 발사를 도와주었음-돈주고 샀다고 표현하는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됨.)의
중역인사가 한국을 방문해서 박정희대통령과 나누었던 실화를 공개하는
것이다.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 이었고,
한국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버리는 대가로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이전을 받게 된다.
그 지원중의 하나가 M-16 자동소총 이었다.
이전의 한국에서 사용하던 무기는 단발식 카빈 소총으로서 M-16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는 그야말로 장난감과 같은 수준의 무기였었고
우리는 그런 무기를 들고 남북대치상황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였고 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사였다.
미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 사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업무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정희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 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오?"
"네. 물론입니다. 각하." "대신 조건이 있소. 들어주겠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돈이오. 내 돈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100만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때 나는 방금전과는 사뭇다른 그의 웃음을 보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그렇게 그에게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임을 느꼈다.
배웅하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다시 한번 둘러본 나의 눈에는
다시 양복 저고리를 벗으며, 조용히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너무나
크게 보이는 참다운 한나라의 대통령으로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
최근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눈물’이라는 글이 인터넷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성세대의 땀과 노력,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의 일화를 담은 이 글에 20, 30대 네티즌들은 ‘우리 세대의 가벼움을 반성하게 됐다.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났다’며 공감을 표명하고 있다.
이 글은 육군사관학교의 김충배 교장이 지난해 11월 생도 교육에 사용해
그동안 ‘육사교장의 편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 작성자는 예비역 장성인 김유복(金遺腹·79)씨. 그가 지난해
6월 로터리 코리아(한국로터리의 기관지)에 기고한 글은 “60대를 수구
골통이라 몰아붙이는 젊은이 들이여! 이 글을 읽어 보렴”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 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5,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 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명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우리나라의 GATT 가입 과정에서의 에피소드]
대통령과 당시 정부의 외무 재무 관료들이 수출국가로서 발돋움을 하기
위해 GATT 가입을 추진했는데, 이 GATT 가입 준비만 4년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 GATT가입이란게 그냥 신청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입신청을 한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무역을 할 만한 나라인지, 무엇을
생산하는 나라인지에 대해 GATT 본부에서 심사를 하고, 기존 회원국들의
대표들이 투표를 해서 결정하게 됩니다.
GATT 기존 회원국들의 투표로서 가입이 결정하는데 회원국의 대표들중
2/3가 찬성해야 가입허가가 됩니다.
한국이 GATT 가입을 하기 위해, 태스크 포스팀이 만들어 졌고, 치밀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1966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GATT 총회에서 가입신청을 하기 위해 이
팀이 출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GATT 가입을 하기 위해서는, GATT 위원들과 많은 협상을 해야
했었고, 기존 GATT 회원국의 대표들에게 한표 부탁한다는 로비도 해야
될 필요가 있었겠죠.
그런데, 그 당시 대한민국이 무슨 돈이 있었겠습니까?
가트가입을 위한 태스크 포스팀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5개월 동안 체류하는 동안 여관에서 머무르고 여관방에서 직접 밥을 해 먹으면서 많은 고생을
햇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 분들이 GATT 위원들과 기존 가입국가 대표들에게 식사라도 대접할 수 있도록 본국에서 돈을 좀 보내달라고 요청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의 재정은 너무나 가난했지요.
부총리에게 이 보고를 받은 박대통령이 하신 말씀이 "부총리..
내 월급을 가불해서 보내시오..."
[박정희에 대한 김구 등 여러 사람들의 기록]
박정희는 문경에서 국민학교 교사를 지낼 당시 일본인 교장과 대판 싸우고 �겨 나다시피 교사직을 중도에 접는다.
학생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비밀리에 수시로 가르치다가 발각이 되어 꾸중을 받기도하고 의자까지 내던질 정도로 싸움이 빈번했다고 한다.
후일에 군인이되어 중국땅 열하 지방에서 일년여 기간 동안 중국인 부대장 아래서 중위로 군 생활을 하지만 거기서도 조선인 출신 군을 몰래 독립군으로 빼내게된다.
그곳에는 독립군이 주둔해 있지도 않은 지역이어서 박정희가 독립군을 잡아갔다고 비난하는것은 순전히 억지같은 소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은 상해임정 요원이었던 조경환이 한말이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확인이 된다.
박정희는 김구로부터도 검증과 세밀한 테스트까지 받았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독립군 지대장 출신의 김학규장군은 박정희를 생명의 은인으로 표현할 정도로 해방전이나 후에도 사이가 아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임정요인인 조경환은 심지어 박정희의 경우를 들어 친일도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끈질긴 주장을 펴기도 했다.
박정희를 친일로 모는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임을 여러 실증들이 이를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그는 투철한 민족주의자였음이 명명백백 드러나고 있다.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해서 친일이 될수 없다.
당시에 국민학교만 다니면 모두 일본이름이 주어졌다. 김대중대통령도 도요다 다이쥬 일본식 이름이 있다. 우리나라 많은 창군 멤버들도 일본군에서 군 경력이 다분히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만주군관학교에 있었던 일화]
만주군관학교의 생활은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민족적 차별이 학교 분위기를 좌우했다.
예를 들어, 공식적인 식사에서도 일본인 생도들에게는 쌀밥, 중국과 조선인 생도들에게는 수수밥을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인 생도들은 일본인
생도와 중국인 생도들에 비해 수적으로 월등하게 적은 소수파로서 민족적 차별을 절감해야 했다.
만주군에서 공식적으로 한국인은 중국인보다 우대를 받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을 일본의 앞잡이 쯤으로 치부하곤 했다.
한국인 생도들은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서로 만나고 선후배간에 군기를
잡는다고 심한 구타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유없이 때리는 선배들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매를 다 맞고 그들과 더욱 친하게 지냈다. 반면 동기생들과의 관계는 선배들과의 관계에 비하면 소원한 편이었고,
이한림은 박정희와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 시절에도 문경 교사 시절처럼 민족주의적 경향을 나타냈다.
그는 1기생 이기건에게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 라고 되풀이하여 말하곤 했다.
한국인들끼리 술자리 모임에서 어느 날은 벌떡 일어나 "선배님들, 이런
노래 모르시지요." 라며 주먹질을 하면서 독립군 노래를 불렀다. 이한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가끔 둘이 만나면 조국의 비통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같이 울기도 하고 결심을 밝히기도 하였다.
우리 사이는 혈우라고 할 만했다. 특히 나에게 감명을 준 것은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그 불굴의 정신이었다" 고 말했다.
만주군관학교시절 선배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박정희에게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
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섭준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히 2.26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 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독립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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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