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길, 낯섦의 수용(요한 15:9-17)
이쁜이 에스더 신부 / 원주교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도행전 속에 교회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그 문을 엽니다. 나서지 못하던 제자들은 부활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사도의 길을 나섭니다.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곳곳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도움과 복음에 대한 전파는 눈에 보일만큼 늘어났습니다. 교회는 본격적으로 곳곳에 시작되었으며 믿는 이들은 구원받기 위해 간절한 욕망을 가지며 신도들의 공동체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교회의 첫 시작은 낯섦에 대한 수용과 그것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이미 제자들은 사랑하는 예수님이 유대교의 교리와 다르게 가르치는 것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낯섦에 대해 특별히 사유했을 것입니다. 스스로도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에 배척을 받으면서 낯섦에 대한 경계와 혐오가 얼마나 위험한지 돌아봤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방인은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고 차별의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이라고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성령께서도 그곳에 임재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만이 구원의 대상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 이미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10장의 뒷부분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은 그래서 특별히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까지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울려 퍼질 때 성령이 모든 청중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다인으로서 신자가 된 이들과 이방인들 모두 차별없이 성령이 내려오십니다. 이제 이방인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를 요청받았고 베드로의 말씀 선포에 귀를 기울입니다. “낯섦”은 우리를
언제나 기도하게 합니다. 다른 이를 마주한다는 것은 엄청난 두려움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낯섦”에 대한 수용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부활 절기에 우리에게 가슴 깊이 요청되는 사명인 것입니다. 복음 말씀 속에 간절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새겨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나와 다른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계명으로 새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마주하는 이가 언제든지 나를 찌를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던 고대의 시대에 칼을 내려놓는 제스처라든가 먼저 엎드려 인사를 하는 까닭은 무장해제 시켜야 서로의 친교와 교류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다름을 수용하는 기술은 한 사람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하는 삶의 패턴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서로’는 창세기 때부터 창조의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짝궁을 만들어 창조하시면서 서로 어울리게 하는 에덴동산의 풍경 속에서 창조의 7일의 과정은 더욱 진리에 가까워집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방인에 대한 수용이 교회에 얼마나 중요한 사명이었는지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내려진 사명은 이웃한 이들에게 문을 열어서 교회의 자원을 나누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하는 선교에 나서라는 것입니다. 부활 절기에 가슴 깊이 그 말씀을 새겨보며 이웃하고 있는 이들, 차별과 억압받고 있는 이주민과 연약한 이들을 돌아볼 것을 요청 드립니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며 절기로는 입하(立夏) 입니다. 온 마음으로 어린이를 평화롭게 돌보고 또한 여름의 맛, 단 열매 맺는 기도의 열매를 맺어 가시는 한 주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