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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꿈꾸는 다락방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꿈다모
오늘~ 7/01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모나코, 55년 만의 왕실 결혼식 개막
인구 3만5천명의 소국 모나코를 통치하는 알베르 2세 대공(大公)의 결혼식이 1일(현지시간) 막을 올렸다.
올해 53세인 알베르 2세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약혼녀 샤를렌 위트스톡(33)와 1일과 2일 이틀동안 결혼식을 거행한다고 르 몽드 신문 등 프랑스 언론과 외신들이 전했다.
1일에는 민간 예식이 치러지며 2일에는 왕궁 야외에서 정식 결혼식이 열린다.
1956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그의 부친 레니에 3세 대공과 할리우드 대스타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식 이후 가장 크게 치러지는 이번 행사는 신부의 도망 시도설이 보도되면서 김이 빠지긴 했지만, 모나코는 이를 계기로 관광산업이 활성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조세피난처'인 모나코는 55년만의 이 '로열 웨딩'에 당초 예상의 2배인 800만유로를 들였으며, 지난달 30일 1만5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의 록그룹 이글스의 공연을 시작으로 전야제를 시작했다.
남아공 수영선수 출신의 금발인 위트스톡은 2000년 모나코 수영대회에 참가했다가 알베르 2세를 만나 사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트스톡이 알베르 2세의 복잡한 사생활에 대한 새로운 '비밀'을 전해듣고 좌절감에 빠져 도망하려다 공항에서 제지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는 등 벌써부터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을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조짐도 있다. 모나코 왕실은 전혀 근거없는 오보라고 일축하며 법적 대응 불사 방침을 천명했다.
알베르 2세는 미국 출신 부동산 중개인 및 항공사 전직 여승무원 등과의 혼외정사로 각각 9살 된 딸과 6살 된 아들을 두고 있다.
이번 결혼식에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70-80년대 007시리즈로 유명한 명배우 로저 무어경,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 루이뷔통 최고경영자 베르나르 아르노, 유럽-중동-아프리카의 왕족들을 포함한 하객 3천500여명이 초대됐고, 모나코 전 국민도 초청장을 받았다.
(파리=연합뉴스) 김홍태 특파원
- TV가이드, 서태지 (공중전화카드)
2009 - 서태지, 8집 활동 정리한 정규음반 발매
서태지(37)의 8집 정규 음반 '서태지 8th 아토모스(Atomos)'가 내달 1일 발매된다고 서태지컴퍼니가 30일 밝혔다.
이번 음반은 지난해 7월 8집의 첫 싱글, 3월 두번째 싱글에 이어 8집 활동을 총 정리한 정규 음반이다.
그간 두장의 싱글에 수록된 '모아이(Moai)', '틱탁(T'ikT'ak)', '버뮤다(트라이앵글)', '줄리엣(Juliet)' 등으로 활동한 서태지는 정규 음반에 총 12곡을 수록하며 타이틀 곡은 '아침의 눈'으로 정했다.
이 곡은 '오래되고 소중하고 아름답던 모든 것은 언젠가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이 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잔잔한 감성의 느린 곡이다.
서태지는 '아침의 눈'과 또 다른 신곡 '레플리카(Replica)'를 지난 13일 용산 전쟁기념관 평화의 광장에서 열린 전국투어 '더 뫼비우스(The Mobius)'에서 처음 공개하기도 했다.
서태지컴퍼니는 "4년 동안 만든 8집은 새로움을 추구해온 서태지의 17년 음악사의 정점을 보여준다"고 소개했다.
이은정 기자
mimi@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9-06-30 오전 10:06:45 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363107.html
2009 - 미국의 영화 배우 칼 말든(Malden, Karl) 사망
말든 [Malden, Karl, 1912.3.22~2009.7.1]
[부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명우 칼 말든 하늘로
미국의 원로배우 칼 말든이 1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AP통신이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97세.
‘워터프론트’, ‘패튼 대전차군단’ 등 50여편이 넘는 작품에서 개성있는 연기를 펼쳤던 말든은 할리우드 배우로 1950~60년대를 풍미했다. 1951년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989년부터 4년간 미 영화아카데미 회장직을 맡았으며, 20 04년에는 미국 배우조합으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말든은 연기 외에도 우표 수집가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할리우드의 전설’ 우표 시리즈 기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안석기자
ccto@seoul.co.kr /서울신문 2009-07-03 29면 http://www.kdaily.com/news/newsView.php?id=20090703029021&spage=44
2006 - 제주도가 제주특별자치도로 승격
[제주특별자치도의 역사]
1914년 4월 1일 제주군, 정의군, 대정군, 완도군 일부을 제주군으로 통폐합하였다. 1군 13면
13면 - 제주면, 구좌면, 신좌면, 신우면, 구우면, 정의면, 동중면, 서중면, 우면, 대정면, 중면, 좌면, 추자면
1915년 5월 1일 도제(島制)를 실시하여 제주군이 제주도(島)로 개편되었다. 1도 13면
1931년4월 1일 제주면이 제주읍으로 승격하였다. 1도 1읍 12면
1935년 4월 1일 면명을 개칭하였다.
1946년 8월 1일 대한민국의 행정법에 따라 도 제도가 생김에 따라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제주도가 설치되었다. 제주군은 북제주군, 남제주군으로 분면한다.
1948년 4월 3일~1954년 9월 21일 제주 4·3 항쟁이 있었다. 이 영향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55년 9월 1일 북제주군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한다.
1968년 제주국제공항이 착공되다.
1981년 7월 1일 남제주군 서귀읍, 중문면이 서귀포시로 승격한다.
2006년 7월 1일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는 특별자치도로 출범됨과 동시에 제주시와 북제주군이 제주시로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이 서귀포시로 각각 행정시로 통합되었다.
/위키백과
2004 -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 첫 재판
2004년 오늘,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이라크 특별재판소 법정에 출두해 재판을 받았다.
후세인은 2003년 12월 13일 미군에 체포된 이후 6개월여 만에 공개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란-이라크전쟁과 쿠웨이트 침공, 걸프전쟁 후 시아파 반란 진압과정에서 저지른 대량 학살, 북부 쿠르드족에 대한 화학무기 사용 등 반(反)인륜 범죄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후세인은 법률 서류 서명을 거부하고 쿠웨이트 침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등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는 질문에 '나는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다' 라고 말했다.
후세인은 또 '재판은 모두 연극이다. 진짜 범죄자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다' 라고 말했다.
이날 재판을 계기로 후세인의 신분은 전쟁포로에서 피의자로 바뀌었다. /YTN
- Jean Peters and Marlon Brando
2004 - 미국의 영화 배우 말런 브랜도(Brando, Marlon) 사망
브랜도 [Brando (Jr.), Marlon, 1924.4.3~2004.7.1]
영화 ‘대부’ 명연기 말론 브랜도 타계
영화 ‘대부’ 에서 마피아 돈 콜레오네 역으로 유명한 미국배우 말론 브랜도가 2004년 7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
이날 세상을 뜬 말론 브랜도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명배우의 한 명이었지만, 타고난 반항아 기질 때문에 미국 영화계에서 이단아로 취급됐다.
1924년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난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가 퇴학당한 뒤 뉴욕으로 가 19세 때인 1943년 연극 배우로 데뷔했고, 4년 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을 맡아 돌풍을 일으켰다. 은막에는 1950년 ‘더 맨’의 하반신 불수가 된 군인 역할로 데뷔했다. 그는 당시 실감나는 연기를 하려고 퇴역 군인의 병실에서 한 달 가까이 보내기도 했다. 1952년 ‘혁명아 사파타’로 칸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1954년 ‘워터프론트’의 부두노동자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72년 ‘대부’에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연기를 보여 두 번째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나, 미국원주민 정책에 항의하며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와일드 원’, ‘지옥의 묵시록’,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등 수많은 영화에서 강렬한 연기로 영화팬을 사로잡았다. /조선
- 청계천(광교 부근 복원 조감도) (공중전화 카드)
2003 -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 청계 고가 철거 시작
2003년 7월 1일, 1976년 완공돼 서울 근대화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던 청계고가도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로써 2년 3개월의 대역사(大役事)가 시작되었다.
하늘에는 ‘경축 청계천 복원공사’라는 애드벌룬이 떴고, 청계고가도로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는 시민들이 오후부터 몰려들었다.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시민들도 많았다. 기공식 행사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은 “회색빛 콘크리트가 상징하는 반생명의 그늘을 과감히 걷어내고 서울을 살아 숨쉬는 도시로, 보다 안락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쾌적한 삶의 쉼터로 만들자”고 말했다.
서울시는 태평로에서 신답철교 간 5.8km 구간을 3개 공구로 나눠 오는 2005년 9월까지 청계고가와 삼일고가, 청계천 복개도로 구조물을 철거하고 청계천을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한편, 청계고가도로가 폐쇄된 첫날인 이날 서울시내 주요도로는 당초 예상을 깨고 일부 병목구간을 제외하고는 큰 혼잡은 없었다. 그러나 출근시간대에는 서울 강동지역과 동·북부 지역 차량들이 몰리는 도로에서 극심한 정체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시민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했기 때문인지 시내 대부분의 도로가 평소와 비슷한 교통흐름을 보였다. /조선
- 우정사업본부 출범 기념 (2000.7.1. 발행)
- 우정사업본부 출범1주년 기념 (2001.6.30. 발행)
2000 - 우정사업본부 출범
우정사업본부(郵政事業本部)는 대한민국 지식경제부의 직할기관으로, 핵심 업무인 우편물의 접수·운송·배달과 같은 우정 사업을 비롯하여 우체국예금·우체국보험 등 금융 관련 사업에 관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일을 담당한다.
우정사업본부의 출범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국영 체제하에서 공공성 위주로 계획된 우정 및 금융 사업은 우편물량 증가의 둔화, 금융시장 개방에 다른 금융기관의 대형화, 금융 및 물류 산업의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되었다. 이에 따라 기간산업인 우정 및 금융사업을 국가경영체제로 유지하면서, 대·내외적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취지에서 우정사업본부의 설치가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2000년 7월 1일 우정사업본부가 출범하였다. 우정사업본부가 출범함에 따라 정보통신부 본부에서 관할하던 우정사업 기능을 우정사업본부로 이관하였으며, 소속기관으로 체신청·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정보통신부지식정보센터 및 정보통신부조달사무소를 두고, 계약직·임기제·성과급 연봉제를 적용하는 본부장을 공개채용을 통해 선발토록 하였다. 이를 통해 선발된 본부장은 장관과 경영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 내용에 따라 경영의 독립성 및 자율성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사업을 운영하며, 경영결과에 대해 책임을 진다.
연혁 /위키백과
- Øresund Bridge, Denmark-Sweden
2000 - 덴마크-스웨덴을 연결하는 16km 외레순 다리 개통
덴마크-스웨덴 연결,‘외레순橋’ 16㎞ 개통
빙하시대이후 2개로 나눠졌던 덴마크와 스웨덴을 하나로 잇는 외레순교(橋)가 1일(현지 시간) 개통됐다.
스웨덴 남부 도시인 말뫼와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잇는 외레순교는 터널과 교량의 길이를 합쳐 16㎞로,통과 시간은 약 20분이 소요되며 자동차와 열차가 동시에 다닐 수 있도록 2층으로 설계돼 있다.
개통식에는 스웨덴 국왕과 덴마크 여왕 내외를 포함한 6000여명의 양국 국민이 참가했다.
[브뤼셀=연합] /문화일보 2000-07-03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007039000301
1997 - 홍콩의 중국 귀속
[어제의 오늘]1997년 홍콩의 중국 귀속
ㆍ‘일국양제’ 50년 실험, 우려속 출발
1일은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되돌아간 지 12년 되는 날이다. 1997년 7월1일 홍콩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주권환수식에서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아편전쟁으로 빼앗긴 홍콩의 주권을 근 100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며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새 천년을 3년 앞둔 홍콩에서는 기념식 며칠 전부터 밤마다 성대한 불꽃놀이와 축제가 열려 21세기의 용으로 떠오르는 중국을 자축했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아시아의 금융·무역 중심지였던 홍콩이 공산주의 중국 하에 들어가 어떤 변모를 겪을지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었다
12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전례없는 ‘일국양제(一國兩制)’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권 환수 12년을 맞아 홍콩의 국민교육센터는 최근 의미있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문회보의 29일 보도에 따르면 홍콩 초·중·고생들 중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홍콩인’이라 생각하는 학생들 비율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응답자의 96.0%는 “나는 중국인이라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중복 응답이 허용된 이 조사에서 “나는 홍콩인”이라고 말한 학생은 94.2%로 중국인 응답보다 떨어졌다.
물론 ‘통합’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만은 없다. 홍콩중문대학 아·태연구소가 성인층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스스로를 중국인이라 여기는 응답자 수는 38.2%로 여전히 낮았다. “나는 홍콩인”이라는 답변은 몇년 새 크게 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49.3%에 이르렀다. 성인 10명 중 4명은 지금도 중국에 귀속 의식을 못 느낀다는 얘기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톈안먼 기념일의 풍경이었다. 베이징 등 중국 본토에서는 당국의 탄압으로 아무런 집회·시위도 없었지만, 톈안먼 사태 20주년을 맞은 지난달 4일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는 무려 15만명의 시민들이 모여 촛불을 들고 당시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홍콩 주민들이 중국 본토의 민주화운동을 누구보다 앞장서 기념하고 나선 것이다. 중국은 홍콩을 되돌려받을 때 향후 50년 동안 홍콩의 체제를 보장하는 내용의 기본법을 제정했다. 홍콩 주민들이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누릴 시한은 38년 남은 셈이다. 홍콩의 민주주의가 그 뒤에도 지속될지, 이 기간 중국에도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을지는 알 수 없다. 일국양제 실험이 진정한 성공이었는지는 38년 뒤 베이징과 홍콩 사람들이 어떤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는지에 따라 결정될 것 같다.
구정은기자
ttalgi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6-30 17:58:5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6301758555&code=100100&s_code=ap005
1997 - 미국의 영화배우 로버트 미첨(Mitchum, Robert) 사망
미첨 [Mitchum, Robert Charles Duran, 1917.8.6~1997.7.1]
미국 영화배우 로버트 미첨 사망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미국 영화배우 로버트 미첨이 1997년 7월 1일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9세였다.
1950∼60년대의 대표적 미국배우 중 하나로 1백80cm의 키에 다부진 체격, 무뚝뚝한 이미지로 `남성적`이라는 평을 받았던 미첨은 `돌아오지 않는 강` 외에도 `라이언의 딸` `십자포화` `엘도라도` `케이프 피어`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1945년 `GI 조 이야기`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로 딱 한번 올랐을 뿐, 끝내 아카데미상은 수상하지 못했다.
미첨은 1917년 8월 미국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에서 출생, 2살 때 열차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영국군 소령이었던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4살 때 가출, 폭력조직 가담혐의로 6개월 간 복역하기도 했으며 1937년 캘리포니아에서 아마추어 연극배우로 처음 무대에 서기전까지 광부, 선원, 권투선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는 1942년 `레더 버너즈`로 영화에 입문해, 1945년 `GI 조 이야기`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미첨의 트레이드 마크인 졸리는 듯한 눈은 만성적인 불면증과 무명 권투선수 시절 입은 상처로 눈이 나빴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 '98 여성주간 기념 (1998.7.1. 발행)
1996 - 제1회 여성주간 기념 (1~7일)
매년 7월 1일 부터 7일까지는 여성주간으로 1995년 여성의 사회참여확대를 위해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되면서 법 제정을 기념하는 의미로 시작되어 올해로 12회를 맞이하였다.
여성발전기본법은 당시 추진 과정에선 충분한 논의 없이 제정되어 명칭과 내용에 있어 여러 논란을 가져왔지만, 우리나라 법률사상 처음으로 성희롱 용어를 사용하였고, 국가와 지자체 또는 사업주가 성희롱 예방 등 직장 내 평등한 근무환경 조성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규정을 만들어 냈다. 또한 가정폭력 예방을 국가 및 지자체의 책임으로 명시하는 등 사회 전반에 만연된 전근대적인 여성차별의식과 관행을 없애는데 기여 한다는 취지를 부여하면서 지금까지 정부와 민간영역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실시하게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
노현정(전북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 /새전북신문 2007-07-17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38760
- 1993.7.1.발행
1990 - 우리나라 '물의 날' 제정
우리나라의 『물의 날』은 한국수자원공사가 1990년부터 물 수요가 가장 많고, 물로 인한 재해가 발생하기 쉬운 시기인 7월 1일을『물의 날』로 제정하여 다양한 물행사를 개최한 것이 최초
1995년부터 3월 22일로 『물의 날』을 변경하여 행사 개최
/사단법인 한국수자원학회
http://www.kwra.or.kr/data/data5_3.html
1989 -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평양에서 개막 (1~8일)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1989년 7월 1일 개막됐다. '반제연대성및 평화와 친선'이라는 구호아래 평양에서 개최된 이 행사에는 전대협 대표 임수경을 비롯,179개국 2만여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남한의 88서울올림픽 개최에 대응, 북한이 유치한 평양축전은 1947년 2월 체코의 프라하에서 첫 대회가 열린 후 동양에서는 최초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행사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5만명의 군중을 수용한 '5월 1일 경기장'의 개막식에 이어 2일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평양축전행사는 정치,문화예술,체육행사 등으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이 가운데 정치행사 프로그램이 83%, 문화행사가 17%정도를 차지했다. /조선
- 체신예금 보험시행 1주년 기념 1983.7.2 발행
1983 - 체신보험 실시
"체신부에서는 1983년 7월 1일을 기하여 생명보험 사업인 체신보험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새로 시작되는 체신보험은 국영보험으로서 수익성을 전제로 하지 않고 가입자의 복지 증진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도록 설계되었다.
체신보험은 보험금 가입 한도액을 1,000만원까지의 소액으로 한정하여 영세시민, 농어민 등 저소득층을 주 대상으로 하였고, 보험가입 절차를 간편하게 함으로써 가입자가 받는 혜택의 범위를 확대하였다. 또한 보험적립금에 대한 운용 수익을 높여 수익자에게 높은 배당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체신보험에는 보험사고 발생시에 대형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정기보험과 특별조장보험, 자녀들의 학자금 마련을 위한 교육보험, 노후의 안정 또는 생활자금 마련을 위한 복지보험과 양로보험등 5종이 있다.
체신부에서는 체신보험 실시를 기념하고, 이 제도가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며, 새로운 보험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여 사회복지증진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해 주기를 바라면서 이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83 - 미국의 공학기사, 건축가 풀러(Fuller, R. Buckminster) 사망
풀러 [Fuller, R(ichard) Buckminster, 1895.7.12~1983.7.1]
미국의 건축가.
매사추세츠주(州) 밀튼 출생. 하버드대학교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해군에 들어가 선박·항공기에 흥미를 가졌고, 이러한 각도에서 공업생산을 예측한 메카닉한 주택을 설계하였다. 1929년부터 그와 같은 작업에 다이맥시온(dynamic―動的이고, maximum efficiency―최대한의 능률을 지닌다)이라는 조어를 붙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풀러를 상징하며, 그 이름을 세계적으로 만든 것은 지오데식 돔이 완성되고부터이다. 이것은 최대 용적을 최소 피복면적으로 덮어씌우는 구면내접다면체(球面內接多面體)를 구조체로서 조립한다는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으로 작게는 주택으로부터 크게는 관측소·공장·전시장·레저 시설 등에 널리 이용되었다. 이러한 건축의 정점이라고도 할 만한 몬트리올만국박람회의 미국관은 압도적인 인상을 주었다. 또한 거대한 돔으로 도시 자체를 덮어씌워 내부에 인공환경을 정비하는 미래도시의 모습도 제시하여, 현대 공업사회에 입각한 장래의 초건축의 모습을 제시하였다. /naver
1974 -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페론(Peron, Juan) 사망
페론 [Peron, Juan Domingo, 1895.10.8~1974.7.1]
아르헨티나의 정치가 ·대통령(재임 1946∼1955, 1973∼1974).
이탈리아계(系) 이민자의 아들로 부에노스아이레스주(州) 남부에서 태어났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일리고이엔 타도의 군부쿠데타에 참가하였고, 1943년의 쿠데타에서는 통일장교단(GOU)의 리더로 쿠데타를 주도하고 정계에 진출하였다. 1944년 파레르 군사정권하에서 부통령으로 재임하였고, 육군장관 겸 노동장관이 되어 노동조건의 개선과 임금인상으로 노동자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으로부터 사임을 강요당하고 체포되었으나, 오히려 노동대중의 지지를 얻어, 1946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언론 ·보도의 자유를 탄압하고, 외국자본의 배제와 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하였으며, 1949년 헌법을 개정하고 1951년 재선되어 독재정치를 행하였다. 1952년 부인 에바의 사후에 급격히 단행하였던 모든 개혁의 파탄이 차차 표면화되고, 1955년 교회억압을 계기로 하여 가톨릭교도와 군부의 지지를 잃게 되어, 9월 군사혁명으로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망명 중에도 그의 내셔널리즘과 노동자정책 등에 대한 국민의 추억이 끈질기게 작용하여, 1973년 9월 대통령선거에 부통령후보인 이사벨 부인과 함께 기적의 부활을 이룩하였으나 1974년 7월 세상을 떠났다. /네이버
1971 - 박정희 제7대 대통령 취임
"1971년 7월 1일은 우리나라의 제7대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이다.
지난 4월 27일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선출된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영도자로서 조국과 겨레를 위해 과거의 시정 목표인 일면국방, 일면건설의 기조 위에서 자주국방, 자립경제, 자조정신을 구현하여 조국 근대화와 조국 통일을 위해 계속 추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최근에 와서 정치, 군사 및 경제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눈부신 발전을 보아 저개발 국가를 벗어나 중진국 대열에 서게 되었는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탁월한 영도력과 정열적인 애국심의 발로는 물론, 이미 성공적으로 수행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현재 수행중인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4년간 우리나라의 영도자로서 국사를 다스리게 된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며 조국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는 뜻에서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70 - 우편번호제 실시 및 우편작업 기계화 실시
우편번호제 실시기념
"우편번호란 우편물의 행선지를 숫자로 부호화한 것으로서 우편물의 배달우체국과 그 관할구역의 고유번호이다. 우편번호제(Postal Code System)는 우편물을 발송할 때 수취인의 주소와 함께 우편번호를 우편물 표면 소정위치에 기입함으로써 그 부호에 따라 우편물을 보다 능률적으로 구분, 정리하고 운송하여 그 행선지까지 신속하고 정확하게 배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1959년 10월 영국 Noriuch시에서 세계 최초로 실시하였고 그후 서독, 미국,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호주, 일본 및 중국 등이 각각 실시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캐나다, 벨기에 및 네덜란드 등 많은 국가가 추진중에 있다.
우리나라도 해마다 늘어나는 우편물에 대비하여 1966년 초부터 우편번호제의 실시준비를 추진하여 오는 7월 1일 실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우편번호는 첫째 숫자를 시(市)·도(道)별, 둘째 숫자를 대중계 우체국, 셋째 자리를 소중계 우체국, 넷째와 다섯째를 최종 배달우체국의 번호로 하고 있으며 이 중에서 시·도별 우편번호인 첫째숫자를 살펴보면 서울·경기는 1, 강원은 2, 충북·충남은 3, 전북·전남·제주는 5, 경북·경남·부산은 6으로 되어 있다.
우편번호제 실시와 더불어 우편작업 기계화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서 우편물의 규격화를 필요로 하게되는데 우리나라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편지봉투의 표준규격을 가로 9cm, 세로 20cm와 가로 16cm, 세로 11cm의 두 종류로 정하고 있으며 이 규격봉투의 적극적인 사용을 권장하고 있는 터이다.
체신부에서는 우정사상 「제2의 우편탄생」이라고 까지 불리우고 있는 우편번호제의 실시를 축하하며 이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자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편작업 기계화실시 기념
"우리나라는 제1차 및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말미암아 놀랄만한 산업경제의 발전과 문화향상,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자유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확대하고 있어 통신의 수요도 이에 따라 엄청나게 증가되었다.
1961년부터 1968년에 이르는 동안에 총 우체국수는 804개국에서 1,822개국으로 늘었고 우편물 수도 총 1억 5,704만통에서 5억 5,283만통으로 대폭 늘어났으므로 날로 늘어나는 우편물을 기계화에 의하여 신속하고도 능률적으로 처리하지 않고서는 감당해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우정사업도 이에 부응할 수 있도록 종래의 시설을 근대화하고 경영면에서도 보다 능률적이며 합리화를 이룩하려고 선진외국의 시설과 기술을 두루 연구하여 우리나라 실정에 알맞는 기계화 실시에 힘쓰고 있다.
우편물은 그 흐름의 과정에 따라 접수·정리·운송·배달의 4개분야로 대별할 수 있는데 이중에서 정리과정은 가장 복잡한 실내 작업이다. 이 정리과정은 다시 운반·분류·개낭·소인·구분·파속·투낭·기장·통계 등으로 세분되는데 구분은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각국의 동례에 따라 우편작업 기계화 계획을 제1단계로 옥내외 반송 시설, 제2단계로 자동분류 및 소인시설, 제3단계로 자동구분 시설 등 3단계로 나누어 1966년 초부터 추진하여 우선 서울중앙우체국에 제1단계 시설인 옥내외 반송시설을 완공하여 7월 1일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체신부에서는 이와같은 근대적 시설을 갖추게 되는 우편작업 기계화 실시를 온국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편발행안내) /k-stamp
1968 - 핵확산방지조약(NPT)에 62개국이 조인
핵보유국의 증가를 방지할 목적으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1968년 7월 1일 5대 강국을 비롯, 62개국이 조인했다.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핵보유국은 핵무기와 이와 관련된 것을 비핵국의 핵제조에 어떠한 원조도 할 수 없으며, 비핵국은 핵무기와 관련된 어떠한 것도 스스로 제조할 수 없고, 비핵국은 원자력 이용을 평화적 목적에 한정하고 원자력의 군사적 목적으로서의 전용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 원자력기구의 보장조치를 수락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1970년 3월 5일 국제적으로 발효됐으며 한국은 1975년 3월 19일 국회동의를 거쳐 1975년 4월 23일부터 발효됐다. 1999년 6월 현재 세계 187개국이 가입했다. /조선
1967 - 박정희 제6대 대통령 취임
"1967년 7월 1일은 우리 온 국민이 경축하는 가운데 맞이하는 제6대 대통령 취임 기념일이다.
지난 5월 3일 제6대 대통령 총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재선된 우리나라 박정희 대통령은 지난 4년간의 제5대 재임(在任) 기간중 특히 이나라 조국근대화(祖國近代化)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국민의 복리(福利) 증진과 국가 발전에 과감하고 의욕적인 모든 정책을 수립 실천하므로서 민족중흥(民族中興)과 번영의 터전을 마련하였거니와 그 중에서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공적인 완수는 세계만방에 과시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이제 다시 4년간 대한민국의 영도자(領導者)로서 이나라의 국사를 다스리게된 제6대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시발점에서 조국근대화의 정치이념을 견지(堅持)하고 국가 백년대계의 경제발전은 물론 근대적 공업국가로서의 면모 일신을 위하여 모든 면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우리 온 국민은 박대통령 영도하에 조국근대화와 자손만대의 번영을 위한 작업 대열에서 맡은바 자기 직분을 다 하여야 하겠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67 - 유럽공동체(EC) 결성
1967년 7월 1일 유럽 공동체(EC)가 설립되었다. 유럽 경제공동체(EEC),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 유럽 원자력공동체(Euratom)의 집행부가 통합해 유럽 공동체위원회와 유럽 공동체장관회의를 창설했다. EC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는 회원국들의 경제를 통합해 단일한 통화와 단일한 중앙은행으로 국경 없는 단일시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78년 환율을 평준화하는 유럽 통화제도를 검토하고, 1987년 유럽 통합법을 채택했다. 1990년부터는 환관리 폐지와 은행 및 금융기관에 대한 장벽 철폐 등 유럽 통합의 구체적인 방안들이 실현되었다. 한편 1993년 발효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따라 유럽 12개국 연합기구인 유럽 연합(EU)이 출범했다. 이 기구는 EC를 이어받아 유럽의 사회·경제적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1999년 유럽 단일화폐인 유로(Euro)가 EU를 통해 공식적으로 도입되었다. /브리태니커
1964 - 경주 석굴암 보수 공사 준공식
석굴암 보수공사 과정
8.15해방 이듬해인 1946년 11월, 석불사의 석굴은 이끼 제거를 위하여 일제가 남겨둔 흉기, 보일러를 작동하여 증기세척 작업을 시행하였다. 6.25동란이 끝난 1953년 보일러는 또 한 차례 가동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증기세척 작업은 경주박물관 직원에 의한 조심스러운 작업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1957년, 해방 후 제 3차 세척작업이었는데 이것은 경주교육청이 청부업자에게 지시하여 긴급하게 실시한 것이었다. 당시 관광차 내한한 외국인 관광객의 도착 전에 세척한다고 사용준칙인 열도의 조절, 1자 이상거리에서의 분무 등을 무시하고 쏘아댔다. 이것이 신문에 "펄펄 끓는 수증기의 세례에 다박솔로 문질러댄 석굴암"이라고 보도되자 정부는 문교부차관을 파견하여 진상규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문교부 산하 문화재 관리국에는 1958년 1월에 "석굴암 보수공사 조사심의위원회"가 결성되어 이승만 정권하에서 3차에 걸쳐 조사단을 파견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장면정권이 들어서면서 "석굴암보수공사"는 급진전되어 1960년 5월 21일 건축가 배기형씨에게 설계를 의뢰하였고 1961년 문화재위원회에서 이중돔 설치를 설계한 배기형씨 설계안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 열린 5월 24일 문화재 위원회 제1분과회의는 배기형씨 설계안을 돌연 폐기하고, 6월 7일에는 건축가 김중업씨에게 새로 설계를 위촉하게 되었다. 이 갑작스런 설계자 변경과 심의회사업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에 대해서 석굴암수리공사보고서에서는 5.16군사혁명 직후에 있어서의 하나의 풍조를 반영하는 조치였다고만 적혀 있다.
설계담당자 변경으로 보수공사가 답보상태에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장면정권 시절에 초청한 유네스코 문화재 연구소장 플랜덜라이스 박사가 1961년 7월 7일 내한하였다. 그는 21일에는 현지로 내려가 조사하면서 "석굴의 누수상태와 지하수 문제의 검토를 위해서는 석굴을 덮고 있는 봉토층의 제거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였다. 문교부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승인함으로써 7월 31일 봉토 제거작업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1963년부터 시행되는 본격적인 보수공사에 대한 예비공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석굴 보수공사가 이처럼 급진전을 보게 된데에는 또 하나의 힘, 5.16 직후 혁명정부의 단안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정권을 창출하기 위하여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을 동원하였지만, 문화재에까지 독재의 힘을 휘두른 것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 소장시절부터였다. 그는 일찍부터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다. 불국사 복원, 아산현충사 건립, 천마총 발굴, 한국미술 5천년전, 해인사 경판고 이전구상 등 문화재발굴과 보수 사업에도 일일이 의견을 내면서 지시하고 감독하였다.
석굴 보수공사는 조사, 예비공사, 본공사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공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2인의 중앙감독관을 두기로 하여 문화재 위원인 황수영 박사와 건축가 김중업씨가 임명되었다. 수리공사의 기본방침은 석굴의 습기와 이끼를 원인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①빗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이중돔을 세운다. ②지하수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석굴 밑 암반에서 나오는 샘물의 배수구를 강화한다. ③ 습한 공기의 유입을 막기 위하여 전실에 목조건축을 세운다. ④석굴 내부의 환기를 위하여 지하에 공기통로를 만들어 이중돔 공간으로 빠지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석굴의 습기문제가 "습한 공기의 유입"에 있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석굴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연구해온 남천우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석굴의 습기는 물이 스며드는 누수현상이 아니라 "결로현상"에 있다는 것이다. 즉 외부와 내부의 공기 온도차가 심하여 이슬점에 다다르면 자연히 이슬방울이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사방침은 공기의 유입을 막는다는 것인데 이는 반대로 공기가 원활하게 유동할 수 있도록 개방해야 하며 그것이 석굴의 원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천우 박사는 당시 문화재위원에 위촉되어 있지 않았고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석굴 보수공사에서 전실에 목조건축을 얹는 것은 "습한공기의 유입"을 막기위한 조처로만 구상된 것이 아니었다. 공사단은 석굴의 원형이 그렇다는 주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석굴 주위를 조사 발굴하는 과정에서 8세기 후반, 창건 당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왓장에 "석불사"라는 명문이 새겨 있는 것을 수습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기와는 목조건축의 기와인지, 봉토위의 깨진 천장덮개돌로 물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일부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석굴의 전실에 목조지붕을 얹는다는 일은 원형을 위해서도 보존을 위해서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사는 그렇게 진행되었고, 석굴암은 목굴암(木窟庵)으로 되고 만 것이다. 석굴 전실에 목조건축을 세운다는 것은 황수영 박사의 일관된 주장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박정희의 생각이기도 했다.
석굴암 수리 본공사는 1964년 7월 1일, 만 1년 만에 준공식을 갖게된다. 준공식에는 당연히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석굴 벽면에서는 눈에 띄게 물이 흘러내렸다. 누수는 물론이고 습한 공기의 유입까지 막는 3년간의 공사가 결국 석굴을 물바다로 만들고 만 것이다. "석굴암인가 수(水)굴암인가" "석굴암은 암(暗)굴암." 그리고 그해 여름 석굴의 본존불은 물방울로 샤워를 하기에 이르렀다. 수리공사 이후 석굴에 이처럼 물이 스미는 주요원인은 철저한 밀폐공사의 잘못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전실의 목조건축보다도 이중 콘크리트 돔이 더 큰 문제였다. 석굴에 생기는 물은 남천우 박사의 진단대로 누수가 아닌 결로현상인바 이중 콘크리트 돔 사이에 들어있는 더운 공기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함으로서 여름이면 굴 내부의 상대온도.상대습도가 급격히 낮아지면서 생기는 자연현상이었다. 전실의 목조건축도 굴 밖의 더운 공기의 유입은 막아주지만 공기중의 습기를 막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석굴의 습기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 상태에서 기계설비에 의한 습기제거를 강구하게 되었고 준공 2년 뒤에는 서울 공대 기계과 김효경 박사에게 이 작업이 위촉되었다. 그리하여 석굴에는 공기냉각장치(에어컨)을 설치하여 기계작동에 의한 강제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석굴은 "전(電)굴암"이라는 또 하나의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로부터 30년이 다된 오늘날까지도 석굴 바로 옆에 붙은 기계는 진동소리를 내며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기계설비에 의한 강제에 의하여 석굴의 온.습도를 조절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따른다. 기계가 작동하면서 일으키는 소음을 관람자들은 인내로 참아준다고 하더라도 그 미세한 진동이 석굴에 끼치는 영향이 없을 리 없는 것이다. 정부 문화재 관리국은 한국과학기술원에 석굴연구를 위한 영역을 주었다. 그것은 양재현 박사가 맡은 프로젝트였는데 거기에 "석굴보전에 관람객 출입이 해롭다"고 되어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석굴의 본존불을 교도소에서 죄수 면회하는 것보다 더 먼 거리에서 볼 수 있을 뿐이며, 그분의 권속은 그림자도 볼수 없게 되었다.
양아치 /2004/12/4(토)
- Gregoire Kayibanda
1962 - 르완다, 벨기에로부터 독립
1961년 6월, UN 신탁통치이사회의 감시로 실시된 주민투표와 총선거에서 바후투족의 정당인 공화민주운동당(MDR)이 승리하였으며, 그해 1월 선언되었던 공화제가 확인되고 MDR이 자치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그해 10월 벨기에의 승인을 받았으며, 1962년 1월 1일 정식으로 내정자치가 허용되었다. 1962년 4월에는 부룬디와 통화·관세 동맹을 맺고, UN 결의로 신탁통치협정이 끝났으며, 7월 1일에는 르완다공화국으로 독립, MDR의 당수 그레구아르 카이반다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naver
1962 - 부룬디, 벨기에로부터 독립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콩고에서 진주한 벨기에군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독일이 패망하자 ‘르완다-우룬디’로서 1923년 벨기에 통치하의 국제연맹 신탁통치령이 되었고, 1946년 말에는 UN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1957년부터 일기 시작한 ‘르완다-우룬디’ 민족독립운동은 르완다와의 통합에 의한 즉시독립을 요구하였으며, UN도 르완다와 우룬디가 연방국가로서 독립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르완다에서는 소수민족인 투치족 왕의 지배에 항거하여 다수민족인 후투족이 폭동을 일으켜 국왕을 추방하였고, 1961년 l월 28일 공화제를 선포하였다. 그 결과 군주제를 지키는 우룬디는 1962년 7월 1일 르완다와 분리하여 입헌군주국인 부룬디로서 독립하였다. /naver
- 전력사업100주년 기념 (1998.1.26.)
1961 - 한국전력 발족
1961년 오늘, 한국전력주식회사가 발족했다.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조선전업과 남선전기, 경성전기 등 전력 3사를 통폐합해 한국전력을 출범시켰다.
전력회사 통폐합은 업무의 중복을 피하고 경비의 절약은 물론 향후 전력시설 확충에 필요한 외국의 원조를 쉽게 받기 위한 시책이었다.
한국전력 시무식은 같은 달 18일 윤보선 대통령과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YTN
1961 - 찰스 왕세자의 비(妃) 다이애나(Diana, Spencer) 출생
다이애나 [Diana, (Frances) Spencer, 1961.7.1~1997.8.31]
영국 찰스 왕세자의 빈이었으나 1996년 8월에 이혼했다.
1남 3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집이 왕가의 별장인 샌드링엄 내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왕실과 관계를 맺어왔다. 런던에 있는 유치원에서 보모로 일하다가 1981년 7월 찰스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하여 1996년 8월에 이혼했다. 이혼 후 대인지뢰 사용금지 운동을 벌였다. 그후 1997년 8월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1992년 11월에 한국을 방문했다. /naver
1961 - 미국의 육상 선수 칼 루이스(Lewis, Carl) 출생
루이스 [Lewis, Frederick Carlton ("Carl"), 1961.7.1~ ]
본명은 Frederick Carlton Lewis.
미국의 육상선수.
칼 루이스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1984)에 처녀 출전해 100m(9.9초), 200m(19.8초), 멀리뛰기(8.54m)와 400m 릴레이(최종 주자) 등의 4개 종목에서 우승했다. 이로써 앨빈 크레언즐라인(1900), 제시 오언스(1936)에 이어 단일 대회에서 금메달 4개를 석권한 3번째 미국 육상선수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루이스는 서울 올림픽 대회(1988)에서 100m(9.92초), 멀리뛰기(8.72m, 대회 사상 첫 2연패)로 금메달 2개를 보태고,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1992)에서 멀리뛰기(8.67m, 대회 사상 첫 3연패), 400m 릴레이(최종 주자, 37.40초, 대회 및 세계신기록) 우승으로 금메달 2개를 더 보탰으며, 애틀랜타 올림픽 대회(1996)에서 대회 사상 멀리뛰기 종목 첫 4연패라는 대기록을 작성하면서 9번째 금메달을 딴 뒤 이듬해 현역에서 은퇴했다. /브리태니커
1960 - 소말리아, 영국-이탈리아로부터 독립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령 소말릴란드도 한때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았으나, 영국군의 반격으로 두 소말릴란드가 영국군 군정하에 놓이게 되었다. 전쟁 후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민정으로 복귀되었고(1948), 1950년 구(舊)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UN의 신탁통치(이탈리아가 통치)하에 놓였다. 1960년 6월 26일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독립하였고, 이어서 같은 해 7월 1일에 10년간의 UN 통치기간이 끝난 구(舊)이탈리아령과 합병, 소말리아 공화국이라는 통일국가가 수립되었다. 초대 대통령으로 소말리 청년연맹의 셰르마르케가 선출되었다. /naver
1960 - 가나, 영국연방내 공화국으로 독립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 박사 단쿠아를 중심으로 ‘통일 골드 코스트 회의(UGCC)’가 결성되었다. 이때 서기장이 된 K.은크루마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민족독립운동의 추진을 결심하고, 1949년 6월 회의인민당(CPP)을 조직하였다.
영국이 자치정부를 인정하는 헌법안을 제안하자 은크루마를 비롯한 회의인민당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반대하다가 체포·투옥되었으나, 1951년 선거에서 은크루마는 옥중 입후보로 당선되어 자치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1956년 서부 토골란드의 주민투표로 이 지역도 통합하기로 결정되자 1957년 3월 6일 골드 코스트는 ‘가나’라는 국명으로 독립하였다. 가나는 1960년 국민투표로 '가나공화국'이 되었으며, 은크루마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관념적인 범(汎)아프리카주의 추구에 몰두하였고, 1966년 2월 24일 베트남의 화평 문제로 미얀마·중국·북베트남을 방문하는 동안 본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실각하고 헌법은 폐기되었으며, 회의인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는 무너졌다. /naver
1957 - 유엔군 사령부,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
미국정부가 1957년 7월 1일자로 일본 동경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를 해체하고 극동군사령부와 함께 있던 유엔군사령부를 서울로 이전했다. 또한 유엔군사령관이 주한 미8군사령관을 겸임토록 했다.
유엔군사령부의 서울 이전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對韓 신 무기배치방침표명(5.22)에 뒤이어 신형 F100제트기단 한국배치(6.27), 미 제1기갑사단 한국이동(8.1) 등으로 구체화된 극동미군사력의 전진배치 정책과 월남전 개입 움직임과 맥을 같이 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북한은 7월 28일 판문점 정전위원회에서 휴전협정 군사조항 폐기를 요구했고 유엔군측은 북한의 요구를 거부하는 등 휴전선 일대에 긴장이 고조됐다. 이날 서울 용산 미8군사령부 연병장에서 열린 유엔군사령부 서울이전 및 신임 사령관 취임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부통령 등 한국의 3부요인과 한·미 군수뇌부가 모두 참석했다. /조선
1951 - 콜롬보 플랜(동남아 경제개발협력계획) 설립
1951년 7월 1일 실시키로 한 콜롬보 플랜은 1950년 1월 시론(스리랑카) 콜롬보시에서 개최된 영연방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체결된 협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영연방국 중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파키스탄, 시론, 인도의 외무부장관들이 동남아시아 경제발전을 위한 회담의 자리에서 맺은 국가간 협정이다. 이 모임은 원래 영연방국가들이 시론, 파키스탄과 인도의 인적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6년 계획으로 시작했으나 이것이 계속 연장되어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다. 1954년 영연방 국가가 아닌 일본이 회원국으로 가입하면서부터 영연방국가들 만의 자체성을 잃었고, 그 후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가입해 현재 24개국의 회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Google
1950 - 미국 지상군 처음 한국 도착
6ㆍ25가 발발하자 미국은 소련의 의도파악에 부심한다. 다행히 소련이 전면전을 위한 전초전을 벌이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자 참전을 결정하고 도쿄에 주둔하고 있는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를 전황파악차 한국으로 파견한다.
6월29일 수원에서 한ㆍ미 지휘관들과 회의를 주재하던 맥아더는 그를 호위해 온 F-51기와 북한군의 야크-9기가 자신의 눈 앞에서 공중전을 벌일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깨닫고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낸다.
6월30일 트루먼이 지상군 투입을 결정하자 맥아더는 먼저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제24사단 21연대를 파견한다. 대대장의 이름을 따 스미스부대로 불린 제21연대 제1대대가 군용기를 이용, 부산에 도착한 것은 7월1일 오전8시45분이었다. 최초의 미 지상군 부대였고 본격적인 참전의 시작이었다.
대전을 거쳐 북상한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과 처음 맞딱드린 것은 7월5일 오산 부근 죽미령에서였다. 하지만 첫 전투는 북한군을 과소평가한 탓에 완벽한 패배를 맛봐야 했다. 540여명의 부대원 중 150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했다. 3년의 전쟁기간 중 3만3870여명이나 되는 미국의 젊은이가 먼 이국 땅에서 이렇게 죽어갔다. /조선
[책갈피 속의 오늘]1950년 美스미스부대 한국 도착
부대원은 대부분 코리아를 몰랐다. 전투 경험이 있는 장병은 6분의 1 정도였다.
미국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는 일본 구마모토(熊本)에서 출동 명령을 받았다. 트루먼 대통령이 파병을 승인한 지 1시간 뒤, 1950년 6월 30일 오후 8시였다.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남침 나흘 뒤 수원에서 지휘관 회의를 주재하다가 F-51기와 북한군의 야크-9기가 공중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지상군 투입을 건의했다.
1대대는 7월 1일 오전 8시 5분 이타즈케(板付)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찰스 스미스(중령) 대대장은 “가능한 한 북쪽에서 적의 침공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대대장의 이름을 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오후 3시 부산의 수영비행장으로 공수된다. 2개 중대 406명. 장병 1명이 M1 실탄 120발과 ‘C-레이션’ 이틀분을 갖고 있었다.
시민의 환영을 받은 뒤 2일 오전 8시 대전역에 도착했다. 경기 오산시 죽미령에 도착한 때는 5일 오전 3시였다.
소련제 T-34 탱크가 오전 8시 16분 나타났다. 미군이 포탄을 발사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북한군과의 첫 지상전이었다. 오전 11시 45분에는 보병이 사격을 개시했다.
북한군 제4사단의 제16, 18연대가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스미스 대대장은 권총을 빼어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불사조와 같이 보였다”고 통역관은 전했다.
탄약이 떨어지고 통신이 끊기자 스미스 대대장은 오후 2시 반에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북한군 42명이 숨지고 85명이 다쳤지만 미군도 181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적의 진격을 6시간 15분가량 늦춘 의미는 적지 않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이 이 전투의 여파로 주춤거리는 동안 한국군과 미군은 전열을 정비했다.
북한군 제2군단 작전참모는 “7월 초에 미 지상군이 오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고 말했다.
스미스라는 이름은 6·25전쟁에 자주 나온다.
미 해병 1사단은 1950년 11월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기습으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포위망을 뚫고 10배 많은 중공군 12만 명을 궤멸시키면서 흥남까지 철수했다.
“후퇴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한다”는 명언을 남긴 사단장이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산골마을에 비상착륙해 주민을 놀라게 했던 미 해군 조종사 이름도 스미스이다.
송상근 기자
70030000000134/20080701/8596828/1
1948 -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
[어제의 오늘]1948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
ㆍ제헌국회서 압도적 찬성 가결
1948년 7월1일은 제헌국회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한 날이다. 22차 제헌국회 회의가 열린 이날 재석의원 188명 중 찬성 163명, 반대 2명으로 가결됐다. 국호 제정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정치세력들은 저마다 국호를 내걸었다. 해공 신익희는 ‘한국’, 유진오는 ‘조선민주공화국’, 김규식·여운형은 ‘고려공화국’을 주장했다. 제헌국회에 앞서 열린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표결 끝에 대한민국이 17표, 고려공화국이 7표, 조선공화국이 2표, 한국이 1표를 얻었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국호다. 임시정부 때도 논란이 있었다. 1919년 4월10일 의정원 회의가 열렸을 때 신석우가 대한민국을 제안했다. 여운형은 “대한이란 말은 조선왕조 말엽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고 주장, 국호로 채택됐다.
2008년 정부와 보수진영은 1948년을 건국시점으로 잡아 ‘건국 60년’, 즉 ‘대한민국 수립’을 내걸었다. 광복회와 민족주의 진영 쪽에선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년’이라고 맞섰다.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왔다. 1897년 고종 황제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을 잇는다’며 대한제국을 국호로 정했다. 하지만 일본은 1910년 칙령 제318호에서 “대한제국 국호를 고쳐 지금부터 조선이라 칭한다”며 ‘한’이란 말을 못 쓰게 했다.
소설가 김진명씨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두고 있던 조선이 고작 한반도 남단에 움츠리고 있던 약소국 삼한을 이으려고 국호를 바꿨을까”라며 ‘삼한정통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한민족 최초의 국가를 기원전 9세기 무렵의 ‘한(韓)’이라고 상정한 내용을 담은 소설 <천년의 금서>를 냈다.
얽히고설킨 내력에다 엄숙하기 그지없던 대한민국 국호는 ‘대~한민국! 짝짝 짝 짝짝!’이란 국민 응원 ‘구호’로 친숙해졌다. 국가와 자본도 월드컵 때면 ‘대~한민국’을 독려한다. 정작 ‘대한민국’ 안에 사는 이들의 삶과 사회 분열상은 안중에 없는 모습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6-30 17:24: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6301724305&code=100100&s_code=ap005
1946 - 미국, 비키니섬에서 최초의 공개 핵실험
1946년 7월 1일 미국이 남태평양 마샬군도 비키니섬에서 행해진 핵실험을 기자들에게 처음 공개했다.
`크로스 로드`작전으로 명명된 이 실험은 제1회 유엔원자력위원회 회의에서 미국이 제안한 원자력의 국제관리안을 소련이 반대해 채택하지 못하게 된 직후라는 점에서 소련에 대한 미국의 시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B29로부터 투하된 원자폭탄은 아름답던 바다를 한순간에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이보다 앞서 동서 35km, 남북 28km의 환초에 미국의 항공모함, 일본과 독일의 군함 75척을 모아놓고 이 무기들을 핵실험의 표적으로 삼게 했다. 이중 17척이 침몰,대파됐고 나머지도 모두 일부씩 파괴됐다. 원폭이 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실험용 동물들도 군함에 태워놓은 상태였다. /조선
1946 - 파나마의 정치가, 대통령 모스코소(Moscoso, Mireya) 출생
모스코소 [Moscoso, Mireya (Elisa), 1946.7.1~ ]
파나마의 정치가, 대통령.
1946년 7월 1일 파나마의 페다시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미레야 엘리사 모스코소 데 그루베(Mireya Elisa Moscoso de Gruber)이다. 파나마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1999년 대통령이 되어 2004년까지 역임하였다. 교사였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7세부터 비서로 일하였다. 1960년대 초 대통령을 3차례나 역임한 아르눌포 아리아스(Arnulfo Arias:1901~1988)를 만나 그의 정치활동에 참여하였다.
1969년 아리아스의 커피수출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아리아스가 오마르 H. 토리호스(Omar Herrera Torrijos)의 군사 쿠데타로 실각하자 함께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망명하였다. 1970년 23세의 나이로 당시 68세이던 아리아스와 결혼하였다. 망명지인 마이애미에서 대학에 입학하여 실내장식을 공부하였다. 1988년 13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끝낸 뒤 남편과 함께 귀국하였으나 아리아스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990년 남편의 이름을 딴 아르눌피스타당(Arnulfista Party)을 설립하여 대중정치를 주도하였다. 1994년 처음으로 대선에 출마하였으나 에르네스토 발라다레스에게 패배하였다. 1999년 부패 척결, 빈곤 탈출, 보건 강화 등을 공약으로 하여 다시 대선에 도전, 집권당 마르틴 토리호스 후보를 제치고 파나마 첫 여성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9년 12월 31일 미국으로부터 파나마운하 통제권을 넘겨받아, 완전한 주권을 되찾은 파나마를 통치하는 첫 대통령이 되었다. /naver
- 'The Firm', Sydney Pollock, Tom Cruise
1934 - 미국의 영화 감독, 제작자, 배우 시드니 폴락(Pollack, Sydney) 출생
폴락 [Pollack, Sydney, 1934.7.1~2008.5.26]
미국 영화감독, 제작자.
1985년 〈아웃 오브 아프리카 Out of Africa〉로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폴락은 브로드웨이와 텔레비전 배우로 출발했다. 폴락은 텔레비전에서 연기를 하면서 연출에 대한 관심을 갖게되었고 후에 80편 이상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폴락은 1965년에 첫 영화 〈가는 실 The Slender Thread〉을 감독했다. 1969년에는 〈그들이 말을 죽인다, 그렇지 않은가? They Shoot Horses, Don't They〉로 처음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폴락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추억 The Way We Were〉(1973), 〈코드 네임 콘돌 Three Days of the Condor〉(1975), 〈일렉트릭 호스맨 The Electric Horseman〉(1979) 등에서도 로버트 레드포드와 호흡을 맞추었다. 폴락은 코미디 〈투시 Tootsie〉(1982)를 공동 제작하고 감독해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작품으로 감독상과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폴락이 처음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것은 대작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제작자 및 감독으로서였다. /브리태니커
1930 - 볼리비아 대통령 산체즈 드 로자다(Sánchez de Lozada, Gonzalo) 출생
산체즈 드 로자다 [Sánchez de Lozada, Gonzalo, 1930.7.1~ ]
Gonzalo Sánchez de Lozada y Sánchez Bustamante (born July 1, 1930), familiarly known as "Goni", is a Bolivian politician, businessman, and former president. A life-long member of the Movimiento Nacionalista Revolucionario (MNR), he is credited for using "shock therapy", the economic theory championed by Harvard economist Jeffrey Sachs. This extreme measure was used by Bolivia in 1985 (when Sánchez de Lozada was planning minister in the government of president Víctor Paz) to cut down on rampant hyperinflation caused by excessive government spending. More broadly, he is credited with having engineered the neoliberal restructuring of the Bolivian state and the dismantling the statist model that had prevailed in the country since the advent of the 1952 Revolution.
Sánchez de Lozada was twice elected President of Bolivia, both times on the
MNR ticket. During his first term (1993–97), he initiated a series of landmark social, economic and constitutional reforms. Elected to a second term in 2002, he resigned in October 2003 in protest after violent protests related to the Bolivian gas conflict in which some 60 protesters, soldiers and policemen died. In March 2006, he resigned the leadership of the MNR.Political life
http://en.wikipedia.org/wiki/Gonzalo_S%C3%A1nchez_de_Lozada
1926 -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포겔(Fogel, Robert) 출생
포겔 [Fogel, Robert William, 1926.7.1~]
미국의 경제학자.
시카고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미국경제 발전과정에서 철도와 노예제도가 어떤 공헌을 했는가를 새롭게 조명한 공로로 1993년 D.노스와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하버드대학교 인구경제연구소 소장을 지낸 바 있는 그는, 경제문제 연구는 방법이 중요하며 통계자료에 의해 검증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노예제도가 비인간적 생산방법이기는 하나 당시 상황에서는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적 결정에 의해 노예제도가 붕괴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켰으나 학자로서 통계자료에 의한 객관적 연구결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주요 저서에 《철도와 미국의 경제성장》 《계량경제사의 연구》(1971), 연구 논문에 〈연방토지정책의 효율성 연구〉 등이 있다. /네이버
- 중국공산당 성립 50주년 기념
1921 - 중국 공산당 결성
중국 공산당 제1기 전국대표대회가 1921년 7월 1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여자기숙사학교에서 열려 중국 공산당이 창당됐다. 당원이라고 해야 중국 전역에서 57명 뿐이었고, 창당대회도 둥비우(董必武), 마오쩌둥(毛澤東), 장궈타오(張國燾), 저우포하이(周佛海), 천두슈(陳獨秀) 등 12명 뿐이었다. 그나마 대회 도중 경찰의 습격을 받아 회의장소를 옮겨 작은 배 위에서 창당선언을 끝내야 했다.
대회에서는 천두슈를 당서기로, 장궈타오와 이리다(李達)을 중앙위원으로, 저우포하이와 (이한준 李漢俊), (유인정 劉仁靜)을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했다. 창당될 때만해도 오늘과 같은 거대한 집권당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창당 이후 지금까지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파란만장의 길을 걸어왔다. 10만여명의 공산당원들이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i겨 겨우 8천여명만 살아남은 대장정, 교조적인 사회주의 정책 추진으로 3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민공사와 대약진운동,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 1980년대의 천안문사태 등등 실로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중국 현대사 그 자체였다. /조선
- Botswana, 5 Pula (Banknote)
1921 - 보츠와나의 초대 대통령 카마(Khama, Seretse) 출생
카마 [Khama, Seretse, 1921.7.1~1980.7.13]
세로웨 출생.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베추아날란드의 최대 부족 바망와토족(族)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교육을 받고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아버지 세코마 2세가 죽자 1925년 4세 때 추장이 되었으나, 섭정(攝政)을 맡았던 숙부가 1950년 자신이 추장이 되기 위하여 카마를 추방하였다. 1956년 귀국한 그는 1962년 민주당을 결성하여 보통 시민으로 총재가 되었다. 1962∼1965년 입법의회 및 행정의회 의원, 1965∼1966년 하원의원 및 총리가 되었다. 1966년 독립국이 되자 초대 대통령에 취임, 국호를 보츠와나로 정하고 종신집권하였다. /naver
1916 -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 시작
1916년 오늘 오전 7시 30분, 연합군 보병이 솜므(Somme)강 북쪽 34km 전방의 독일군 고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 동원된 연합군의 80%는 영국군으로 구성됐다.
연합군은 이 전투에 앞서 8일 동안 대규모 공습과 포격을 퍼부었다.
연합군 보병들은 이 때문에 진출로가 확보됐을 것으로 보고 안심하고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난공불락의 참호 속에서 기관총으로 응사했다.
공격 첫 날 영국군이 2만 명 가까이 전사하고 6만여 명이 부상했다.
단일 전투에서 하루에 이만큼 많은 전사자가 생기기는 처음이었다.
솜므 전투는 이후 11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7월 중순의 영국 기병대의 공격도 역시 독일군의 기관총에 의해 무산됐다.
10월에는 폭우가 내리면서 전선이 온통 진흙바다로 변해 연합군은 이 전투가 막을 내린 11월 중순까지 8km 정도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4개월이 넘게 계속된 솜므 전투에서 영국군 42만, 프랑스군 19만5천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고, 독일군 사상자는 65만여 명에 달했다. /YTN
- Tour de France Bicycle Race, Cent.,
Maurice Garin, Winner of 1903 Race
1903 - 투르 드 프랑스(Le Tour de France) 첫 대회 출발 (7.1~7.19)
1903년 시작된 투르 드 프랑스는 올해로 102년째를 맞는다. 이 대회는 「로토」라는 신생 스포츠 신문이 판매 부수를 확장하기 위한 홍보 전략의 하나로 창설한 대회였다. 1900년 창간한 「로토」는 이미 스포츠 신문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경쟁지 「르벨로」를 따라잡을 계기가 필요했다. 1902년 「르벨로」에서 「로토」로 옮겨온 제오 르페브르는 프랑스 전국을 도는 자전거 경기 개최를 제안했고, 이를 「로토」 발행인이었던 앙리 데그라니에가 받아들이면서 이 대회는 닻을 올리게 됐다.
「로토」는 1903년 1월 19일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자전거 경주. 파리 - 리옹 - 마르세유- 툴루즈 - 낭트를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한 달 이상 계속되는 대회’의 개최를 선언했다. 그해 7월 1일부터 19일까지 진행된 첫 경기에는 60명의 선수들이 참여했고, 이들은 6구간에 걸쳐 총 2,388km를 달렸다. 첫 경기에서 6구간 중 3구간을 우승한 모리스 가랑이 스타로 떠올랐다. 그가 당시 노동자 월급의 60배에 해당하는 9000프랑의 상금을 거머쥐는 ‘행운아’가 되면서 이 ‘터무니없는 죽음의 레이스’는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됐다. (2005.11.)
https://www.kogas.or.kr/online/korea/2005/2005_11/a02.html
1903 - 영국의 선구적 여자 비행사 존슨(Johnson, Amy) 출생
존슨 [Johnson, Amy, 1903.7.1~1941.1.5]
런던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다윈까지 단독비행기록 수립을 시도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셰필드대학에 다녔고 1925년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교사가 되려고 마음먹었으나 런던에서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비행술에 빠져들게 되었고, 마침내 1928년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또 영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비행기 정비사 자격증을 땄다. 1930년 5월 5일 다윈으로 단독비행에 올랐다. 이 비행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났으나, 그녀의 의지와 용기는 영어권 세계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영국 언론은 그녀에게 '하늘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뒤 수많은 장거리 비행을 했으며 1931년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도쿄[東京]까지 가는 비행기록을 세웠고, 1932년에는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까지 단독비행을 했다. 그이후에는 크게 주목할 만한 성과가 없다. 1939년 항공수송 지원부대에 합류했다. 항공부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템스 강 어귀에서 실종되었다. /브리태니커
1901 - 노벨상 창설 (12월 10일 첫 시상)
스웨덴의 발명자인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유언에 따라 창설된 권위있는 국제적인 상이다. 노벨이 기부한 3100만 크로나를 기금으로 노벨재단을 설립하고 그 이자로 상금을 충당한다.
1901년부터 물리학, 화학, 생리학 및 의학, 문학, 평화의 다섯부문에 걸쳐 수여됐으며 1969년부터 경제학상이 새로 추가되었다. 물리, 화학, 경제는 스웨덴학술원, 의학은 스웨덴 칼로린스카 연구소, 문학은 스웨덴 예술원에서 선정하나 평화상은 노르웨이의 노벨위원회가 선정한다. 세계대전으로 1918년, 1939~43년 등 여섯차례 시상을 하지 못했다. /조선
1896 - 미국의 소설가 해리엇 스토(Stowe, Harriet) 사망
스토 [Stowe, Harriet Elizabeth Beecher, 1811.6.14~1896.7.1]
미국 소설가.
미국 코네티컷주 리치필드 출생. 신학자인 L.비처의 딸로서 이웃 켄터키주의 노예들의 비참한 상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1836년 신학교 교수인 C.스토와 결혼하고 1850년에 동부의 메인주로 이사하였다. 이 해에 발표된 도망 노예 단속법안으로 그녀의 노예제도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졌다. 노예제도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그녀의 분노는 드디어 《엉클 톰스 캐빈 Uncle Tom’s Cabin》(1852)을 발표하게끔 하였다.
이 작품은 노예제도에 대한 격렬한 탄핵의 기백으로 가득 차 있는 위대한 멜로드라마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으며, 동시에 동부에 사는 미국인들을 감동시켜 드디어 남북전쟁을 일으킬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이야기 줄거리와 인물의 파악이 쉬운 점과 인도주의 정신이 충만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즐겨 읽는 작품이다. 이 외에도 뉴잉글랜드에서 소재를 구한 일련의 소설을 썼으며, 《목사의 구혼 The Minister’s Wooing》(1859) 《올드 타운의 사람들 Oldtown Folks》(1869)을 발표하였다. 이것들은 《엉클 톰스 캐빈》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지방문학의 원조로서 그녀의 사실주의는 근년에 이르러 재평가되고 있다. /네이버
1893 - 미국의 인권운동가 화이트(White, Walter) 출생
화이트 [White, Walter (Francis), 1893.7.1~1955.3.21]
[역사속의 인물] ‘흑인 대변자' 화이트
1893년 오늘 미국 조지아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월터 프란시스 화이트는 그의 성처럼 백인이지만, 평생 흑인을 대변해왔다.
미국 백인 폭도들이 흑인들에게 가한 사형에 대해 오랫동안 저항운동을 폈고, 결국 이를 퇴치했다.
25살 때인 1918년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에 가입한 뒤 37년 동안 몸담았고, 24년 동안 사무국장을 지냈다. 그의 삶의 주요 목표는 ‘사형의 근절’이었다. 20건 이상의 사형사건과 인종폭동사건을 현장 조사했고, 연방 ‘반사형법’ 제정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AAACP에 가입했던 해 사형은 67건이 집행됐지만, 그가 죽은 해인 1955년 3건으로 줄었다. 1930년에는 투표권에서의 흑인차별에 저항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흑인 투표권을 반대한 존 파커 판사를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했을 때 홀로 상원에 영향력을 행사해 이 지명을 부결시키는데 성공했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노동운동 지도자인 필립 랜돌프와 함께 정부조직 및 방위산업체에서의 흑인차별을 금지하는 ‘미국공정고용실행위원회’를 설립(1941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흑인차별과 사형에 대해 온몸으로 싸웠던 아름다운 백인이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7월 0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9423&yy=2009
- 'The Moon and the Bull', Tapestry - 'Lunaris', Tapestry
1892 - 프랑스의 태피스트리 작가, 화가 뤼르사(Lurcat, Jean) 출생
뤼르사 [Lurcat, Jean, 1892.7.1~1966.1.6]
프랑스의 화가·디자이너.
20세기에 태피스트리를 도안하고 짜는 기술을 부흥시키는 데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17년 최초의
태피스트리를 제작·전시했지만, 본격적으로 화가에서 태피스트리 디자이너로 변신한 해는 1936년이었다. 1939년 화가인 투생 뒤브뢰유, 마르셀 그로매르와 함께 오비송으로 가 16세기 이래 역사적으로 직조의 대가인 프랑수아 타바르의 도움으로 현대화된 태피스트리 제조 센터를 건립했다. 류르사가 디자인 한 1,000여 태피스트리 중 유명한 것은 〈사계〉(1940, 파리의 OECD 빌딩에 대여중)·〈묵시록 태피스트리〉(1948, 프랑스 오트 사부아 주의 플라토다시에 있는 노트르담 드 투트그라세 교회)·〈세계의 노래〉(1957~64) 등이 있다. 그는 무대장치와 무대의상의 디자인, 도자기, 삽화, 석판인쇄에 관계했고 태피스트리에 관한 책과 시집도 출판했다. /브리태니커
1889 - 소련의 조각가 베라 무히나(Mukhina, Vera) 출생
무히나 [Mukhina, Vera Ignatyevna, 1889.7.1~1953.10.6]
소련의 여류 조각가.
리가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에서 그림을 배웠으나, 파리에 가서는 조각으로 방향을 바꾸어 E.A.부르델에게 사사하였다(1912∼1914). 파리에서는 동향인인 전위적 디자이너 포포와 가까이 지내고, 차킨, J.리프시츠, H.로랑스와 같은 신예 조각가들의 실험적 조각에도 관심을 가졌다.
11월혁명(구력 10월) 후 모국에 돌아와, 새 정권하에서 기념비 제작에 전념하였다. 초상 조각에도 뛰어난 것이 많지만, 대표적인 대작으로는 입체파(立體派)의 영향이 가미된 《혁명의 불꽃》(1923), 혁명 10주년에 만든 우의상(寓意像) 《농부(農婦)》(1927), 파리만국박람회의 소련관(館)을 장식한 《노동자와 콜호스 여성》(1937), 그리고 그 후에 만든 M.고리키와 차이콥스키의 기념비, 상징적인 두 나부(裸婦)의 구성 《곡물(穀物)》 등이 있고, 이들 작품을 통하여 조각적 매스(masse: 量塊)의 구조적 연관문제를 추구하였다. 또한 유리그릇이나 도자기의 참신한 디자인도 주목받았으며, 그녀의 이름을 딴 모스크바의 무히나공예미술학교는 공예교육기관으로서는 소련 최고였다. /네이버
1879 - 프랑스의 노동조합 지도자 주오(Jouhaux, Léon) 출생
주오 [Jouhaux, Léon, 1879.7.1~1954.4.28]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노동조합 지도자.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ILO)의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16세 때부터 성냥공장에서 일했으며, 곧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지도적인 선전가로 성장했다. 1906년 성냥노동자연합의 전국서기로, 1909년 프랑스 노동총동맹(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CGT)의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독일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만나 반전운동의 조직화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지만 그뒤 프랑스의 참전을 지지했다. 1919년에 열린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참가했고, 여기서 설립된 국제노동입법위원회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이때부터 경제회의 창설을 추진하여 1925년 결실을 보았다. 그는 노동조합주의가 경제의 방향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노동조합의 활동은 정치행동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6년 레옹 블룸의 내각참여 요청을 거부했지만, 같은 해 1921년 CGT에서 탈퇴한 공산주의자들이 CGT로 복귀하는 데 찬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를 점령했던 독일군의 꼭두각시 정권인 비시 프랑스는 CGT를 해산하고 그를 체포하여 독일에 인도했다. 나머지 전쟁기간을 집단수용소에서 보낸 뒤 프랑스로 돌아와 재건 CGT의 총서기에 다시 취임했다. 그러나 1947년 지금의 공산당 다수파와 결별하고 1948년 공산주의 조직과 가톨릭계 노동조직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을 취한 사회당계 전국조직인 프랑스 노동조합(Force Ouriere/FO)을 결성했다.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nternational Confederation of Free Trade Unions/ICFTU) 창설을 도왔고, 1951년 11월 5일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1875 - 국제우편조약 발효 (만국우편연합 기념일로)
만국우편연합(Universal Postal Union : UPU) 이란
만국우편연합(Universal Postal Union : UPU)은 UN의 전문기구로 우편물의 세계 단일우편영역 형성, 우편물 중계의 자유보장, 우편분야의 표준화 등을 목적으로 1874년 10월 9일 발족되었다. 만국우편연합은 1874년 스위스의 베른에서 22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제 1차 국제우편회의에서 채택한 베른조약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875년 7월 1일에 발효한 이 조약에 따라 보통우편연합(General Postal Union)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1978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 2차 국제우편회의에서 만국우편연합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1948년 유엔의 전문기구로 되었다. 이 기구에는 만국우편총회(Universal Postal Congress), 집행이사회(Executive Council), 우편연구협의 이사회(Consultative Council for Postal Studies), 그리고 국제사무국 등이 있다.
1872 - 프랑스의 항공기술자, 비행사 블레리오(Blériot, Louis) 출생
블레리오 [Blériot, Louis, 1872.7.1~1936.8.2]
프랑스의 비행사.
공기보다 무거운(가벼운 기체의 부력이 아니라 기관을 이용) 비행기를 타고 세계 최초로 대양(大洋) 횡단비행을 했다.
그는 자동차 전등과 부속품을 발명하여 약간의 재산을 모았고, 일찍부터 비행술에 관심을 가졌다. 처음에는 센 강에서 견인식 글라이더로 실험을 했다. 그뒤 가벼운 기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상자연(箱子鳶:상자 모양의 연) 복엽기뿐만 아니라 꼬리날개 모양의 작은 날개가 앞에 부착된 단엽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항공기를 개발했다. 1909년까지 보다 편리한 설계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왔고, 그해 7월 25일 28마력 기관을 장치한 단엽기인 '블레리오 XI기'를 조종하여 칼레에서 도버까지 영국해협을 횡단했다. 이 업적으로 영원한 명성을 얻었으며, 런던의 〈데일리 메일 Daily Mail〉지로부터 1,000파운드의 상금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프랑스 정부를 위한 항공기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직접 설계한 연습기를 생산했으며, 유명한 스페이드 전투기의 제작에도 관계했다. 전쟁이 끝난 뒤 민간 항공기 개발을 위해 회사를 차렸다. /브리태니커
- Dominion of Canada
1867 - 캐나다연방 성립
캐나다의 역사 - 캐나다 연방 탄생
영토확장을 노리는 미국의 위협과 식민지 경영에 따른 부담으로 인해 자치령 캐나다 결성에 대한 움직임이
활발해고, 1867년 영국 의회에서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이 성립되었습니다.
어퍼와 로어캐나다, 노바스코샤, 뉴브른스윅의 네 식민지가 통합되고 캐나다 자치령이 성립되어
연방정부가 탄생했으며, 초대 수상으로 맥도날드가 취임했습니다.
매년 7월 1일을 Canada Day로 지정하여 독립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1873년에는 매니토바 주,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주도 연방에 가입했습니다.
1896년에 유콘의 클론 다이크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1896-1903)가 일어나면서
1898년 유콘 준 주가 만들어 졌습니다.
1905년에는 앨버타 주와 서스캐치원 주가 연방에 참여하고 2차세계대전 후인
1949년에는 10번째 주인 뉴펀들랜드가 연방에 가입함으로서 현재의 캐나다가 성립되었습니다.
http://sheep.kangnam.ac.kr/~canada/history_1.htm
1863 - 미국 남북전쟁 최대 격전 '게티즈버그 전투'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은 1861년부터 계속된 남북전쟁에서 불패를 자랑했지만 언제나 조급하고 불안했다. 인구와 경제력 모두 북군에 뒤져 시간이 지날수록 남군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863년 6월 3일, 리 장군은 남북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결정적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북군의 근거지인 펜실베이니아주의 주도 해리스버그를 향해 북상했다.
7월 1일, 남군 7만5000명과 북군 8만3000명이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맞붙었다. 3일간의 대혈투 끝에 승리는 북군에게 돌아갔지만, 5만1000여명이나 되는 사상자가 나왔다. 지난 4년간의 200여회 전투에서 61만명의 사상자를 낸 것과 비교해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었는가를 짐작케 해주는 숫자였다.
이 전투는 짧게는 북군의 승리였지만 길게는 분열을 막아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진입시킨 발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개월 뒤인 11월 19일, 이곳의 전몰자 국립묘지를 방문한 링컨은 저 유명한 연설로 미국이 지향해야 할 참가치를 역설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땅에서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선
1847 - 미국 우정성, 세계 최초로 접착식 우표 발행
1818 - 헝가리의 산과 의학자 제멜바이스(Semmelweis, Ignaz Philipp) 출생
제멜바이스 [Semmelweis, Ignaz Philipp, 1818.7.1~1865.8.13]
오펜(현재의 부다페스트) 출생. 페스트대학에서 법률을 수학한 후, 1840년 오스트리아의 빈대학 의학과를 졸업하였다. 빈 종합병원에서 일하면서, 당시 제1산과에 유행하고 있던 산욕열의 원인을 구명하기 시작하여 진찰 횟수와 산욕열 발생률이 거의 비례함을 발견하고, 그 원인으로서 시체를 들고, 시체를 만진 의사의 손에 묻은 유기분해물질의 흡수에 의한 일종의 흡수열로 단정하여,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조산에 임하는 사람의 손을 염화칼슘액으로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47~1849년에는 염화칼슘액 소독으로 산욕열 발생률을 1/10로 감소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반대론자들에게 밀려나 1855년에 귀국한 후 부다페스트대학 산과학 교수를 역임하고, 1861년에 《산욕열의 원인 ·개념 ·예방》을 저술하였다. 빈 교외의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naver
1804 - 프랑스의 소설가 상드(Sand, George) 출생
상드 [Sand, George, 1804.7.1~1876.6.8]
프랑스의 여류소설가. 본명 오로르 뒤팽(Aurore Dupin). 파리 출생.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 프랑스의 베리주(州) 노앙에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16세 때 지방의 귀족인 뒤드방 남작과 결혼하였으나 행복한 결혼생활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두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와 파리로 옮겼다(1831). 그 후 친구의 권유로 신문소설 《앵디아나 Indiana》(1832)를 써서 일약 유명해지면서부터 남장차림의 여인으로 문인들 사이에 끼어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녀의 분방한 생활은 남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시인 뮈세와 음악가 쇼팽과의 모성적인 연애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상드의 창작 활동은 크게 4기(期)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1기에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처녀작 《앵디아나》나 《렐리아 L lia》(1833)와 같은 루소풍(風)의 연애소설을 썼고, 제2기에는 《콩쉬엘로 Consuelo》(1842)를 대표작으로 하는 일련의 인도주의적 사회소설을 썼다.
제3기는 어린 시절에 살던 추억 많은 노앙에 머물면서, 이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소박하고 선량한 농민의 생활을 그린 전원소설의 시기로서 《마(魔)의 늪 La Mare au Diable》(1846) 《기아(棄兒) 프랑수아 Fran ois le Champi》(1848) 《사랑의 요정 La Petite Fadette》(1849) 《피리 부는 사람들의 무리 Les Ma tres Sonneurs》(1853) 등의걸작을 발표하였다. 제4기는 만년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필력에 쇠퇴함이 없이 회상록 《내 생애의 역사 Histoire de Ma Vie》(1854∼1855)를 쓴 뒤, 원숙한 필치로 파리 상류사회의 연애를 다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의 일생은 모성애와 우애와 연애로 일관된 분망한 생애로서 그야말로 낭만파의 대표적 작가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편, 선각적(先覺的)인 여성해방운동의 투사로서도 재평가되고 있다. /naver
리히텐베르크 [Lichtenberg, Georg Christoph, 1742.7.1~1799.2.24]
독일의 물리학자·풍자작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거나 낭만적인 것에 대한 풍자로 유명하다. 개신교 목사의 17번째 아이로 태어나 아버지에게서 수학과 자연과학을 배웠으며 1763년 괴팅겐대학교에 들어가서 1769년 임시 물리학 교수, 1775년 정식교수가 되었으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교수직에 몸담았다. 지구물리학·화산학·기상학·화학·천문학·수학에 걸쳐 광범위한 분야를 연구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물리학에 대한 연구였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거대한 전기반(電氣盤)을 만들었으며 실험중 1777년에 현재의
건식복사의 기본원리를 발견했는데 그가 재생해낸 영상은 아직도 '리히텐베르크 영상'이라고 불리고 있다.그는 또한 풍자·해학 작가로서 18세기 독일 작가들 가운데 주요위치를 차지한다. 요한 카스파르
라바터의 관상학을 웃음거리로 만들었고, 요한 하인리히 포스의 그리스어 발음에 관한 견해에 대해 〈고대 그리스 얼간이들의 발음에 대하여 Über die Pronunciation der Schöpse des alten Griechenlandes〉(1782)를 써서 신랄하게 풍자하는 등 날카롭고 재치있는 풍자로 인해 당대 유명인사들과 많은 논쟁을 벌였다. 1769년과 1774년에 잠시 영국에 거주한 적이 있었는데, 그후 발표한 〈영국에서 온 편지 Briefe aus England〉(1776~78)는 가장 인기를 끈 작품이다. 그는 1778년부터 계속해서 〈괴팅겐 포켓 연감 Göttinger Taschenkalender〉 제작에 힘썼으며 〈괴팅겐 문학 및 과학 잡지 Göttingisches Magazin der Literatur und Wissenschaft〉를 만들어 J. G. A. 포스터와 함께 3년간(1780~82) 편집했다. 또 1794~99년 〈호가르티의 동판화에 대한 상세한 해설 Ausfürliche Erklärung der Hogarthschen Kupferstiche〉을 발간했다. /브리태니커
- Rochambeau, Washington, De Grasse
1725 - 미국 독립혁명을 지원한 프랑스의 장군 로샹보(comte de Rochambeau) 출생
로샹보 [comte de Rochambeau, 1725.7.1~1807.5.10]
프랑스의 장군.
1781년 프랑스군을 이끌고 버지니아의 요크타운 전투에 참가해 영국군을 물리치도록 도움으로써 미국 독립혁명을 지원했다.
로샹보는 원래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나중에 기병대에 입대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참가, 대령으로 진급했다. 1761년에는 준장과 기병대 감찰 장교가 되었으며 1776년에는 빌프랑슈앙루시용 시장이 되었다. 그후 4년 뒤에는 영국군과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는 식민지군에 합류하기 위해 6,000여 명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로샹보의 군대는 1780년 7월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에 도착해서 거의 1년 동안이나 프랑스 해군의 지원부대를 기다렸으나 지원부대는 오지 못했다. 결국 1781년 6월에 뉴욕의 화이트플래인스에서 조지 워싱턴 장군의 부대와 합류해 요크타운으로 돌진해갔는데 그곳에서는 라파예트 사령관이 이끄는 프랑스-아메리카 연합군이 영국군을 쉴새 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그라스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연합군은 콘월리스 경의 부대를 포위 공격해 요크타운 반도로 몰아넣었다가 10월 19일에는 콘월리스를 항복시킴으로써 전쟁을 사실상 끝냈다.
로샹보는 그후 1년간 더 버지니아에 머물다가 1783년 1월에 프랑스로 돌아갔다. 루이 14세는 평화에 대한 로샹보의 공적을 기려 그를 칼레 시(市), 이어서 알자스 지방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프랑스 혁명 때는 북부군을 지휘했고(1790~91), 1791년에는 프랑스의 육군 원수가 되었다. 공포정치 시기에 체포되었다가 단두대의 처형을 가까스로 모면했으며 후에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연금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라이프니츠 [Leibniz, Gottfried Wilhelm, 1646.7.1~1716.11.14]
라이프치히 출생. 외교관 ·정치가 ·기사(技師) 등 실무가로서도 유능하였다. 라이프치히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의 장서 중 철학 ·고전을 탐독하고 논리학에 흥미를 가졌다. 12세 때 거의 독학으로 라틴어에 통달하였고 1661년 15세 때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률과 철학을 수학, 이어 예나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였다. 이 무렵에 쓴 논문 《개체의 원리 De Principio Individui》(1663) 《결합법론 De Arte Combinatoria》(1666)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그 내용은 후일까지 그의 사상을 일관하였다. 1666년 라이프치히대학에 학위를 신청하였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1667년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으나, 이 대학이 제공한 객원교수의 자리를 사퇴하고, 그 곳에서 연금술사들의 결사 로젠크로이체르에 들어가 비서가 되어 화학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그는 마인츠후국(侯國)의 정치가인 J.C.보이네부르크 남작과 알게 되어 1670년 마인츠후국의 법률고문이 되었다. 정치생활에 들어가 마인츠후국의 외교사절로서 1672년 이후 파리에서 활동하였으며, 루이 14세의 침략으로부터 독일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면서도 형이상학을 연구하였다.
또 런던과 파리의 뛰어난 수학자 ·물리학자들과도 접촉하여 자연과학의 연구를 추진하였다. 《구체적 운동의 이론》 《추상적 운동의 이론》은 1670년경에 쓴 것으로, ‘불가분의 점(點)’의 가설에 서서, 운동을 물질의 본질인 것으로 보려는 형태를 취하였다. C.호이겐스, A.아르노, N.말브랑슈, R.보일 등과의 접촉에서는 당시의 최고 수준의 수학이나 데카르트 철학을 흡수하여 많은 논문을 쓰고, 영국 왕립학회회원이 되어, 그 후 우수한 계산기를 발명하였다(1674). 그러나 보이네부르크나 마인츠 선거후(選擧侯)가 잇달아 죽었으므로 그는 프랑스에 체류한 채 생활의 기반을 잃게 되었다. 프랑스 학술원의 연금을 받으려는 공작도 실패하여, 1676년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후(侯) 프리드리히의 초청을 받아들여 하노버로 갔다. 그 도중 스피노자와 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노버가(家)에서는 궁정고문이나 도서관리 등의 일을 맡아,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서 다면적인 활동을 하였다. 거기에는 공법학자 ·정치가로서의 활동, 독일 통일을 지향하는 신구 양 교회 및 신교 각파의 통일을 위한 노력, 《지구 선사(先史)》를 계기로 한 일반사의 연구, 언어 연구, 광산의 치수(治水)나 거기에 따른 풍차의 설계 ·건설, 백과전서의 계획, 아카데미 설립의 노력(1700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초대원장이 됨) 등이 포함된다. 이 밖에 그의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한 수학 ·자연과학 ·철학상의 연구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말년은 불우하였으며, 실의 속에 70세의 생애를 하노버에서 마쳤다.
수학에서는 미적분법의 창시(1684∼1686)가 유명하다. 이것은 뉴턴과는 별개로 전개된 것이며, 미분 기호, 적분 기호의 창안 등 해석학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역학(力學)에서는 R.데카르트를 비판하여 ‘활력’의 개념을 도입하고, 그 개념을 주어 역학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향해 커다란 진전을 남겼으며(1686), 위상(位相) 해석의 창시도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이다. 철학에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의 철학을 극복하고, 거기에 젊을 때부터의 ‘보편학’의 구상을 체계화한 《형이상학서설(形而上學敍說) Discours de M taphysique》(1686)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둘러싼 논쟁을 통하여 발전시킨 ‘표현’과 ‘표출’ ‘실체’ 개념의 결실인 유고(遺稿) 《단자론(單子論) Monadologia》(1720)이 유명하다.
실체개념을 논한 논문 중에는 ‘예정 조화(豫定調和)’의 개념을 도입(1696)하기도 하여 베일과의 논쟁을 초래하였다. J.로크의 비평으로서의 유고 《신인간오성론(新人間悟性論)》(1765)이나 《변신론(辯神論) Th e》(1710)도 유명하다. 그의 지우(知友)였던 프로이센 왕비 조피 샤를로테를 위해서 쓴 《변신론》은 예정 조화의 입장에서 철학과 종교의 융화를 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은 독창적인 것이었으나, 한편 신학적 ·형이상학적 요소(신과 예정 조화)를 지님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변증법적 요소(개별과 보편, 유한과 무한의 연관, 실체의 자립 개념 등)를 갖추고, 신앙고백과 논리적 논증이 공존하여, 기계론을 극복하려고 하면서 모순율을 기초로 하는, 말하자면 모순을 내포한 타협적인 것이었다. 그 배경을 당시 독일의 모순에 가득찬 사회적 생활에서 구하려는 견해도 있다. /nave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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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