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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전입과 위장취업의 사이 | ||||||||||||
-장관 인사청문회를 보며 "이 싸움의 전선은 '부도덕함'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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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저항시인 김수영은 그의 시 ‘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에서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고 탄식했지만, 위장전입, 세금탈루, 다운계약서 작성, 병역기피, 논문관련 의혹 등 각종 탈법과 편법 사실을 필수경력인양 안고 있는 인물들만 용케도 발탁하는 MB정권의 오만한 인사정책을 보며 이 싸움의 전선이 어디인지는 분명 깨닫게 된다. 그것은 ‘부도덕함’이다.
누구보다 ‘법치주의’를 강조하며 이른바 불법시위에 대해 참혹할 만큼 탄압했던 MB와 현 정권의 표리부동한 권력속성과 함께 이 나라 기득권 사회지도층의 성공신화 그 허구적 실체의 타락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만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특히 전혀 조합할 수 없을 것 같은 지식과 부가 이렇게 쉽사리 한 길에서 신분상승의 도구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과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그뿐인가. 인사청문회 대상 모두 예외 없이 탈법과 편법의 전문가이다 보니 아예 한나라당 장광근 사무총장의 입에선 “어려운 경제를 극복하려면 이제는 국민들이 위장전입에 대해서는 접어줘야 한다.”는 대국민 엄포까지 나오고 있으니, 그로인해 파생될 우리사회 전반의 도덕의식 해이를 염려치 않을 수 없다.
위장전입 내각..그리고 위장취업
‘고소영 강부자 패거리’로 불리는 MB정권의 좁은 인재풀에서 이루어지는 인사정책의 난맥상은 마치 제정러시아 말기의 ‘장관들의 왈츠’를 연상시킨다. 그 시절 극심한 민심이반으로 새로운 인물찾기가 불가능해진 짜르 정권은 각 부처 자리를 기존 장관들이 교대로 자리 바꿔가며 맡는 희극적 개각놀음으로 민심을 달래려 했으니, 이른바 ‘장관들의 왈츠’다.
‘위장전입 내각’이란 조롱까지 받는 MB정권의 실상을 보며, 문득 오래 전의 추억인양 뇌리 속에 간직되어 있는 ‘위장취업’이란 단어가 대비되듯 떠오르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지난 1970~80년대 혹독한 독재정권 시절,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는 노동자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노동현장에 투신했던 수많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 경제개발의 폐해가 드러나고 노동자들의 저항이 격화되면서 사회문제로 대두된 노동문제로 그들은 노동현실의 개선이야말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고 사회를 바로 세우는 지름길이라고 여겼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앞길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불꽃 청년 전태일의 분신 사건은 그 기폭제였다. 그는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자살을 기도하며 불길 속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절규하다 쓰러져 다음날 명동 성모병원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고도성장과 근대화의 환상에 젖어있던 그 당시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과 파장을 일으키면서 노동문제에 새롭게 눈뜨게 하였다.
그로부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어우러진 야학, 교회운동, 노동사목, 도시산업선교회 등 다양한 방식의 참여와 활동을 통해 이른바 노학연대가 심화되고, 위장취업을 통한 학생들의 현장진출은 기존 노동조합의 역량강화에 심대한 기여를 하였다.
학출노동자, 그 때 그 시절의 ‘불꽃여자 시몬느 베이유’였던..
그 당시 정권은 ‘학출 노동자’로 불렸던 그들을 이념적 불순세력으로 매도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노동현장에서 색출해내려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런 백척간두의 신분위험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이 투신한 노동현장에서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노동자들의 고통과 함께 하며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희망을 잃지 않고 치열한 삶을 꾸려 나갔던 그들은 그 때 그 시절의 또 다른 ‘불꽃여자 시몬느 베이유’였던 것이다.
물론 그 시절에 ‘위장취업’은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로 엄연한 불법행위였지만 거기엔 살신성인의 명분과 도덕적 정당성의 대의가 있었다. 그러기에 2년 전 대선 때 ‘전설적 위장취업 노동운동가’로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였던 노회찬 심상정 후보의 그 때 그 시절 무용담을 듣는 것은 지난 대선기간 내내 선거캠프의 기쁨이기도 했었다.
이는 단순히 투기를 통한 재산증식과 병역 기피와 자녀 교육의 목적 같은 지극히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불법과 편법을 예사로 여기며 쉽사리 ‘위장전입’을 했던 MB정권의 부도덕한 장관 후보들과 얼마나 대비되는가.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탈법과 편법 일삼기가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이 나라 기득권 지도층 신분상승의 필수과정으로 여겨지고 있다는데 있다.
‘높은 신분일수록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한다.’라는 뜻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까지야 기대하지 않는다 해도 사회지도층의 이러한 부도덕함은 바로 우리 사회의 건강도(健康度)에 치명타가 되어 돌아온다. 법 질서수호의 최고책임자인 장관 후보가 앞장서 법을 위반하고, 여성권익을 옹호해야 할 장관 후보가 투기꾼에다 병력까지 위조하며 아들구하기에 목숨을 거는 맹목여인에 지나지 않는 이 참담한 현실 속에 우리는 다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지극히 평범한 속담을 되돌아보게 되니, 그들의 임명권자 MB야말로 그들 이상으로 탈법과 편법의 귀재인 까닭이다.
위장전입의 달인에게서 석양대통령 기대할 수 없어
‘위장전입의 달인’인 부도덕하고 권력지향적인 대통령에게서 도덕적 흠결 없는 자들의 임명을 바란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 차라리 언제 읽어도 가슴이 따스해 오는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 ‘석양 대통령’이 다시 그리워지는 것은 단순히 문학적 감성만은 아니리라.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언제 우리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인간미와 인격의 순수한 향기를 내며 국민들에게 다가올 것이며, 국민이 본받고 싶어지는 그런 인품과 도덕성을 지니게 될 그날이 언제 다시 올 것인가.
사람이 홀로 갈 때 자기 그림자가 부끄럽지 않고, 우러러 볼 때에 하늘이 부끄럽지 않고, 굽어 볼 때에 땅이 부끄럽지 않을 때 비로소 진실된 삶을 살고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우리의 지도자가 그렇게 도덕적 양심에 바로만 선다면 이 나라도 바로 설 것이다. 참으로 그 옛날 김구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 신익희 선생이나 조병옥 선생 같은 고결하고도 넉넉한 인품이 그립기만 한 지금이다.
다시 김수영은 외친다.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 있다.” 어쩌면 우리의 싸움은 이렇게 다시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일까. ‘질긴 놈이 이긴다.’는 구호는 다시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부도덕함과의 싸움은 더욱 그러하다. 지금 우리의 전선은 과연 어디쯤에 와 있는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정중규 (다음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http://cafe.daum.net/bulkot)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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