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9.土. 맑고 바람은 쌀쌀
10월29일, 1박2일 지리산 사찰순례.
주차장에서 주차장까지.
천장사 일요법회 구성원인 우리들에게 서산 해미읍성海美邑城은 그저 서산지역의 잘 보존된 유형 문화재일 뿐만 아니라 사월초파일을 맞아 작년과 올해 2년 동안 주지스님을 모시고 서산불자들과 함께 연등축제를 봉행했던 자랑스럽고 성스러운 과거이자 미래인 곳이었다. 그래서 이번 가을 제2회 1박2일 성지순례 출발점을 이곳으로 삼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갑자기 곤두박질을 친 수은주가 두툼한 겨울맞이 옷을 불러들여 양말까지 두꺼운 겨울용으로 갈아 신고 아침 6시가 조금 덜 된 시간에 집을 나섰다. 서산 해미읍성 주차장에서 토요일 아침8시에 만나자는 공지가 올라왔으니 예정된 시간에 맞추어 출발을 한 것이다. 서해안고속도를 달려가는 도중에 서산휴게소에 들러 차에 연료도 가득 채우고 체조삼아 가볍게 몸도 움직여주었다. 해미IC를 지나 해미읍성의 높다란 담장이 건너다보이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차를 슬슬 몰아 주차할 장소를 찾으면서 우리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만큼 스님 한 분이 두툼한 겉옷을 입고 서있었다. 주지스님께서 일착으로 도착을 하여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서산의 두 보살님이 고북의 두 보살님을 모시고 도착을 했고 이어서 평택거사님 부부와 당진거사님 부부가 얼굴을 보여주셨다. 일차 목적지는 지리산智異山 천은사泉隱寺이고, 길을 가는 도중 천안-논산 고속도로의 탄천휴게소에서 만나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 여래자보살님과 묘광명보살님 옷이 다소 쌀쌀한 날씨에 비해 얇아 보여 춥지는 않으신지 하고 물어보았더니 괜찮다고 했다. 우리 차 트렁크에 여유분 겨울용 파카가 두 벌 들어있어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꺼내드릴 수 있기에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가벼운 손시림이 느껴지는 맑고 쌀쌀한 시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 날씨였다.
차를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차에서 내렸더니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휴게소 앞에 모여 있었다. 여름을 지나고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에는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서있는 모양이 훈훈하고 따스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서리가 하얗게 내린 풀밭이나 잡풀더미 가장자리에 참새 떼가 모여 앉아 깡총거리듯 돌아다니면서 먹이를 쪼아 먹고 있는 모습은 예전 겨울날 아침이나 오후의 대표적인 광경이었는데 이제는 어쩌다 시골에라도 가야지 볼 수 있는 드물고 귀한 볼거리가 되어버렸다.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 각자 음식을 시켰다. 역시 고속도로휴게소에서는 국물이 있는 우동이나 라면이 입맛을 당겨주었다. 쫄깃한 우동발에 국물이 시원해서 노란 단무지에 맛나게 먹었다. 서울보살도 식탁 저 끝에 앉아 라면을 시켜서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 집에서는 건강이나 영양을 이유로 이것저것 따져가며 음식을 해먹지만 일단 밖으로 나오면 먹고 싶은 것을 뭐든지 먹으면서 나에 대해 간섭도 그다지 하지 않는 편이다. 이를 테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있는 일탈逸脫은 모르는 척 봐주는 셈인 것이다. 가벼운 아침식사를 마치자 바로 지리산을 향해 출발을 했다. 지리산智異山 천은사泉隱寺는 한 삼십여 년 전에 친구 스님과 함께 한 번 가본 기억이 있으나 세세한 기억까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객실 숙소에 문창호지가 찢어진 곳이 있어서 밤새 모기에 시달렸었다. 그리고 아침에 겨우 눈을 뜨고 일어나 세면장으로 가서 세수를 하는데 팔등이 가려워서 쳐다보았더니 새까만 모기 한 마리가 다소곳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손을 치켜 올리려는데 모기가 눈치를 채고 휭 날아가 버린 팔등에 빨간 피가 한 방울 솟구쳐 올라와 있었다. 지리산 천은사 모기의 피 빠는 힘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붉고 강렬한 대목이었다. 그 전날 저녁식사는 친구스님의 도반스님 안내로 밖에서 하게 되었다. 그 스님께서 친구 거사님이 함께 오셨는데 이곳 명물인 수박향이 나는 은어를 맛보시라면서 나에게만 따로 음식을 시켜주었다. 구례 섬진강변에서 처음 먹어보는 은어에서는 정말 수박향이 솔솔 풍겨나고 있었다.
천은사 경내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바로 공양간으로 향했다.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전라도 사찰음식이었다. 주지스님을 모시고 일행들과 천은사 도량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성적문惺寂門을 지나 계곡을 따라 돌다리를 건너가는 방장선원方丈禪院으로 들어가 보았다. 方丈禪院이라는 현판도 그렇거니와 고아한 옛 향기가 뿜어나는 육중한 건물 채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안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방장선원은 선원으로서가 아니라 내부에 바람벽을 막아 칸칸으로 나누어 템플스테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훌륭한 선원을 폐廢하고 기껏 템플스테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방장선원이 너무도 안타깝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템플스테이 지도법사인 비구니스님께서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긍정적인 면으로도 생각해주시라고 말씀하셨다. 그 긍정적인 면이란 마음의 치유를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포교활동과 더불어 꼭 경제적인 수입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소탐대실小貪大失, 거인巨人을 가장 좀스럽게 써먹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를 보고 있는 듯해서 여전히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마치 지금 현존하는 한국불교의 어처구니없는 상징처럼 보였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었다. 방장선원의 명칭인 방장方丈은 지리산의 이명異名인 방장산方丈山에서 따온 것이리라. 중국전설에 나오는 삼신산三神山은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인데 각각 우리나라의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의 다른 이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덕숭산 수덕사 선원禪院인 정혜사에서 보았던 작은 보리수나무의 원적原籍인 몇 백 년 되었다는 천은사 보리수나무 앞에서 사진도 찍어보고 파란 가을 하늘빛 아래 그저 서있어 보기도 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래서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혹은 머무르기도 지나쳐가기에도, 마음을 붙이기에도 훌훌 놓아버리기에도 거칠 것이 없어 보이는 천혜天惠의 수행처 천은사가 기껏 도로통행료의 시빗거리나 되고 있는 2016년 10월29일의 가을빛이 몹시도 슬퍼보였다. 아마 천은사 어깨너머로 웅크리고 선 한국불교가 너무도 처량하게 보여서일 것이다. 애당초 사명寺名을 천은사天恩寺라 이름을 짓지 않고 천은사泉隱寺라고 한 옛 어른들의 예지력豫知力이 가슴을 후려치는 서늘한 바람이 되어 몰려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