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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의 고향 길
추석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조상의 묘를 돌아본다. 여름내 무성하게 자란 풀을 잘라내며 영역을 넘나드는 나무를 뽑아내고 가지치기를 한다. 또한 허물어진 곳을 다독거리며 벌초라는 이름으로 전국이 들썩거린다. 우리 집안은 아산이 집성촌으로 자손들이 같은 날 모여 함께 벌초를 한다. 단순히 산소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각지에 흩어져 사는 자손들이 한 자리에서 일 년을 이야기하며 나눌 수 있는 축제로 백 명쯤 모인다. 조상님의 묘를 깎는다. 덥수룩한 풀과 나무를 깎고 긁어 새롭게 단장한다. 머리를 깎고 목욕을 하는 셈이다. 일 년을 자르고, 그리움을 자르고, 기다림을 자르고, 한 해의 아픔을 자르고, 허황된 잡된 마음을 자른다.
때로는 바람까지도 자른다. 풀숲에 개구리며 메뚜기, 방아깨비, 귀뚜라미가 깜짝 놀라 튀어나온다. 지렁이가 나오고 거미집이 부서지기도 한다. 새집도 있고 벌들이 시위를 벌리지만 예초기에 가차 없이 잘려 나간다. 어쩌면 이들 모두가 묘의 주인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인데 느닷없이 예초기 칼날을 들이대 혼비백산 시키는 것은 아닌지. 저처럼 처참하게 쫓아버리면 외관은 깔끔해도 조상님이 외로움을 타게 되는 것은 아닌지. 아직은 땡볕 속에 땀을 뻘뻘 흘리지만 함께하는 예초기 소리며 갈퀴질소리며 마음과 마음이 전해져 속삭이는 정겨운 소리에 자연의 소리까지 뒤섞여 어우러진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한다.
벌초가 끝나면 느티나무 밑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한다. 느티나무는 마을의 유래만큼이나 오래된 마을지킴이다. 집집마다 속을 훤히 꿰뚫어보듯 오가는 사람을 지켜보며 마을의 애환을 고스란히 품은 추억속의 나무다. 누가 취직을 하고, 누가 군대를 가고, 누가 공부를 잘하고, 누가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고, 누가 사업을 잘하여 돈을 많이 벌었는지 자랑을 늘어놓는다. 뿐만 아니라, 누가 아프고 누가 고생하는지 아쉬움을 갖게 한다. 할아버지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손자도 있다. 그래도 촌수가 있어 누구네 누구라고 하면 위아래가 정해져있어 금세 질서를 찾는다. 단순히 연륜의 나이가 아닌 촌수의 항렬이 있어 조심스러운 핏줄이다.
멀리 흩어져 살아가면서 가는 길이 다르고 바라보는 방향이 달랐어도 그 뿌리는 하나임에 틀림없다. 비록 같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닐지라도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살아가며 그 뿌리를 부인할 수 없음이다. 풀들도 같은 풀끼리 자라고 나무도 같은 종류끼리 모여서 군락을 이룬다. 그 중에도 산죽 같은 나무나 억새 같은 풀은 아예 다른 종족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뿌리가 뒤엉켜 자신들만의 영역을 확보해가고 있다. 저 풀이 잘리면 다시 일어서거나 움터 뿌리내리며 아픔을 딛고 일어서 질긴 목숨을 이어가듯이 어제가 오늘로 내일이 오늘처럼 버젓이 몫을 다하고 지켜낼 것이다. 이처럼 자연은 의구하고 발걸음은 반복될 것이다.
오늘 하루 조상님에서 뿌리에 종친을 되새기며 가족을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고향을 찾고 농촌을 찾고 산자락을 찾아 자연 속에 묻혀 매미소리 새소리를 들어가며 곤충들을 눈여겨보고 따가운 햇볕을 쬐었다. 조상님의 산소를 찾아 추모하고 뿌리를 되새김하며 일가친척을 만나는 그 자체가 미풍양속이다. 어디 다달이 만나는 친목모임에 비하랴. 이것저것 따지느라 좀은 피곤하지 싶어도 하나의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어쩌다 처음 만났어도 낯설지 않다. 핏줄이기에 그 어딘가에 그 느낌이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날을 되새겨보며 풋풋함에 젖는다. 하루쯤 도심을 떠난 농촌체험이었고 여름을 툭툭 털며 준비하는 가을맞이다. 짬 내어 외암민속마을 돌담길을 걷고, 같은 설화산 자락 고불 맹사성 고택 청백리 행단을 돌아보고, 온양온천 장영실과학관을 찾고, 이충무공의 현충사를 참배하고, 신정호를 거닐며 고향의 뿌리를 가슴에 담아두었다. - 2016. 09.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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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여 명쯤 모이면 대단하네요. 한 뿌리임을 알고 대소사를 확인하는 일이 벌초 이상의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부럽습니다^^*
아산 외암마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박종국 선생님네 고향 부근이로군요. 잘 읽었습니다. 자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