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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터프가이, 험프리 보가트 (퍼 옴) ●본 Classic Movie Stars Series 는 기자 브로그에서 퍼온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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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Time Goes By In Casablanca - sung by Andy Williams
Humphrey Bogart (1899. 12. 25 ~ 1957. 1. 14)
*** 1957년 1월 14일, '카사블랑카(Casablanca)'의 영원한 로맨틱 히어로(romantic hero), 험프리 보가트는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당시 프랑스의 영화평론가였던 프랑소와 트뤼포(Francois Truffaut)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험프리 보가트의 초상’이라는 글에서 그를 최초의 '모던한 영웅(a modern hero)'으로 묘사하며 고인에 대한 열렬한 존경심과 더불어 절절한 애도의 심정을 드러냈다. 그의 영웅적 이미지는 그러나 두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외양은 현대적인 모습이었지만, 그가 간직한 도덕성은 고전적인 것이었다. 보가트는 실천적 행위가 그것의 당위를 설명하는 이유 자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는 행동주의자였으며, 모든 행위는 규칙을 따르는 한 순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원칙주의자였기도 하다. 보가트는 영화계에도 맹렬한 기세로 불어닥친 매카시즘의 광풍과도 의연히 맞서 싸우며 자신의 대표작들을 성실히 만들어 나가는 열정을 늘 잃지 않았다. 처절한 암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 돼 버린 '비정의 링(The Harder They Fall)'을 무사히 완성시키고, 의연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한 진정한 터프가이의 표상이었다. 우리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돼 있는 이러한 그의 이미지는 바로 그가, 영화 속에서의 강인한 인상과 실제 삶의 모습이 일치하는, 몇 안 되는 독보적인 배우였기 때문이다. 포효하는 사자처럼 거칠게 방황하던 내 청소년기에 그는 내게 다가와 '진정한 남자다움'이라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아주 명징히 가르쳐 준 내 인생의 영원한 스승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감당키 힘든 '삶의 무게'가 나를 엄습해 올 때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하늘을 보며 나즈막한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 본다. "보기(Bogie), 이럴 때 님은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라고... 그러면 이내 나의 결단은 내려지게 된다. 늘 강인해져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이 무한경쟁의 세상 속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도 언제나 '관용의 미덕'을 잊지 말라는 그의 '아버지'와도 같은 다정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리기 때문이다. 언제 시간이 나게 되면, 내 인생의 영원한 페르소나 그라타(persona grata), 험프리 보가트 '선생님'의 묘소를 찾아가, 고인(故人)이 좋아하시던 '위스키' 한 병과, '불붙인 담배 한 개비'를 올려 놓고 배례를 하고 오련다. 하하, 그 날은 비나 실컷 내렸으면 좋겠다.
*** 2004년 11월 6일 22시 10분, 작성자 : 홍 경 오 (falcon 82) ***
Dooley Wilson & Humphrey Bogart In Casablanca (1942)
지금 흐르고 있는 이 테마 곡은 영화 'Casablanca'를 영원한 전설로 남게 하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한 불멸의 재즈 명곡, 'As Time Goes By'다. 한데 많은 사람들이 크게 잘못 알고 있는 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이 영화에서 이 곡을 부르는 가수를 루이 암스트롱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가수는 암스트롱이 아니라 둘리 윌슨(Dooly Wison)이었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 릭 블레인(험프리 보가트)의 충실한 심복이자, 릭(Rick)이 - 사랑했던 여인 일자(잉그리드 버그만)와의 파리에서의 이별의 상처를 안고 전운이 감도는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 개업한 카페의 피아노 뮤지션, 샘(Sam)으로 등장한다. 그는 영화배우이면서 동시에 드럼싱어로도 활동했는데 이 영화, 카사블랑카에서는 테마곡 'As Time Goes By' 이외에도 'Knock On Wood'와 ' It Had To Be You' 등 여러 곡을 멋지게 연주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한데 여기에는 아주 재미있는 비화(秘話)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그가 보여준 그 능숙한 피아노 연주 솜씨가 한 마디로 완전히 '연기' 그 자체였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노래만 불렀을 뿐 실제로 피아노 연주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척 하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동안 실제로는, 커튼 뒤에서 엘리엇 카펜터라는 사람이 그를 대신해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더빙기술'이 아직 개발돼 있지 않았던 터라, 그런 촌극을 부득불 연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걸로 사료된다. 또한 샘이 들려주는 이 노래 'As Time Goes By'는 본래 1931년 Herman Hupfeld에 의해 'Eberybody's Welcome'이라는 브로드웨이 쇼 공연에서 연주된 곡이었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카사블랑카'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릭의 카페에 들어선 일자(잉그리드 버그만)의 요청에 못 이겨 샘이 이 곡을 연주하는 장면과, 옛사랑을 못잊어 괴로워 하던 릭이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 Play it, Sam" 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불멸의 씬(scene)로 우리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특히 파리에서의 일자와의 짧지만 깊었던 사랑의 추억에 고뇌하는 릭의 귓가로, 피아노 소리와 함께 현악기의 선율이 더해지면서 다가오는 이 곡의 진한 센티멘탈리즘은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 Postscript : 이 곡은 또한 탐 행크스와 멕 라이언이 주연한 '씨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의 삽입곡으로도 쓰여, 카사블랑카를 잊지 못하는 많은 영화 팬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그리고 지금 흐르는 이 곡을 부르는 가수는 '앤디 윌리암스(Andy Williams)'인데, 필자가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안 깔고 굳이 '앤디의 버전'을 이 포스트의 배경음악으로 삽입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이 가수가, 보가트의 또 하나의 불멸의 걸작인 '소유와 무소유(To Have And Have Not)'에서 매력적인 히로인(heroine)으로 등장하는 로렌 바콜(Lauren Bacall)의 , '노래하는 장면'의 목소리 더빙을 해 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여배우가 부르는 노래의 '목소리 더빙'에, 여가수가 아닌 남자가수를 쓴 이유는, 바콜의 목소리가 본래 약간 굵은 저음이었다는 사실과 연관이 깊다.
Humphrey Bogart In Casablanca (1942)
Paul Henreid, Ingrid Bergman, Claude Rains And Humphrey Bogart In Casablanca (1942)
'Casablanca'라는 이 전설적인 걸작 클래식 무비에 나오는 주인공, 릭 블레인(험프리 보가트)은 일견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인물로 비치지만, 알고 보면 매우 도덕적인 삶의 규범에 입각해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는 따뜻한 인간미의 소유자다. 또한 그는 저항운동가인 라즐로에게 줄곧 시니 컬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종국엔 正義와 자유의 구현을 위해 평생을 몸바쳐 투쟁해 온 그의 신념에 담긴 진정성을 인정하고 그의 탈출을 돕는다. 릭은 바로 내가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보수의 전형이다.
Humphrey Bogart In Passage To Marseilles (1943)
이 영화에서는, 앙드레 지드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전원 교향악'에서 고혹적인 매력을 한껏 발산한 바 있는 프랑스 여배우 미셸 모르강이 그의 연인으로 나왔다.
보기(Bogie : 보가트의 애칭)는 미 해군에 자원 입대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당시 그가 탔던 구축함, 레비아탄 호(號)가 독일군 잠수함의 어뢰를 맞은 일이 있는데, 그 때의 충격으로 그는 윗 입술이 크게 찢어지는 중상을 입게 된다. 한데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그의 터프한 이미지를 제고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 때문에 보가트의 발음은 매우 독특하게 들린다. 필자 역시 대한민국 해군 출신이며 구축함(D.D) 및 고속정(P.K.M) 이 3년 동안 아늑한 내 집이었다. 가끔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진다. 바다가 나를 부르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1997년 미국에서 발매된 보가트 기념우표에 들어 있는 사진이다. 'Up The River'에서 그의 평생의 친구였던 스펜서 트레이시와 공연할 당시인 30대 초반의 아주 젊은 모습이다. 필자도 이 기념우표를 소장하고 있다.
험프리 보가트 기념우표 (1997)
Lauren Bacall & Humphrey Bogart In To Have And Have Not (1944)
헐리웃 스타의 광장에서 동판에다 자신의 이름과 육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보가트.
Humphrey Bogart 와 Alan Ladd가 한 TV 쇼 프로그램에 출연한 진귀한 장면이다. 두 배우가 모두 'Box Office' Top 10 안에 들 만큼, 일생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을 때인 1947년 경에 찍은 사진이다.
영화 'To Have And Have Not'에서 함께 주연을 맡으면서 사랑이 싹터, 무려 25년이라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한 보가트의 영원한 연인, 여배우 로렌 바콜(Lauren Bacall)과, 그녀와의 사이에서 나이 50에 얻은 귀한 아들, 스테판 보가트(Stephen Bogart)와의 단란한 한 때. 보가트와 바콜의 사랑은 지금까지도 '세기의 로맨스'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George Raft & Humphrey Bogart In They Drive By Night (1940)
이 영화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두 형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험프리 보가트의 십여년 간에 걸친 서러운 무명배우 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된 작품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를 끝으로 보기(Bogie)는,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가트는 이후 마이클 커티스, 하워드 혹스, 존 휴스턴, 니콜라스 레이 등 당대 최고의 감독 들과 호흡을 맞추며 영화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걸작들을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줄줄이 쏟아내기 시작한다. 사진의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에게 들어 온 주연제의를 거부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보가트에게 '인생 대역전'의 결정적 단초를 만들어준 것이나 진배없는 조지 래프트이다.
Ida Lupino & Humphrey Bogart In High Sierra (1941)
보가트를 비로소 진정한 스타의 반열에 올려 놓은 걸작 갱스터 무비, 하이 시에라(High Sierra : 1941) .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영화계에 데뷔했으나, 트레이시가 데뷔 즉시 대스타가 된 반면, 보가트는 오랜 세월을 무명에 가까운 조연배우 내지는 고작해야 B급 영화의 주인공으로 - 그것도 아주 잔인하고 비정한 갱역 전문으로- 보내야만 했다. 한데 그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찾아 왔다. 바로 조지 래프트가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든다고 출연을 거부한 이 작품의 주연 제의가 들어왔던 것이다. 소속사였던 워너 브라더스의 제작자들과도 뜻이 안 맞으면 늘 "한 판 붙자"는 식으로 당당히 맞서곤 했던 그였기에, 당연히 소속사 간부 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제작비 지원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크랭크 인'에 들어갔다. 따라서 많은 영화 관계자들은 이 영화의 흥행은 아예 기대조차 않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공전의 빅히트를 치면서 마침내 전설적인 보가트 시대의 서막을 열게 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이미 42세를 넘기고 있었다. 한 마디로 보가트는 대기만성의 전형이라 하겠다. 필자의 블로그 타이틀은 바로 이 영화의 제목에서 따 온 것이다.
Humphrey Bogart In High Sierra (1941)
로렌 바콜과 함께.
Humphrey Bogart & Tim Holt In The Treasure Of The Sierra Madre (1948)
이 영화는 필자가 일전에 격문, '박정희를 위한 진혼곡'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작품으로서, 험프리 보가트가 일생 일대의 명연기를 보여준 걸작이다. 따라서 세계의 내로라 하는 일류 영화 비평지들도 이 영화를 '세계 영화 걸작 베스트 10'의 반열에 올려 놓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잭 트레이븐(Jack Traven)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거장 죤 휴스턴이 이 괴짜 작가의 요구를 100% 수용해 별도의 각색 없이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해 내었다. 보가트는 이 작품에서, 물욕(物慾)에 눈이 멀어 점차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자기 파괴적인 인간, 프레드 돕스(Fred Dobbs)를, 그가 아니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눈부신 연기로써 절묘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당시 'Santana'라는 이름의 개인 프로덕션을 설립해 독자적인 영화제작을 도모하고 있던 보가트에 대한, 제작사인 워너 브라더스 측의 견제로 말미암아, 오스카 남우주연상에는 후보로서조차 못 오르는 불운을 겪게 된다. 따라서 당연히 그의 수중으로 돌아갔어야 할 그 해의 오스카는 '햄릿'에서 열연한 로렌스 올리비에가 거머쥐게 된다. 하지만 보가트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그로부터 정확히 3년 뒤인 1951년에 이를 멋지게 설욕하고야 만다. 그가 남긴 또다른 불멸의 마스터피스인 '아프리카의 여왕(The African Queen)'이라는 작품에서, 또 한 번의 찬란한 명연기를 펼쳐 보임으로써, 평생을 꿈꿔 왔던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마침내 수상하는 영예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의 나이 52세 때의 일이다. 그리고 그는 애석하게도 그로부터 5년 뒤 영면하게 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9살 짜리 아들 스테판과 7살 짜리 딸 레슬리, 그리고 너무도 사랑했던 33세의 젊은 아내, 로렌 바콜을 남겨 두고...
그는 별세하기 전, 아내와 친지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나를 화장하여 그 유골을 내가 사랑해 온 나의 진정한 고향, 태평양 한 가운데 뿌려 다오..." 라고... 그러나 이 유언은 그의 가족들과 수 많은 보가트 팬들의 반대로 이행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입관(入棺)시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특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평소에 자신의 아내를 'Kid(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애기야' 쯤 될 것이다.)'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보가트를 위해, 그의 아내 바콜이 '호루라기' 한개를 그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 속에 부장품(副葬品)로 넣는 모습이 목도된 것이다. 이를 본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하지만 얼마 후 그 의문은 풀렸다. 그 '호루라기'는 바로, "제가 보고 싶으실 때면 언제든지 그 호루라기를 불어 주세요, 그럼 제가 님께로 달려 갈 테니..." 라는 의미로, 바콜이 보기에게 연애시절 선물한, 그래서 보기(Bogie)가 늘 소중히 간직해 왔던 그의 영원한 마스코트였던 것이다. 재삼 보기(Bogie)의 명복을 빈다.
사브리나(Sabrina : 1954)에서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과 공연한 보가트.
Humphrey Bogart & Audrey Hepburn In Sabrina (1954)
맨발의 백작부인(The Barefoot Contessa : 1954)에서 에바 가드너(Eva Gardener)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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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래간만입니다. 왕눈이님! 흐르는 노래와 곡이 참 감미롭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젊었을 때 험프리 보가트가 나오는 영화를 다만 몇편이라도 보아 둘걸 그랬습니다. 그랬으면 한결 감회가 짙었을텐데 말입니다... 칼라물 보다 흑백이 더 정겹네요. 좋은 그림과 음악 잘 감상했습니다. Thank you.
카사부랑카 참 좋은 영화 였는데 고맙습니다. 보고 보고 또 본 영화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