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형(李秀亨)
출생 1435년
사망 1528년 1월 24일 (94세)
조선 경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사제동
사인 : 병사(노환)
거주지 : 경기도 한성부->경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별칭 : 자(字)는 영보(英甫), 아호(雅號)는 도촌(桃村), 공북헌(拱北軒)
학력 : 한학 수학
부모 : 이경창(부), 순흥 안씨 부인(모)
배우자 : 증 정부인 예안 김씨
자녀 : 이대근, 이준근, 이성근, 이양근, 손씨에게 출가한 딸 1명 등
친척 : 문절공 김담의 사위, 송석충의 사돈[1]
이수형(李秀亨, 1435년 ~ 1528년 1월 24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시인, 학자이다.
세조의 단종 폐위 및 처단에 분개하여, 처가의 본가인 봉화군 도촌으로 낙향하여 일생을 마쳤다.
음보로 관직에 올라 선교랑(宣敎郞) 전생서령(典牲暑令)을 거쳐 조봉대부 평시서령(平市署令)이 되었다.
1455년(단종 3년)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봉화군 도촌리로 은거하였다.
원호, 조여 등과 함께 영월에 유배된 단종에게 문안인사를 드렸다.
세조는 사람을 보내 회유하였으나 거절하였고,
단종이 사사되자, 단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산으로 들어가 삼면은 벽이고 북녘으로 문이 있는 집을 짓고 평생을 숨어 살았는데,
이는 단종의 장릉이 영천의 북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1476년(성종 6) 다시 작첩이 내려졌으나 거절하였고, 일생동안 단종을 추모하였다.
봉화읍 도촌리에 그가 손수 심은 괴화나무를 심었는데,
그가 죽자 따라 고사하였다가 1715년(숙종 41) 단종이 노산군에서 임금으로 복위되자 괴화나무가 소생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사후 철종 때 경상도암행어사 임응준(任應準)의 상소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가
고종 때 다시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가증되었다.
무송헌 김담의 사위이자 문인이다.
본관은 우계이며 자(字)는 영보(英甫), 호는 도촌(桃村), 공북헌(拱北軒)이다. 한성부 출신이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2 은거 생활. 1.3 생애 후반. 1.4 사후
2 가족 관계
3 저서 및 작품 3.1 저서. 3.2 시
4 에피 소드 4.1 괴화나무 전설. 4.2 공북헌
5 기타 5.1 관련 유적
6 같이 보기. 7 각주. 8 관련 자료. 9 참고 문헌
생애
생애 초기
도촌 이수형은 1435년(세종 18년) 고려후기의 문신 이억(李嶷)의 증손 군자감주부 이경창(李景昌)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직제학으로 증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된 안구(安玖)의 딸이자 안지귀의 누이였다.
문절공 김담의 문인으로, 그의 맏사위이자 문하생이었다.
형제간으로는 이말형과 직강 정이득에게 출가한 누이 등이 있었다.
그의 고조부 이억은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 1388년 강계원수 재직 중 요동 정벌에 참여하였으나 이성계가 회군한 후, 1392년 7월 조선을 건국하자 개국원종공신 1등과 중추원부사 겸 의흥친군위동절제사 직을 수여했지만 받지 않고 순흥 소백산으로 낙향하였다.
증조부 이만은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 홍로부사, 인진사, 사재감 등을 거쳐서 중추원부사가 되었는데,
훗날 봉렬대부 호분위경력으로 강등되었다.
할아버지 이인숙은 사정, 경력을 거쳐 1433년 통훈대부 지덕천군사[2], 판사복시사를 역임했다.
아버지 이경창은 사정, 직장, 봉렬대부 군자감주부를 역임했다.
17세에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선교랑 전생서령(宣敎郞 典牲暑令)을 거쳐 조봉대부 평시서령(朝奉大夫 平市署令)이 되었으나,
단종 임금이 권신들의 강압에 의해 삼촌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자, 그는 21세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3]
이후 청령포를 찾아 단종에게 문안인사를 다녔고,
관란 원호(觀瀾 元昊), 어계 조여(漁溪 趙旅) 등과 함께 영월 수주면의 무릉계곡(武陵溪谷)에서 자주 만나 단종의 안위를 염려하였으며[4]
원주 치악산에 올라 충절을 맹세하여[3]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바위에 이름을 바위에 새기고 내려왔다.[4]
은거 생활
삼공제명암, 세조 찬위, 단종 복위 운동, 정축지변, 공북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 뒤 처가가 있는 경상북도 봉화군/영주 도촌으로 낙향, 은거하였다.
세조와는 등극하기 전에 교분(交分)이 두터웠던 사이라 세조는 여러번 사람을 보내 식물과 전답을 하사(下賜)하고 힘껏 등용하려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절의(節義)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순흥부 주민들을 처형하고, 부를 현으로 강등시켜버리자 그도 피신한다.
1457년 단종이 사사되자 단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성복애모하였고 일생을 단종을 추모하며 나가지 않았다.
이후 그는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삼면은 벽이고 북녘을 향한 집을 세우고 거주하였다.
북녘은 단종의 능침인 영월 장릉이 있는 방향이다.
후에 충재 권벌의 6대손 창설 권두경(權斗經)이 이곳을 들렀다가 이수형의 그런 충절에 감읍하여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의 높고 깊음을 기려 방을 천인실(千仞室)이라 하고,
눌은 이광정은 마루는 두 손을 잡고 평생토록 단종을 경모했다는 뜻에서 공북헌이라고 명명하고[5] 행장과 유기를 남겼다.
생애 후반
그는 장인인 김담 외에도 원호(元昊)‚ 조려(趙旅)‚ 송석충(宋碩忠) 등과 교유하곤 했다.
그는 자신이 은거한 공북헌 옆에 괴화나무를 하나 심었다. 그는 손수 심은 괴화나무 주변을 산책하며 시문을 읊기도 했다.
1476년(성종 7년) 성종 때 다시 직위와 작첩이 내려졌으나[6], 받지 않고 거절했다.
70년을 단종을 추모하며 한성으로 상경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도촌선생실기》(桃村先生實紀)와 《괴단감광록》 (槐壇曠感錄)이 있다.
1528년(중종 23) 1월 4일 도촌 사제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향년 94세였다.
사후
경상도 순흥부 동원면 흑석리의 동북쪽 간방(艮方) 동원면 오상리(현,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동원리) 오상(五相)부락에 묻혔다.
후일 고심당 조정융(趙廷瀜)이 지은 상향축문에 이르기를
'고요한 심지는 자취가 없으나 완부를 절조가 고결한 사람으로 윤이로 돌아간 도잠 연명과 같이 밝은 풍도가 있다' 고 하였다.
묘는 경상북도 풍기군(현 영주시) 단산면 동원리 오상동 흑석곡 간좌에 안장되었다.
공주 동학사
사후 사림에 의해 충청도 공주군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고,
1608년(광해군 2년) 경상도 순흥 지역 사림들과 유지들의 공의로 순흥 도계서원에 금성대군 이유,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그러나 대원군 집권때 서원 철폐정책에 의해 철폐되어 건물만 남아 있다. [3]
1858년(철종 9년) 경상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학사 임응준(任應準)의 상소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承鄭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가[3] 고종 때인 1870년(고종 7년) 12월 24일 다시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7][3]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官)에 추증되었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이인숙(李仁淑, 지덕천군사와 판사복시사 역임)
할머니 : 해주 오씨, 지인천군사 증 정헌대부 오부(吳傅)의 딸, 좌의정 경주이씨 이성중의 외손녀
아버지 : 이경창(李景昌, ? ~ ?, 봉렬대부 군자감 주부)
어머니 : 순흥 안씨(順興安氏, 안구(安玖)[8]의 딸, 안지귀의 누이
부인 : 증 정부인 예안김씨(? ~ 1558년 8월 27일, 문절공 김담의 장녀)
아들 : 이대근(李大根[9], 홍천현감)
자부 : 안동 권씨, 증판서 권황의 딸, 권벌의 고모 손자 : 이양
손자 : 이당
손자 : 이영(李榮, 1492년 ~ 1583년), 호는 북산(北山), 가선대부 병조참판 지냄
아들 : 이양근, 전설서 별좌 역임
아들 : 이성근, 감역 손자 : 이공, 어모장군 행 권관
아들 : 이준근, 참봉
자부 : 야성 송씨, 눌재 송석충의 딸
손자 : 이은, 참봉
손녀 : 이씨, 덕수 이씨 이귀의 처
외할아버지 : 안구(安玖, 직제학 증 좌참찬)
장인 : 김담(金淡, 1416년 ~ 1464년), 이조판서 역임, 시호는 문절(文節) [10]
저서 및 작품
저서《도촌선생실기》(桃村先生實紀) 《괴단감광록》
시
允矣訥言子(윤의눌언자) / 진실하였도다 눌은자여
兢兢守以遇(긍긍수이우) / 어리석은 사람인 양 삼가고 조심하였네
父師竟畢老(부사경필노) / 아비는 경산자요 스승은 점필재선생
交友?暄徒(교우두훤도) / 일두와 한훤당과 교게하였다네
修道介于石(수도개우석) / 도를 닦아 개결한 돌과 같았고
蘊才器也瑚(온재기야호) / 품은 재주 호련과 같은 좋은 그릇이었네
一生移病盡(일생이병진) / 일생을 병 핑계 삼아 마쳤으니
心迹足長?(심적족장우) / 그 마음과 자취 길이 탄식만 자아내네
에피 소드
눌은 이광정 친필 공북헌 현판
괴화나무 전설
그가 공북헌에 거주할 때 손수 괴화나무를 심었다.
그는 그 괴화나무를 보며 시름을 달래고, 시문을 읊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수형이 사망하자 그가 심었던 괴화나무도 함께 고사했는데,
1715년 조선 단종이 복위되자 괴화나무도 함께 소생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 뒤 괴화나무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고사되었다가 다시 되살아났다.
공북헌
단종이 사사되자 그는 3년동안 상복을 입고는 삼면은 벽이고 오직 북녘을 향해 문이 있는 집을 짓고 은거했는데,
이는 단종의 능침인 영월이 영천의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70년간 단종을 추모하며 공북헌 앞 괴화나무를 벗삼아 시를 읊으며 몇몇 선비들과 교류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94세를 일기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한성에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
기타
그의 이름자 수형(秀亨)의 오기로 이수정(李秀亭)으로도 전한다.
관련 유적[편집]
공북헌
원주 치악산 삼공제명암
순흥 도계서원
영월 수주 요석정
공주 동학사 숙모전
자료출처 : 위키백과
------------------------------------------
추기 : 2019.01.17. 16:01
이수형의 향리 도촌의 지명유래
도촌1리- 지명 : 사제(沙堤)
이 마을은 1450년경에 平時署令(평시서령) 挑村(도촌) 李秀亨(이수형)이 개척한 마을로서
그 후손 우계 이씨들의 집성촌이며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산다고 중국의 산촌 지면을 쫓아 武陵桃源(무릉도원)이라 부르다가
이수형선생이 도학을 숭상하였다 하여 마을 명칭을 도지미(道知味)라고 고쳐 불렀으나
어느해 낙화 암천이 수해로 범람하여 마을이 온통 모래로 뒤덮여
주민들이 모래로 제방을 막고 큰비가 오면 모래제방을 근심하였다하여 사제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출처 : -봉화관광홈-문화유산-지명유래
------------------------------------------------------------------
이수형(李秀亨) :
자는 영보(英甫), 본관은 우계(羽溪). 도평의(都評議) 이억(李薿)의 현손이다.
선대에 서울에서 살았는데, 공이 김문절공(金文節公 김담(金淡))의 딸에게 장가들어 비로소 도촌(桃村)에서 살게 되었다.
이 고을에서 번성한 우계이씨(羽溪李氏)가 모두 공의 후손들이다.
벼슬은 전생서령(典牲署令)에 이르렀다.
공의 현손 이여빈(李汝馪)이 지은 《영주지(榮州志)》에 보인다.
동암(東庵) 권성오(權省吾)가 지은 〈유사(遺事)〉에서,
“경태(景泰) 을해년(1455, 세조1)에 공의 나이 22세였는데 세조(世祖)가 왕위를 이어받았고, 그 이듬해 육신이 죽으니, 공은 드디어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귀성(龜城)의 도촌(桃村)에서 살았다. 생각해 보면, 공은 당시 한창 나이로서 벼슬을 그만둘 때가 아니었고, 또 세조와는 임금이 되기 전에 인연이 있었는데도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렸으니, 필시 남이 알 수 없는 은미한 뜻이 있었을 것이다. 세조조에서 벼슬에 제수한 적은 없었지만 음식을 하사한 것이 있었으니, 아마도 그의 높은 뜻을 벼슬로 굴복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묘갈 음기(陰記)에서,
“세상에서 전하기를 ‘공이 21세에 평시서령(平市署令) 관직을 버리고 도촌(桃村)으로 내려와 살았다.
그때가 바로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한 해였으니, 그 뜻이 은미하고 그 행적을 숨긴 것이다.
공은 세조의 특별한 대우를 받아 돌아온 뒤에도 항상 방백에게 음식을 내렸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였다.
당시에 벼슬살이를 의롭게 여기지 않고 멀리 떠나 행적을 감춘 이로는
원관란(元觀瀾 원호(元昊))과 조어계(趙漁溪 조려(趙旅)) 같은 이 6명을 일컫는데,
그 자취가 모두 드러나지 않아 지금에 상세히 알 수 없다.
그 중에서도 공과 문절공(文節公)은 드러나지 않은 것이 더욱 심하다.
문절공의 경우는 몇 구절의 시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나, 공의 경우는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다만 약관의 나이에 벼슬을 버린 것은 무슨 이유이며, 20여 년 동안 서울 집에 가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이며,
임금이 수차례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으면서도 억지로라도 초치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였는지를 살펴볼 뿐이다.
그 당시로 올라가 그 마음과 사실을 상상해 보면 또한 그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였다.
공이 살던 도촌 서쪽 골짜기[西洞]에 도계사(道溪社)가 있으니, 바로 공을 모신 사당이다.
고전번역서 > 재향지 > 순흥지 >충절(忠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