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도 인천법소 2016년 망종치성 도훈 :
“기본에 충실한 신앙”
양력 2016년 6월
5일 (음력 5월
1일)
산과 들의 녹음은 짙어가고 한낮의 태양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지는 6월
인데요. 베란다앞 화단에 있는 자두 나무의 푸른 열매가 이제 대추만큼 커져서, 꽃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더라고요. 보리 밀 등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이 익는다는 망종입니다. 지난 가을에 보리 파종을 했는데 그 열매를 맺어 올해에 곡식 중에
첫 수확하는 곡식이 이 되겠네요. 오늘 망종절의 인천법소 도훈 주제는 ‘기본에 충실한 신앙’이란 주제로 제 스스로의 신앙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여태까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을 때 우리들이 일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행복과 평안, 크게 보면 모두의 평화라고
볼 수 있지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생명활동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각자의 생명활동에는 그 지향점 즉 목적과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있다고요. 보편적으로
보면 행복과 평화, 길게 보면 생명을 영생시키는 것이 생명활동의 지향점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각자가 처한 환경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종교에 따라서 행복을 얻으려는 구체적인 방법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고 볼 수 있어요.
돈과
권력과 육신의 즐거움이 있으면 일시적으로는 행복하고 평안하나 장기적이고 궁극적으로 보면 그것은 결코 행복과 평안을 준다고 볼 수 없어요. 장기적이고 항구적인 행복과 평화는 진리를 깨달아야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안다는 것,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생명을 영원히 유지하는 방법을 알았다는 것이 거든요.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그대로 실행하면 내 생명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평안하고 자유롭지요. 다른 생명이나
사물로부터 내 생명이 위협을 받지 않으니까 평안한 거죠. 비록 돈이 없더라도 평안하고 권력이 없더라도
행복한 거라고요, 진리를 깨달으면. 그러니까 무궁한 자유를
느끼게 되는 거죠.
또한
인간은 관계의 존재이기 때문에 내 주위에 있는 부모형제, 이웃과 여러 관계를 맺고 있는데, 부모형제와 이웃이 즐겁고 행복해야 나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생명은 홀로 독존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은혜로 탄생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으로 현재의 내 생명이 유지되는 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불행이 곧바로 나의 불행으로 연결됩니다. 내가
진리를 깨달아서 행복하고 자유롭게 되었을 지라도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내 주변 환경이 행복하지 못하면
결국은 나도 행복해질 수 없는 거예요. 내 주위에 아픈 사람만 잔뜩 있다, 가난한 사람만 잔뜩 있다, 그러면 내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요.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함께 행복해져야 합니다. 하늘은 못 생명의 천지부모님이기 때문에 하늘은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 목표를 이루려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고요. 하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예로부터 천심자, 성인이라고 했지요.
우리가
상제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알고 보면 단순한 거예요. 행복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믿고 따르는
거예요. 상제님의 말씀과 행적 속에는 진정한 인간의 참 행복이 있고 무궁한 자유가 들어있다고요. 선천을 살고 있는 있는 우리가 느끼는 행복과 평안은 가짜의 행복이고 일시적인 평안이라 할 수 있어요. 대부분이 독기와 살기로 얻은 평안이고 양심을 속이고 거짓을 행해서 얻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상제님과 고수부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각자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모두 사람이
다 평안해집니다. 무궁한 행복이 있고 모두 다 평안해지는 길이 상제님의 가르침에 들어있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상제님의 도를 무극대도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천지부모님이신 상제님과 고수부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상제님과 고수부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마음을 닮아야 한다고요. 상제님, 고수부님의 마음은 천지부모님의 마음이고, 태을과 하나된 마음이라고요. 상제님께서는 진리를 깨달으셨기 때문에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된 거죠. 결국
진리를 깨닫는 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다는 것인데, 상제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넘어서 우주의
근본 마음자리인 태을과 한마음이 되시어 태을을 깨달으신 거라고요.
우리가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마음을 닮기 위해서는 우리도 상제님과 고수부님과 같은 깨달음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을
이루기 위해 태을도에서는 마음닦고 태을주 읽으면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을 표어처럼 얘기하거든요. 달리
표현하면 시천주, 봉태을 실천하여 내 자신에 이미 들어있는 천주의 품성을 되찾고 태을신성과 태을생명력을
회복하는 것 이라고요.
마음닦는
것은 마음의 독기와 살기를 풀어 없애는 것이고, 독기와 살기의 근원은 상극지리로 인하여 마음에 맺힌
원한과 척이기 때문에, 독기 살기를 풀어 없애기 위해서는 참회하여 내 마음 속에 맺힌 원한을 풀어 내고
더 이상 원한과 척을 짓지 않는 마음을 닦고 그 어진 마음을 내어 말하고 행동해야 된다고요.
원한을
없애고 척을 맺지 않게 마음을 내어 쓰는 것이 마음의 독기 살기를 없애는 것인데, 원한과 척을 맺지
않게 하려면 사랑과 용서로 처신할 수 밖에 없는 거라고요. 사랑과 용서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 생기와
화기를 불어 넣어서 서로가 잘 되는 상생의 관계가 된다고요. 서로가 행복하고 평안한 상태가 되는 거죠,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 생명의 근본은 어진 것, 사랑과 용서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의 독기 살기를 없애면 그 자리를 우리의 본래 마음인 어진 마음이 차지한다고요. 즉 독기 살기를 없애면, 즉 사랑을 실천하면 자연스럽게 천주의 품성이
회복되고 태을의 신성이 돋아 나고 밝아집니다. 상제님께서 ‘고된
사랑을 실천한 연후에 선명히 신기로운 진리가 드러난다’고 이렇게 말씀해 주셨거든요.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은 생각으로 이어져 우리의 의지에 따라 말과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생활경험이
정제되고 축적되어 마음에 저장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무언가를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알았다 하더라도 마음에
저장된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알기만 하는 것은 쉽사리 말과 행동으로 나오지 않는다고요. 우리가 상제님을 믿고 닮으려고 해도 상제님께서 이루신 깨달음을 바로 우리가 이룰 수는 없어요. 우리가 상제님을 닮는 다는 것은 상제님과 같은 언행을 본받아 그것을 실천하여 내 마음의 상태, 마음씀을 상제님처럼 만들려는 것이죠. 실천을 통해서만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상제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깨달음을 이루는 방법을 전해
받을 뿐 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론을 아는 것이 곧 깨달은 것은 아니거든요.
깨달음은
마음에서 이루어지고 마음이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제님처럼 깨닫기 위해서는 상제님께서 전해주신 깨닫는
방법을 알고 그것을 잘 실천해서, 내 마음이 이치를 느끼고 내 마음에 이치가 각인되어야 합니다. 상제님 알려주신 방법대로 실천해서 내 마음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한 거죠. 따라서 무엇을 알았다 하더라도 실천이 없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진리를
깨닫는 방법, 도를 깨닫는 방법은 상제님께서 말씀과 행적으로 보여주셨으나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라고요.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오직 내 자신의 몫 이라고요.
진리를 배울 때는 진리가 자신의 밖에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위대한 선각자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진리가 내 마음속에 있고 내 마음속에 있는 그 진리를 찾고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내 자신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깨닫는 방법을 전해 받았더라도 그 방법을 실천해서
진리를 실제로 깨닫는 것은 내 자신이기 때문에 결국은 진리의 문제가 내 자신의 문제로 돌아오는 거죠.
상제님께서는
일이 되고 안 되는 관건으로 일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일심이면 안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죠. 물론 이는 상제님께서 경험적으로 터득하신 마음의 법칙이겠지요. 증산신앙에서 무엇을 알았다, 이치적으로 알았다 하는 것만으로 신앙이
완성됐다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것은 잘못된 견해라 봅니다. 상제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상제님과 같은 길, 상제님과 같은 구도의 생활, 상제님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요. 그 길이 현실적으로 고난의
길이든, 영광의 길이든 상제님과 같은 길을 가야 상제님을 닮은, 상제님의
마음을 닮은 무극대도인, 태을도인으로 재탄생 할 수 있다고요.
그러면
어떻게 상제님의 진리를 실천할 것 인가? 일상생활은 철저히 진리에 따라 운행되는 거라 보거든요. 근본적으로 보면 선도 진리요 악도 진리입니다. 악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러한 악이 나온 거든요. 발전을 위해 파천황적인 변화와 혁신이 요구된다 하더라도 급박하게 혁명적으로
추진하면, 너무 갑자기 현실을 벗어나서 여러 부작용과 난관이 생긴다고요. 따뜻한 물에 있다가 갑자기 찬 물로 들어가면 문제가 생기고 죽을 수 있듯이,
도를 실천함에 있어서도 있는 듯 없는 듯,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요. 하루의 변화를 보면 밤과 낮이 교대할 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바뀝니다. 계절이 바뀔 때도 소란스럽게 바뀌지가 않아요. 증산신앙도 이제는
과격한 혁신을 벗어나 서로가 평안하고 행복한 변화를 추구해야 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증산상제님
신앙에 의하면 우리가 맞이하는 새로운 시대의 모습이, 시간과 공간이 바뀌어 개벽하고 죽어가는 생명이
절규하는 우주적인 사건이지만, 우리가 서있는 시공간은 현재라고요. 여기서
급격히 바꾸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거예요. 오늘도 한 걸음만 더 나간다. ‘한걸음을 더 나가서 이 현실을 바꾼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변화를
추구해야 모두가 평안하고 행복해진다고요. 그러나 그 한발자국은 정성을 담고 최선을 다하는 한발자국 이라고요. 무극대도, 태을도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태을도를 현실 속에 연착륙시켜야
한다고요. 아무런 충격 없이 부드럽게 일상으로 끌어내려야 한다고요. 그래야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한 모두가 행복하고 평안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데 이제는 태을도인들이 그런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망종치성을 맞아 제 신앙을 다시 점검해보며 어떻게 신앙하는 것이 신앙을 잘 하는 것이냐? 결론은 두
가지 입니다. 일상 속에서 서서히 변화를 추구해야 되고, 우리가
이론적으로 이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일상 속에서 정성을 다해서 실천을 해야, 그것이 비로소 내 마음속으로
내려와서 내가 깨달은 진리로 정착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좀더 일상에 충실하면서
치열하게 자신을 파고 파며, 제 자신의 일상의 평안한 모습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다같이 태을도에 동참해서
행복하고 평안하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 길을 가게 하는, 저도 그런 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오늘이 망종이고 벌써 6월인데 올해도 절반이 다
갔거든요. 항상 하루하루 긴장을 놓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그런 신앙을 하겠다, 그런 생각을 다지며 오늘 도훈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공근하고 겸손해야 심법신앙의 기본과 원칙에 충실합니다. 자만하고 교만하면 개벽신앙과 도통신앙의 술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만과 교만은 독기와 살기를 부추겨 척을 쌓고 살을 짓습니다. 생기와 화기라야 덕을 베풀고 복을 줍니다. 심법신앙을 통해 마음을 밝혀나가야 상생생활의 모범을 보여 천지부모님의 마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일상속에서 공근하고 겸손함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서 가족과 주위을 안돈시키는 길을 가야겠습니다. 도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