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의 [햄릿] - 연극의 정신과 삶속의 죽음
신과 인간이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영원히 사느냐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냐로 구별될 수 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고 결국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생명을 좀 더 연장하기 위해 비굴한 삶을 선택하기도 하고 죽음을 불사하는 선택을 내리기도 한다.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은 왕인 아버지가 죽고 작은 아버지인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오르면서 형수였던 어머니를, 원래부터 왕비였던 거트루드를 다시 왕비로 맞아들이는 상황이 되면서 햄릿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클로디어스에게 조카로 남을 것인지 아들로 변신할 것인지, 왕자로서 클로디어스의 말을 고분고분 들으며 그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살다가 왕위를 이어 받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햄릿 아버지의 영혼으로 생각되는 존재를 만나 아버지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라 계획된 살인이라는 정황을 듣고 그 상황을 연극으로 재연하여 그것을 본 클로디어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는 그 정황이 사실임을 확신하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결단을 하게 된다.
국립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햄릿]은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이해랑 탄생 100주년을 내걸고 야심차게 준비한 연극이다. 이 명분이 다소 거창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손진책의 연출과 정동환, 전무송, 손숙, 박정자, 윤석화, 유인촌, 한명구, 김성녀, 손봉숙 등 출연배우들의 면면을 보노라면 그 명분이 결코 과장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연극이 지향하는 바의 하나는 연극의 기본 정신을 구현하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이 점은 연극의 무대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넓은 관객석을 모두 닫아 놓고 무대 위에 원형극장 형식으로 새롭게 관객석을 만든 후 가운데의 마당에서 연극을 펼침으로써 그 일단을 볼 수 있다. 흔히 소극장에서 볼 수 있는 이런 구조를 굳이 대극장에서 그것도 기존의 관객석을 폐쇄하고 무대 위에 관객석과 무대를 가깝게 배치한다는 점은 큰 작품을 한다는 대극장의 장점과 배우들의 호흡을 가까이에서 보여주겠다는 소극장의 장점이 조화를 이룬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노래 자체로 승부하는 가수란 화려하고 신디사이저가 많이 투입된 반주가 아니라 통기타나 간단한 반주로도 능히 심금을 울리는 김광석이나 에바 캐시디처럼 [햄릿]은 세트도구, 조명, 음향효과 등의 부가장치를 최소화하고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몰입하도록 연출과 구성을 이루고 있다. 햄릿이 초연되던, 이렇다 할 특수장치나 도구가 거의 없던 시절 혹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그리스 야외 원형극장의 하드웨어는 그야말로 무대와 관객석이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감독의 것이라고 본다면 연극은 배우의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연기할 무대만 존재한다면 배우는 자신을 보여줄 수 있다. 자본의 풍요로움을 도구의 과다로 쓴다면 뮤지컬이나 콘서트가 아닌 순수예술인 연극에 있어서는 약보다는 독이 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햄릿]은 그 과다의 가능성과 오용성을 접고 연극이 처음 역사에서 등장했을 때의 초심으로 가자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그 의도가 자신감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이유는 당연히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경륜있는 올스타급 배우들의 불꽃튀는 연기의 조화를 기대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좋은 배우에게 가장 좋은 마당은 화려한 치장과 효과로 뒤덮인 세트장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이다. 좋은 화가에게 화려한 배경이 그려진 도화지는 굳이 필요없다. 그저 하얀 도화지이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더군다나 한명의 훌륭한 배우가 전 무대를 휘저을수도 있는 것이 연극인데 9명의 베테랑이 무대로 나선다면 그 무대조차 좁아 보일지도 모른다. 이 연극의 발표가 이뤄지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내게 햄릿의 적역을 찾으라면 현재로선 유인촌이 아니면 마땅히 떠오르는 배우가 없다. [문제적 인간 연산], [파우스트], [오셀로]를 통해서 고민하는 인간형의 연기를 이미 보여준 그는 햄릿을 5번 이상 무대에 올리기도 했고 햄릿만큼 고민하는 캐릭터는 실제 햄릿에 어울리는 20대의 나이의 배역에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치계로 갔다 돌아온 유인촌의 배우로의 귀환은 한국정치에 있어서나 작품계에 있어서나 양쪽으로 다행한 일이다. 폴로니어스 역을 맡은 박정자는 출연진 중에 가장 선배 배우이기도 하지만 1인 3역인지 4역인지 모를 정도로 노련함과 유머를 섞어 연극 전체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햄릿]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 한명이라도 연극 전체를 능히 이끌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존재들인데 놀랍게도 작품 전체에서 과도하지도 않고 아주 작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전체의 조화 속에서 펼쳐주었다. 이는 손진책 연출의 힘있는 바가 클 것이라고 본다. 오필리어 역을 맡은 윤석화의 경우는 별도로 언급하고 싶다. 윤석화의 연기 스타일은 목소리에서 뚜렷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작품에서든 자기의 톤과 스타일을 거의 유지하는 꿋꿋한 캐릭터에 가까운 데 이는 관객들에게 취향의 호불호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혹자들은 그런 그의 캐릭터와 일관성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연극에서 윤석화는 전체의 작품 속에서 하나된 조화로움 보다는 약간 튀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그 점이 그의 역량이 다른 배우들에 비해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튄다고 해서 그것을 깎아 내릴 것으로 단정할 순 없는 일이다. [마스터 클래스]에서 확연히 나타난 것이지만 모노드라마 타입의 작품에서 그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이번 연극에서 그는 셰익스피어의 오필리어보다는 윤석화의 오필리어를 연기했다고 본다. 이 점은 호불호를 떠나 작품 전체에 긴장감과 활기를 동시에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햄릿]에서 주목할 것은 베테랑 배우들의 열연이지만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작품의 대사들이다. 연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적이면서도 주옥같은 대사로 가득한 햄릿은 또 보고 또 듣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이 연극은 대극장의 관객석이라는 상업성을 포기하고 무대위로 관객과 무대를 가까이에서 만나게 했다. 그럼으로써 마이크 장치를 쓰지 않고 마치 클래식 공연처럼 육성 그대로 대사를 감상하게 된 셈인데 이는 관객석의 끝쪽에서는 간신히 귀를 기울여야 대사가 들렸을지도 모른다. [햄릿]의 가장 큰 매력이 대사에 있을진대 마이크를 썼더라면 관객들은 대사 자체를 더 즐겼을지도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마이크를 쓰지 않음으로써 모든 관객들은 배우의 대사와 몸짓에 집중하고 몰입하여 감상하는 시간을 보냈다. 막연한 정적과 몰입된 정적의 차이와 감동이 무엇인지 이 현장의 배우와 관객들은 같이 느꼈을 것이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시간이었다.
한국식 전통놀이에서 영감을 받아 마당놀이로 시대의 인기를 끌었던 연출가 손진책은 진정한 무대란 빈 공간을 활용하는 배우의 역량에 달렸다는 것을 인지하고 초기 그리스의 원형극장의 형태에다 마당놀이의 자유로움을 배가하여 우리에게 어울리는 정통연극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혹자는 세트나 도구는 물론이고 음향이나 조명 등의 사용도 꼭 필요한 때를 빼고는 최소화한채 진행되는 이 연극을 미니멀리즘으로 볼수도 있을 것이나 이는 이 시대에 풍요로움과 과다함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안 좋은 습관의 상대적인 경향에서 그런 것이지 원래 연극은 미니멀리즘 원칙에 부합하는 이런 식이 더 맞고 적절한 것이다. 2000년전 예수님의 생존 시절에 기독교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훨씬 이른 그 시절에 언덕 위에 제자들이 같이 모여 건물 하나 없는 언덕에서 십수명의 제자들이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대화를 나누고 질문하던 시절의 핵심은 지금의 교회의 거대한 구조물의 위압감에서 바로 얻어지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보리수 아래에서 크게 깨우쳤음에도 제자들과 함께 저잣거리로 나아가 주민들에게 먹다 남은 밥 한 주먹과 반찬 보시를 받으며 지혜의 말씀을 전하던 고타마 붓다의 삶은 원색적이고 규모있는 현대의 절의 위용으로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유가 과했을지 모르나 초기 연극의 바탕과 정신이 무엇인지 되돌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국립극장의 [햄릿]은 연극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를 관객뿐만 아니라 연극인들에게 상기시키는 자극제가 되고 앞으로의 연극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올려야 할지 성찰하게 하는 분수령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고전은 늘 다시 올려지고 재해석되어진다. 그런 점에서 국립극장의 [햄릿]은 이 시대에도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해 보는 이들에게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원작은 전체 5막의 햄릿인데 아마도 반나절의 작품시간이 주어져서 희곡의 전 대사를 풀어내더라도 이 작품의 주옥같은 대사들로 인해 그 가치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에 이 작품을 추출해서 담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부담이자 또다른 해석일 수 밖에 없다. 각본가 배삼식은 원래의 5막을 2막의 형식으로 나누어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인간존재에 초점을 맞추어 햄릿을 응축시켜 나간다. 1막에서는 사건의 전개와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2막은 내적인 고민과 결단, 마무리를 관객들로 하여금 초집중시키는 위력을 발휘한다. 이는 각본의 기초능력도 있었겠지만 배우의 힘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 연극에서 가장 크게 감동되는 부분은 결말 부분이다. 연극을 보실 분들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다음 문단은 나중에 봐도 좋다. 연극 자체의 결말은 주요 인물들이 순차적으로 죽는 것으로 큰 비극을 맞이하지만 이 작품은 주요인물들의 사망 후 그들을 모두 일으켜 세워 무대의 배경이었던 병풍막을 올린다. 이제까지 닫혀 있던 해오름극장의 텅빈 관객석이 나타나는 것이다. 일렬로 일어선 배우들은 관객석으로 내려간 후 다시 무대로 올라온다. 그럼으로써 연극은 끝나게 된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고 배우들은 퇴장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입장했던 무대의 문 대신에 무대에서 비워져있던 관객석을 통해 나가게 된다. 적어도 여기에서 나는 4중첩의 연극을 본 것 같다. 형식적으로 우리는 [햄릿]이라는 연극을 보러 온 관객이지만 연극 안에서 햄릿은 작은 아버지의 죄과를 드러내기 위해 연극 속의 연극을 펼친다. 마치 소설 속의 소설인 액자소설처럼 관객의 입장에서는 2중의 액자연극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넓게 보면, 우주의 시선으로 보자면 인생은 각자의 육신이라는 역할을 입고 온 인생의 배우라고 볼 때 우리의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햄릿]이라는 연극을 보러 온 셈이다. 그 연극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3중의 연극 속에 우리는 놓여진 셈이다. 이때의 관객은 우리가 아닌 하늘의 존재들, 조상들 혹은 연극의 신일 수도 있겠다. 그들은 비워져 있던 원래의 관객 속에서 우리의 인생연극을, 그 인생들이 [햄릿]을 보는 것을, [햄릿]안의 인물들이 연극 속 연극을 여러 중첩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본다면 연극의 끝은 [햄릿]의 끝이 아니라 병풍배경이 올라간 뒤에 비워진 관객석을 통과한 우리들이 모두가 퇴장한 뒤에 연극이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적지 않은 관객들은 비워진 관객석을 통과하며 국립극장 바깥을 나올 때까지 연극의 끝, 인생의 결말에 대해서 음미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배우들의 연기로 끝을 맞이한게 아니라 관객들의 퇴장들로 연극의 끝을 맞이하게 한 국립극장의 [햄릿]에 감동과 감사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으로 햄릿은 전체가 주옥같은 대사로 가득하지만 2막에서(셰익스피어 희곡 원작에서는 3막 1장)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로 시작하는 햄릿의 존재론 독백은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해 보는 이라면 한번쯤 공감해 볼만한 햄릿의 하이라이트에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을 존재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 삶만 생각한다면 삶다운 삶을 살기 힘들 것이고, 살아있음에도 죽음을 성찰해 본다면 삶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을 본 이들이든 안 본 이들이든 이 대사는 신의 경구라기 보다는 인간적인 고민이 함축되어 있기에 여러번 음미해볼만한 진지함과 즐거움이 내포되어 있다. 고민스러우면서도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되새겨볼만한 이 구절을 같이 감상하는 것으로 국립극장의 [햄릿] 후기를 끝내고 싶다.
“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고상한가?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맞는 것과
밀려드는 역경에 대항하여 맞서 싸워 끝내는 것 중에.
죽는다는 건 곧 잠드는 것. 그뿐이다.
잠이 들면 마음의 고통과 몸을 괴롭히는
수천가지의 걱정거리도 그친다고 하지.
그럼 이것이야말로 열렬히 바랄 만한 결말이 아닌가?
죽는다는 건 자는 것. 잠이 들면 꿈을 꾸지.
아, 그게 걸리는 구나. 현세의 번뇌를 떨쳐 버리고
죽음이라는 잠에 빠졌을 때, 어떠한 꿈을 꿀 것인가를 생각하면,
여기서 망설이게 돼.
이게 바로 지긋지긋한 인생을 그처럼 오래 끌고 가는 이유야.
그렇지 않다면야 그 누가 견디겠는가? 시간의 채찍과 모욕을,
폭군의 횡포와 건방진 자의 오만,
버림받은 사랑의 고통, 질질 끄는 재판,
관리의 무례함,
훌륭한 사람이 소인배들에게 당하는 수모를 참는 신세를 뭣 때문에 감수한단 말인가?
단검 한 자루면 조용하고 편안해지는데.
누가 무거운 짐을 지고
피곤한 인생에 신음하며 땀을 흘리겠는가?
다만 죽음 다음에 겪을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결심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어떠한 여행자도 돌아오지 못한 미지의 나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 세상으로 날아가기보다는
차라리 현세의 익숙한 재앙을 참는 편이 낫다는 생각 때문이야.
이렇게 우유부단담히 우리를 비겁하게 만들어,
혈기왕성한 결단은 창백하게 질려 병들어 버리고
천하의 웅대한 계획도 흐름이 끊겨
실천하지 못하게 되는 법. ”
-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 3막 1장 중에서의 대사
첫댓글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작품은 위대한 인류의 유산인 <햄릿>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는 대단히 훌륭한 연극이었습니다. 저또한 이 연극의 성공은 단연코 출연 배우들의 승리라 생각합니다. 유인촌의 폭발적인 연기, 정동환의 무게감 있는 연기, 윤석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기, 박정자의 능청스런 연기, 손숙의 애절한 연기, 김성녀의 자신을 낮춘 연기, 전무송의 조화로운 연기 등이 어울러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멋진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진정 이 모든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역시 좋은 글은 분량의 길이에 있는게 아니라 함축적인 핵심에 있는것 같습니다. 퓨어님의 배우에 대한 특징적 서술이 다시 한번 무릎을 탁 치게 만듭니다~
퓨어님... 정말 깊게 보셨군요
그 생각에 2백 프로 공감합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무대연출 방식입니다. 율리시즈님이 언급하셨듯이 무대는 기존의 액자형 프로시니엄이 아니라 그리스 원형극장과 같은 아레나 스타일로 구성되었죠. 처음에는 배우와 관객의 거리를 축소해서 고대 연극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극이 종료되고 막이 오르면서 관중석은 바로 무대가 되고 관객은 더이상 관객이 아니었습니다. 역사현장을 함께 보고 겪은 보이지 않은 출연진이었던 셈이죠. 관조적인 관객을 참여하는 주체로 호명하는 이 무대장치를 보고 깜짝 놀랜 사람은 비단 저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정말 멋진 해석입니다~ 한국의 마당놀이처럼 배우와 관객의 경계가 멀지 않고 함께 한 것은 손진책 연출가의 공이 컸던 것 같습니다. 한국 연극계의 산 증인들을 한 자리에서 본 것 만으로도 좋았는데 조화와 개성이 빛났던 자리로 추억이 될것 같습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인 막,
호래쇼의 입보다 가벼운 그 얇은 천조각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로 바뀌는 순간
숨이 멎을듯한 느낌이 일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지요
자 보라구, 네 모습을... 지금은 욕에 빠져
그렇게 아둥바둥 살아가지만, 휘장 한겹 휙 벗기면,
바로 하데스, 바로 죽음, 바로 무소유
이렇게 모든게 바뀐다니까...
텅빈 객석.... 그 황량함은
내가 떠난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떠난 나의 모습
욕에 쩔어 살다가, 욕을 움켜쥐고 멈추어버린 나...
마치 그 상황을 경고하는 듯했습니다
@가을아침 시로 볼 것인가, 해석으로 볼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잘 읽었습니다
깊이있는 해석, 셰잌스피어가 이 글을 읽었다면
율리시즈님께 악수를 청했을 겁니다
율리시즈님!!!
언제 이렇게 햄릿의 리뷰를 쓰셨나요?
다시 한 번 햄릿을 생각하게 합니다.
율리시즈님의 리뷰......정말 훌륭합니다.
연극보고 뒤풀이하고 바래다 주고 귀가해서 후기 쓰고 잠들었습니다~
순식간에 매진되어서 보고싶어도 볼 수 없는 공연...ㅠㅠ
산유화님, 중간중간 들어가보면 취소표가 많이 나옵니다.
모니터링 하다가 사시면 되요. 꼭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가을아침 인터파크에 들락거리고 있는데 이삭줍기가 쉽지 않습니다.ㅠㅠ
@산유화 8.5일. 금요일 저녁 표 2장, 있습니다
보실려면 오늘 중으로 전화메시지 주세요
새벽에 나왔길래 일단 예매했습니다
자리는 좋구요, 회원가 20프로 할인티켓입니다.
24000×2매, 티켓값은 보시고나서 주시면 됩니다
김재성 010-5027-8071
@가을아침 정말로 고맙습니다.
전화메시지 드리겠습니다.^^
뭉클합니다. 연극의 원형에 가까운 그런 것이었네요.
꼭 보러 갔어야 하는 건데. 매인 몸이 아쉬워요.
단숨에 쓰신 리뷰가 목마른데 차가운 샘물 한잔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