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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 허난설헌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40 14.04.27 21: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사 傳]

 

■ 들어가는 말

 

한 여인이 슬픔에 잠겨있다. 딸과 아들을 모두 잃은 기구한 운명.

이 여인은 조선의 천재 시인 허난설헌이다. 그러나 여자로 태어났기에 조선에서 그녀의 시는 끝내 외면 받았다.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 허난설헌

 

■ 본문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 허난설헌.

그녀는 유명한 양반가의 딸로 태어나서 글과 학문을 마음껏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수준 높은 시를 남겼습니다. 헌데 후세사람들은 그녀가 조선 땅에 여성으로 태어나서 김성립의 아내가 된 세 가지를 한스러워 했다고 말합니다. 허난설헌은 왜 조선 땅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그렇게 한스러워했던 것일까요.

 

허난설헌이 살았던 16C 조선은 여성이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할지라도 그것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조선에서 허난설헌의 시는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묻혀 버릴 뻔한 허난설헌의 시가 중국에서 되살아났습니다.

 

중국북경.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중국 국가도서관. 제작진은 이곳에서 특별한 책 한권을 만날 수 있었다. 제목은 조선시선, 짜오치엔 박사(중국국가도서관)의 말.

 

“조선시선은 명나라 때 만들어진 판본으로 조선 시인의 시집입니다. (중국에서도) 매우 진귀한 고서입니다.”

 

이 책속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조선시대 시인뿐만 아니라 고려, 신라시대 시인들까지 총망라 되어 있다. 신라시대 학자인 최지원의 시를 비롯해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 그리고 허매씨로 기록된 허난설헌의 시가 이 책에 들어 있다. 그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허난설헌의 시다. 그렇다면 조선시선. 이 책은 어떻게 중국에서 출판이 된 것일까.

 

허난설헌이 죽은 이듬해인 1590년, 허균은 집에 남아 있던 누이의 시와 평소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를 써서 한 대 모으기 시작했다. 죽은 누이 허난설헌의 시집을 펴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남동생 허균에 의해 허난설헌의 시가 세상에 처음 나오게 됐다. 허균은 누이의 시를 당시 대문호였던 유성룡에게 보여주었다.

 

“제누이의 시를 한번 모아봤습니다. 선생님의 고견을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허균

“훌륭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로구나. 어떻게 하여 허씨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이 있단 말인가. 돌아가 간추려서 보배롭게 간직하여 한 집안의 말로 비치하고 반드시 전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유성룡

 

유성룡은 허난설헌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곧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했고, 명나라는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다. 당시 명나라 지원병과 함께 사신들이 조선을 찾았는데 그중 오명제(명나라 사신)란 이가 있었다. 조정은 말재주가 뛰어난 허균을 보내 사신을 맞이하게 했다. 문인이었던 오명제는 조선의 시와 문장을 수집하고 있었다.

 

“조선인의 시집을 좀 구할 수 있겠습니까?” 오명제의 말

 

이때 허균은 다른 조선 문인의 시와 함께 허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오명제에게 건네준다. 오명제는 허난설헌의 시에 큰 관심을 표했다. 김성남박사(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의 말.

 

“그 당시가 한국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중국의 명나라에서 임진왜란을 지원하기 위한 군대와 사신들이 많이 교류가 한참 물고가 많이 트던 시기였다. 그러면서 조선에 왔던 많은 중국 문인들이나 사신들이 조선 시 수집을 많이 했다. 가져가는 과정 중이었는데 특히 오명제가 허균과의 긴밀한 만나면서 허균이 허난설헌의 시를 삼백 여 편을 오명제에게 전달해졌고, 오명제가 중국으로 가서 그 시들을 모아가지고 중국에서 출판을 해서 조선시선이라는 시집이 출판이 되었다.”

 

 

명나라로 돌아간 오명제는 1600년의 이 시들을 모아 조선시선을 출판한다. 허난설헌의 시가 이 책을 통해 중국의 알려지게 된 것이다.

 

“내가 북경으로 돌아오자 문인들이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조선 시와 허난설헌의 신선시를 구하고 싶어 했다.” 傳 : 조선시선 서문

 

이후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면 허난설헌의 시를 얻어가고 싶어했고 그런 이유로 허균을 찾았다.

 

“조선에 가서 허모씨를 만나면 난설헌의 시집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당신이 바로 구분이군요. 시집을 구할 수 있을까요?”

 

그만큼 허난설헌의 시는 명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중국 땅에서 최초의 한류열풍을 불러온 것이다. 치칭푸 교수(중앙민족대학)의 말

 

“명 말기에 여성시가 유행하면서 많은 여성시인과 시집이 등장했습니다. 이때 한국에도 여성시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바로 허난설헌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난설헌의 시는 <긍사>, <양조평양록> 등 여러 책에 수록되어 중국 시단의 신화처럼 내려왔다. 뿐만 아니라 1700년대에는 일본에서도 시집이 간행되어 널리 애독되었다.

 

자칫 역사에서 사라질 번했던 허난설헌의 시는 남동생 허균에 덕분으로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허난설헌의 아버지인 초당 허엽은 첫째 부인1)에게서 아들 허성을 그리고 둘째 부인2)에게서 아들 허봉과 허난설헌, 허균을 두었는데 이들 모두가 문장에 뛰어나서 후대에 허씨 5문장가로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이 한문을 배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엔 왕실 공주에게도 한글 이상은 가르치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그렇다면 허난설헌은 어떻게 한문을 배워 한시를 짓게 된 것일까요.

 

 

 

 

 

강릉시 초당동.

초당이란 마을이름은 허난설헌은 아버지 허엽의 호에서 비롯되었다. 허난설헌의 생가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양반 명문가의 딸로 태어난 허난설헌. 허난설헌의 아버지는 초당 허엽으로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뒤 둘째부인과의 사이에서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낳았다. 허엽은 글공부를 가르칠 때 아들 딸 구별을 두지 않았다. 덕분에 허난설헌은 동시대 다른 여성들과 달리 다양한 학문을 익힐 수 있었다.

 

장정룡 교수(강릉대학교)의 말

“당시 조선사회에서의 여성은 소위 부덕을 닦거나 부공을 열심히 갖추는 것을 여성의 미덕으로 보던 사회였다. 그러니까 초당의 경우는 난설헌을 한 여성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본 것이죠. 인격체로 봤다는 사실이죠. 그러니 지금 이 사회에서 양성평등이라고 하는 그런 관점과도 통하는 것이고”

 

허난설헌은 동생인 허균의 글공부를 직접 가르쳤다. 허균이 시를 지으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할 정도로 문학실력이 뛰어났다. 허균은 누이의 시를 높이 평가했는데 그의 저서인 학산초담(鶴山樵談)3)에 잘 나타나 있다.

 

“누님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들이다. 시어(詩語)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속인으로는 마칠 수가 없다.”

 

허난설헌의 천부적인 글재주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중국문헌인 <양조평양록>에선 ‘허난설헌은 허균의 누이다. 8세에 능히 시를 지었으며 여신동이라 칭해졌다’라는 기록이 전하고, <긍사>에선 ‘그녀의 백옥루상량문은 8세에 지은 것인데 만약 하늘이 내린 재능이 아니라면 어떻게 지어낼 수 있겠는가’라며 극찬하고 있다.

 

허균과 허난설헌 기념관. 이곳에 허난설헌이 8살에 지어다는 작품이 보관돼 있다. <광한전백옥루상량문>. 한석봉의 글씨로 쓰여진 이 시는 여덟 살 아이가 지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그 표현력과 상상력이 뛰어나다.

 

장정룡 교수의 말.

“광한전백옥루라 하는 것은 도교의 상상의 궁전이거든요. 거기에 상량문을 올릴 때 그 글을 쓴 내용인데 난설헌이 여덟 살 때 지었다는 명문입니다. 아주 대단한 문장인데 그 대단한 문장에 걸맞게 당대의 명필이었던 한석봉 한호 선생이 1605년에 이 글씨를 쓴 것입니다.”

 

허난설헌은 시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났다. 초당 허엽의 13대손인 허경씨는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귀한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허난설헌이 직접 그렸다는 그림 한 점이다. 12대 왕고모가 되는 허난설헌의 작품을 집안에선 소중히 대한다.

 

“이것은 우리 집안의 가보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귀한 물건입니다. 저 자신도 이것을 수장고에 넣어 두고서 1년에 한 번 정도 뵐뿐입니다.”

 

 

작품 제목은 앙간비금도. 집 앞에서 아버지와 어린 딸이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소녀가 그림 속에 인물로 등장한 것은 무척 드물다. 미술가들은 그림 속의 소녀가 허난설헌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 평한다. 필체도 여성답지 않게 획이 굵고 힘이 넘친다. 허난설헌의 뛰어난 재능 뒤에는 오빠인 허봉의 도움이 있었다. 난설헌보다 나이가 열두 살 위였던 허봉은 일찍 과거에 합격해 중국의 사신으로 자주 오갔다. 그때마다 두보에 시며 책을 사다 난설헌에게 주어 익히게 했다. 동생의 재능을 높이 산 허봉의 배려였다.

 

허봉은 평소 말하기를, ‘난설헌의 재주는 배워서 그렇게 될 수가 없고, 이태백과 이장길에게서 물려받은 소리’4)라고 했다. 이런 능력을 더욱 키워주기 위해 허봉은 친구 이달에게 시를 배우도록 소개했다. 손곡 이달은 삼당 시인 중 한 명으로 불릴 정도로 당나라 시에 뛰어났다. 하지만 이달은 서얼 출신이라 일찍부터 관직을 포기하고 오로지 시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난설헌은 손곡 이달은 스승을 맞아, 당나라 시를 비롯해 여러 학문을 두루 배우며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

 

“그 당시 일반적인 양반 가문에서 서얼 출신을 그것도 특히 여자한테 선생님으로 소개한다는 것은 사실 보면 그 당시 일반적인 집안의 가풍은 아니라고 보여 집니다. 그런데 다만 허난설헌의 집안이 갖고 있는 특별하고도 정말로 시대를 뛰어 넘는 앞선 집안의 가풍, 어떤 진보적인 그러한 가풍과 어떻게 보면 시대와는 화합할 수 없는 상당히 혁명적 기질들이 그 집안의 형제들이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개방적이고 남녀차별이 전혀 없는 집안에서 자란 허난설헌.

재능을 인정해 준 가족도 덕분에 그녀는 마음껏 시를 쓰고, 꿈을 키워갔다.

허난설헌의 유년시절은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허난설헌의 말

“이웃집 친구들과 그네뛰기 시합을 했어요. 띠를 매고 수건 두르니 마치 선녀가 된 것 같았지요. 바람차며 오색 그넷줄 하늘로 날아오르자 노리개 소리 댕그랑 울리고 푸른 버드나무엔 아지랑이 피어났지요.”

 

그러나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허난설헌의 생가.

명문가에서 태어난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허난설헌, 그녀가 어느 덧 이 집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조선 중기에는 여자들이 보통 열여섯 살에서 열여덟 살 경 즉 십대 후반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부모가 정한 혼처에 따라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는데 허난설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집안 어른들이 정한 허난설헌의 상대는 안동김씨집안의 자제로 5대가 대를 이어 문과에 급제한 문벌 가문었습니다. 그야말로 최고 가문 간에 결합이었던 것이지요. 두 양반가의 축복 속에 결혼을 하게 된 허난설헌. 그녀의 결혼 생활은 어떠했을까요.

 

허난설헌은 열다섯 살에 양가 부모들의 청혼에 따라 김성립5)과 결혼식을 올렸다. 허난설헌의 남편이 된 김성립.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성립의 후손인 안동김씨 한 宗中會를 찾았다.

 

김홍도(허난설헌의 시할아버지 - 영의정) → 김첨(허난설헌의 시아버지 - 도승지와 이조정랑)

 

오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문벌가문. 그렇다면 김성립은 어떤 벼슬 직에 올랐을까. 허난설헌이 죽고 난 후에야 별시문과에 급제한 김성립은 최고 관직이 겨우 정8품인 하급벼슬에 머물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명성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김성립과 결혼한 허난설헌은 친정을 떠나 시댁에 들어가 생활했다.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맏며느리로서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이러한 시집생활이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혼례를 치룬 뒤 여자가 시댁에서 생활하는 혼인 형태를 친영이라 하는데, 親迎(친영)은 당시 결혼 풍습과는 사뭇 달랐다.

 

조선중기까지만 하더라도 결혼제도는 이와 완전히 반대였다. 남귀여가(男歸如家) 즉 혼례를 치른 뒤 남자가 처가에서 생활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장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뜻에 ‘장가간다’라는 표현도 여기서 비롯됐다.

 

현모양처의 귀감인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자란 오죽헌. 허난설헌과 동시대를 살았던 신사임당은 시댁이 아닌 친정에서 결혼 생활을 했다. 아들인 율곡 이이도 친정에서 낳아 키웠다. 시문과 그림에 뛰어났던 신사임당. 그녀는 아름다운 산수화 주변풍경을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한국 제일의 여류 화가라는 평을 받는 신사임당. 그녀의 뛰어난 예술세계 뒤에는 친정이라는 편안한 안식처라 있었다.

 

이순구 박사(국사편찬위원회)의 말.

“신사임당 같은 경우는 친정에서 오래 생활을 했다. 친정 아니면 친정 주변이었는데 자기가 자기 재능에 집중하고 그것을 들어내는데 친정생활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시댁에 있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아무래도 제약이 크다. 그래서 신사임당이 제가 보기에는 그림에 있어서 그렇게 뛰어남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친정살이라도 하는 것이 굉장히 차지하는 비중이 컸을 것 같다.”

 

허난설헌도 어머니의 친정인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가족들의 배려와 사랑 속에 시인의 꿈을 키워갔던 허난설헌 그런데 당시 결혼 풍습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허난설헌은 결혼과 함께 친정을 영영 떠나게 되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길 것일까?

 

조선 세종조. 세종과 김종서의 대화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지금도 친영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나라 풍속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옵니다. 만일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곧 거기에 필요한 노비, 의복, 그릇 등을 여자의 집에서 모두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곤란하여 어렵게 되는 것이옵니다.”

“친영이 갑작스럽게 실시 될 수 없다면 왕실에서 먼저 실행이 되어 사대부로 하여금 본받게 하면 어떠한가.”

 

왕실에서는 왜 오랜 풍습과 다른 親迎(친영)제 실시를 고집했던 것일까.

 

이순구 박사의 말.

“조선 초기에 새로 건국을 하면서 어떤 모든 시스템을 중국화 하려고 한다. 중국적인 혼인제도, 가족제도 이런 것들을 이제 이상으로 하고 되는데 그때 우리 혼속을 보니까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간단 말이죠. 이게 그 중국적인 제도를 들여오고 놓고 보면 아주 촌스럽다는 것이죠. 조정에서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된다. 이것을 이젠 바꿔야 한다. 중국과 같은 친영제도로 가야 된다. 그러면서 이제 왕실에서 직접 친영제도를 보이기도 하면서 사대부들을 한데 따라하고 함.”

 

친영제가 시작되면서 종가집도 생겨났고 그에 따라 종부의 역할도 커졌다.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윤증의 종가 집.

 

나이 90살이 넘는 종가는 아직도 집안 일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장을 담그는 일도 모두 종부의 몫이다. 이 종가 집에서 일 년에 지내는 제사만도 스무 두 번. 할머니는 아직도 제사 준비를 혼자 한다. 집안의 종부이기 때문이다. 시집을 오면서부터 그렇게 평생을 살았다.

 

양창호(90세) 종부의 말.

“밤에도 새벽 1시 이전에는 잠을 자 본적이 없어요. 15년 동안을… 새벽에 찬물에다 세수하고 왜냐면 어른들 아침 기거하고 나오시면 내가 부스스하고 자다 일어난 모양으로 어른 앞에 안 나타나려고 그 전에 세수하고 나왔어요. 그게 15년을 그렇게 했다면 알 수 있는 세상 아니에요. 애를 셋 낳을 때까지 그랬으니까”

 

허난설헌도 종부가 되어 어렵고 고된 시집살이를 했다. 당시까지도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남귀여가 풍습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허난설헌은 낯선 시집생활을 했던 것이다. 조정의 시책에 따라 허난설헌은 새로운 결혼제도인 친형을 따른 첫 세대였다.

 

이순구 박사의 말.

“허난설헌은 어쨌든 시댁에서 생활을 했다. 재능은 제가 보기에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이나 모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발현하는데 시집살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더 제약이 많다. 집안일을 챙겨야 하는 게 아무래도 시댁에 있으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제약이 허난설헌에겐 있지 않았을까 예상을 한다.”

 

이런 와중에 남편은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결혼한 뒤에도 김성립은 과거 준비를 위해 接(접)에서 주로 생활을 했다. 접은 젊은 선비들이 과거를 준비하며 함께 공부하던 장소로 일종의 동아리 합숙소였다. 결혼 초기에 허난설헌은 남편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있었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새색시의 애틋한 마음이 담긴 시가 전해진다. 허난설헌의 시

 

곱게 다듬은 황금으로 精金凝寶氣

만든 반달 노리개는 鏤作半月光

시집올 때 시부모님이 주신 거라서 嫁時舅姑贈

다홍치마에 달아두었지요 繫在紅羅裳

오늘 길 떠나가시는 님에게 드리오니 今日贈君行,

먼 길에 정표로 달아 주세요 願君爲雜佩.

길가에 버리셔도 아깝지 않지만 不惜棄道上

새 여인에게는 달아주지 마세요 莫結新人帶.

 

과거 시험 준비로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못했던 김성립. 그러나 그는 변변히 과거 시험에 낙방했다. 김성립은 점점 공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보다 뛰어난 아내의 학문과 문장력에 열등감을 느꼈다. 부부사이는 날이 갈수록 소원해졌고, 허난설헌은 남편 없이 외롭게 지냈다.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시를 쓰면서 그 외로움을 달랬다. 힘들고 고된 결혼 생활에 시는 유일한 그녀의 안식처였다.

 

그러나 당시엔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행실이 못 되었다. 허난설헌의 시어머니는 시를 쓰는 며느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조선이란 사회는 여자가 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하고 며느리가 시댁에 들어가서 사는 親迎제는 17C가 돼서야 조선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허난설헌은 16C 살면서 시집살이를 한 그러니까 친영제를 경험한 첫 세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남자의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던 당시에 허난설헌은 낯선 시집살이를 해야 했는데 <성소부부고>에 보면 남동생 허균의 이와 같은 기록이 전합니다.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좋았으나 그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늘 누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허난설헌의 외로운 시집살이에 유일한 위로가 돼준 것은 바로 시였습니다.  

 

중국의 최고 명문대학인 북경대학.

이 대학의 조선어학과에선 한국시를 정규과목으로 가르친다. 이번 학기 강의의 주제는 허난설헌의 시이다. 학생들의 허난설헌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다. 중국에서 사백년간 전해져 오고 있는 허난설헌의 시, 무엇이 이들을 허난설헌의 시 세계로 빠져들게 한 것일까.

 

쳔아이윈 대학원생(북경조선어학과)의 말.

“봉건사회에 대한 반항과 불행에 대한 호소, 비애와 고통을 소리 내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던 사회에서 이름을 날릴 수 없었던 것에 대해 허난설헌을 동정합니다.”

 

위루어잉 학생의 말.

“어두운 현실 속에서 그녀는 이러한 현실을 시에 의지해 벗어났고 현실에 대한 반항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허난설헌은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허난설헌은 다양한 주제로 시를 썼다. 그중에는 불평등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내용이 많다. 그녀에 시에는 시대에 대한 저항정신이 오롯이 녹아 있다. 허난설헌의 시

 

양반가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東家勢炎火

높은 다락에서 풍악소리 울렸지만 高樓歌管起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北隣貧無衣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 枵腹蓬門裏

어느 날 아침 높은 권세 기울면 一朝高樓傾

오히려 북쪽 이웃을 부러워하리니 反羨北隣子

흥하고 망하는 것은 바뀌어도 盛衰各遞代

하늘의 도리를 벗어나지는 못한다오 難可逃天理

 

김성남 박사의 말.

“허난설헌이 그만큼 그 시대의 여성의 한계를 사실 보면 너무 빨리 ‘앞서갔다’라는 것들이 허난설헌에게는 많이 나타났다. 사실 어떻게 보면 비극이죠. 너무 앞서간 인물이 사회의 벽을 깨지 못하는 것들이 허난설헌이 갖는 것의 비극이겠죠.”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허난설헌이 어떻게 신분차별을 꼬집는 저항시를 짓게 되었을까. 어릴 적 스승이었던 손곡 이달에게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달은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자라는 이유로 벼슬 직에 나가지 못했다. 이러한 이달의 모습을 통해 허난설헌은 사회현실을 즉시 하는 비판적 안목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스승을 통해 시대의 모순을 접한 허난설헌, 그녀는 가난한 여성들의 삶과 노동을 시로 담아내기도 했다. 난설헌의 시.

 

밤늦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노라니 夜久織未休

베틀 소리만 삐걱 삐걱 차갑게 올리는데 軋軋鳴寒機

베틀에 짜여진 베 한필 機中一匹練

결국 누구의 옷이 되는가 終作阿誰夜

손에 가위 쥐고 마름질하니 手把金剪刀

밤이 차가워 열 손가락 곱아온다 夜寒十指直

남을 위해 혼례복을 짓고 있지만 爲人作嫁夜

나는 여전히 홀로 살고 있다오 年年還獨宿

 

신분의 귀천이 명확했던 조선시대. 허난설헌은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면서도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특히 억압받는 여성들의 고달픈 노동의 주목했는데 허난설헌은 여성과 빈자들이 겪는 불평등이 같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시를 무기로 그릇된 현실에 저항했던 여류시인. 시를 유일한 위로로 삼으며 살아가던 허난설헌에게 견디기 힘든 불행이 찾아옵니다.

 

1580년 경상도 상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경상도 관찰사 직에서 물러나 한성으로 올라오던 도중 그만 객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허난설헌은 두 아이 모두를 병으로 떠나 보내야 했다. 허난설헌 시

 

지난해엔 사랑하는 딸을 잃고 去年喪愛女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구나 今年喪愛子

슬프고 슬픈 광릉땅에 哀哀廣陵土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䉶墳相對起

…… ……

가엾은 너희 형제 넋은 應知弟兄魂

밤마다 서로 만나 놀고 있으려나 夜夜相追遊

…… ……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浪吟黃臺詞

슬픈 피눈물만 속으로 삼키노라 血泣悲呑聲

 

허균도 두 조카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학산초담에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 살아서는 부부금실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 받들 자식이 없으니 원통함이 한이 없다.’라고……

 

그런데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치적 실패를 거듭하던 허난설헌의 오빠 허봉이 술로 세월을 보내다 1588년 강원도 김화에서 또한 객사하고 만다. 허난설헌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었던 오빠 허봉의 죽음, 그 슬픔은 난설헌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 26살이던 허난설헌은 의미심장한 시 한수를 읊는다.

 

푸른 바다가 옥구슬바다를 적시고 碧海浸瑤海

푸른 난새는 오색 난새에 어울리네 靑鸞倚彩鸞

아리따운 부용꽃 스물일곱송이 芙蓉三九朶

붉게 떨어지니 서릿달이 차갑구나 紅墮月霜寒

<몽유광상산시 夢遊廣桑山詩>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일까, 허난설헌은 이듬해인 스물일곱에 나이에 생을 마쳤다.6)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워달라고 유언했다.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워 시를 썼던 여인, 그녀는 시와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

 

허난설헌은 죽고 난 뒤, 그녀의 시가 중국을 거쳐 조선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평가는 냉혹했다.

 

采蓮曲 ( 채련곡 )

맑은 가을 긴 호수에 벽옥 같은 물 흐르고 秋淨長湖碧玉流

무성한 연못 속에 목란배를 띄웠다네 蓮花深處繫蘭舟

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逢郞隔水投蓮子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 或被人知半日羞

 

조선 남성들의 부정적인 평가는 그 후 200년이 넘게 지속됐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 언급한 부분이 있다.

 

“규중여인이 시를 짓는다는 것이 원래부터 좋은 일은 아니다. 조선의 한 여자이름이 중국에까지 퍼졌으니 대단히 유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들은 일찍이 이름이나 자를 찾아볼 수 없으니 난설헌의 호 하나만으로 과분한 일이다. 후에 재능 있는 여자들이 이를 밝혀 경계의 거울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허난설헌의 시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실의 거대한 벽 앞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망했던 천재여류 시인,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기에 그녀의 시는 철저히 잊혀져 갔다.

 

■ 나오는 말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허난설헌, 그녀의 시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동생인 허균에 의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감성적이면서도 시대정신이 녹아나는 그녀의 시는 중국에서 최초의 한류 열풍을 불러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해서 남존여비의 땅 조선에서 새롭게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모순된 사회에 대항한 그녀에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역사는 허난설헌을 외면했지만 오늘의 역사는 허난설헌을 시대를 앞선 천재여류 시인으로 다시 평가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현재는 다시 먼 미래의 과거가 되고 그 미래는 과거의 역사를 정당하게 평가한다는 것을 허난설헌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의 허락받지 못한 여류 시인, 허난설헌.

  

 

                                  그득히 피어난 창가의 난초, 가지의 잎 그리도 향기롭더니

                           가을바람이 한번 스쳐 지나가니 슬프게도 가을서리에 다 시들었구나

                              뛰어난 그 모습 생기를 잃어도 맑은 그 향기는 결코 죽지 않으니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 운다.

 

<난초를 보며>

 

 

※ 제작권과 저작권은 KBS <한국사전>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을 금합니다. 올려 놓은 것은 역사 공부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임을…….

 

주)

1. 청주 한씨.

2. 강릉 김씨.

3. 학산초담(鶴山樵談)의 글을 보고자 한다면 이 사이트를 참고하라.

 

http://cafe.daum.net/jinin22/670Z/713?docid=9cf4|670Z|713|20070213200214&q=%C7%D0%BB%EA%C3%CA%B4%E3&srchid=CCB9cf4|670Z|713|20070213200214

 

1책. 필사본. 지은이가 25세 되던 해인 1593(선조 26)년 임진왜란을 피해 강릉에 머물면서 지은 것이다. 그의 또다른 유명한 시화집 중 하나인 〈성수시화 惺詩話〉가 신라의 최치원으로부터 당시의 문인에 이르기까지의 시를 통시론적으로 거론한 것이라면, 이 책은 주로 당시의 문인들과 당대 중국(명대) 문인들의 시를 공시론적으로 논한 것이다. 이 책이 학계에 소개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로, 애초에 허균의 문집이나 〈시화총림〉 등에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실체를 알 수 없었으나 조윤제가 소장한 편자 미상의 〈패림 稗林〉이 1969년 탐구당에서 영인·간행되면서 제6집에 실려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1972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허균전집〉을 발간할 때 함께 수록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총 108칙(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순수한 시화 및 시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99칙, 시인의 인물됨·문장·학문 등을 논한 것이 9칙이다. 본문 아래에는 소주(小注)를 붙여 작가를 소개하거나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참고로 실었는데, 이것은 판본에 따른 필사자의 서술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선집 내용이 시사하고 있는 시대적 의미는 당시(唐詩)로 돌아갈 것을 주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이래로 당대의 문단이 한결같이 소동파·황정견 등의 송시풍(宋詩風)을 추종하고 있었던 데 반해 허균은 이 저술에서 그 시대 새로운 경향의 하나인 학당파(學唐派)의 흐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서술했다. 당시풍 중에서도 유미주의적 만당(晩唐)이 아닌 이백·두보 등의 성당(盛唐)을 학당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견지에서 조선 학당파의 계보를 밝혔다. 즉 조선 문단의 학당파는 이주·김정으로부터 시작해 소재 노수신, 호음 정사룡, 지천 황정욱(소·호·지)으로 인해 그 규모가 갖추어지고, 이어서 이달·최경창·백광훈 등 이른바 삼당 시인이 출현하면서 완성을 보아 허봉·허난설헌·권필·백대붕 등에게로 계승되었다. 동시에 허균은 이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어 소·호·지 5칙, 삼당 시인 18칙, 허봉 25칙, 허난설헌 6칙 등 학당파의 시평 및 시화에 저술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허균의 시론이 내포하고 있는 학당의 진정한 의미는 얼마나 정교하게 당시를 모방하는가의 문제라기보다 당시의 습작과정을 거침으로써 자득(自得)의 경지를 개척하려는 데 있다. 송시의 본질적 특성인 재도적(載道的)·설리적(說理的) 경향이 극단으로 흐르면서 시가 점점 문의 성격을 띠게 되는 데 반기를 들고, 가장 이상적 시의 전범인 당시를 배움으로써 이러한 병폐를 극복하여 결과적으로 시의 경지를 높이려는 차원의 것이다. 이러한 시관으로 인해 비평의 초점은 자연히 내용 그 자체보다는 작품의 종합적 풍격에 맞추어졌다. 시의에 대한 품평과 함께 표현·수사·시어·성률 등 시가 지니는 전체의 미적 구조가 어떠한가에 따라 작품의 우열을 논하는 심미 비평으로 일관했다. 비평방법으로는 청신(淸新)·호방(豪放)·기건(奇健) 등, 시의 풍격 여하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해내는 전통적 비평용어인 시품을 일관되게 구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4. 학산초담

5. 1589년(선조 22년).

6. 15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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