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사)우리 역사학당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역사침탈의 실상 스크랩 중국 봉래 고려선박과 우리나라 해양문화유산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51 13.08.21 17: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국 봉래 고려선박과 우리나라 해양문화유산  

 

고려선박 확인과정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여 전인 2005년 12월 16일은, 필자가 속해 있는 전남 목포시 소재 국립해양유물전시관과 교류협정을 맺고 있는 중국 산동성 봉래시 문물국의 초청으로 봉래시를 방문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전날, 귀한 손님은 그 지방의 명주(銘酒)를 반드시 많이 마셔야 한다는 봉래시청 간부들의 강권으로 인해 폭음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필자는 이날 아침 미쳐 주기가 덜 풀린 상태로 문물국 부국장과 과장의 인도로 허름한 창고로 안내되었다.

...꼭 보여주고 싶고,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창고는 과거 대형의 식당 건물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두운 창고 1층에는 수 십 개에 이르는 대형의 목재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 한 눈에 고선박(古船舶)의 선체편(船體片)임을 짐작한 필자에게 문물국 과장은 여름부터 12월초까지의 기간에, 그 창고에서 백 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발굴한 고선박이라는 것과 발굴자와 관련 학자, 언론사 외에는 공개를 한 바가 없으며, 더더욱 외국인에게는 처음으로 보여주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눈에 익숙한 우리나라 고려시대 전통선박의 맨 아랫부분인 저판(底板) 부재(部材)들이 눈에 들어왔고, 몇몇 목재에서 나무못이 박혀 있음을 발견한 필자의 입에서는 지체없이 ‘우리 배’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당황해 하던 문물국 직원들의 행동이 갑자기 빨라지더니 2층으로 잠깐 올라가서 자문을 받을게 있다고 하였다.

...그 건물의 2층 한 방으로 안내되어 기다리자, 낯선 사람이 유물 한 점을 들고 왔는데 고려 청자(엄밀히 말하면, 상감분청대접을 포함하므로 고려말~조선초에 해당하는 유물이나, 여기서는 고려말로 통일하여 기술한다)를 안고 오는게 아닌가. 자기네들은 잘 알 수 없는 유물이 그 배에서 나왔다는 설명에 대하여 감정 결과를 말해주자 또 다른 사람이 조심조심하면서 유물 한 점을 들고 왔는데,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흔히 사용하였던 ‘장군(缶)’이었고, 설명을 마치니 큰 ‘대호(大壺)’를 두 사람이 들고 오고, 나중에는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수 십점의 유물을 들고 왔는데, 중국의 자기와 고려 청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필자를 시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중국 자기를 섞어서 고려의 유물들과 함께 가져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 중국에서 고려 배를 발견하다니 !
...600 여년 전의 고려의 범선(帆船)이 이곳 등주 수성(登州水城) 내에서 침몰된 채로 발견된 것이다.

...산동반도의 콧등에 위치한다는 봉래에서 우리 선조들의 배가 훼손이 심하지 않은 상태로 선원들이 직접 사용하였던 유물과 함께 출토된 것은 고려왕조 해양경영의 실체를 해외에서 확인한 첫 예인 셈이었다.

...봉래시의 간부들은 필자의 지적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고, 목제선박이 더 이상 부식되지 않게 할 수 있는 선체편에 대한 보존방법과 복원방식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면서도 일체의 내용을 비공개로 해줄 것을 거듭 요청하였다.

...그후 2006년 5월, 필자는 다시 한번 봉래를 방문하였는데, 2005년 7월부터 11월까지 중국의 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모두 3척의 배가 발굴되었으며, 한 척은 명나라 초기의 전선이며 나머지 두 척은 확인이 안된 배라는 발굴자들의 공식적인 중간 결과를 파악할 수 있었고, 봉래시의 요청으로 우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의 수중발굴 전문팀장과 보존처리 전문가를 2006년 7월에 보름간 파견하여 고선박의 보존처리와 복원, 전시 등에 관한 자문을 하게 하였다.

...우연인지, 봉래에서의 발굴 시기와 동일한 기간인 2005년 8월~9월 우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도 전남 신안군(新安郡) 안좌도(安佐島) 앞에서 고려시대 말기의 선박 '안좌선(安佐船)'과 고려청자 등 선원들이 직접 사용하였던 유물을 발굴한 바 있었다. 공교롭게도 동일한 시기에 중국과 한국 양측에서 고려시대인 14세기 말엽의 선박을 발굴한 것이었다.

...그러나, 궁금했던 선박의 발굴 과정 등 세세한 내용은 알 수 없는 상태였고, 2006년 8월 중순 산동성 문물국과 산동성 고고연구소 그리고 봉래시 문물국 3개 기관이 합동으로 주최하는 국제학술대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봉래고선에 관한 국제 학술대회(2006년 8월 22일 ~24일) : 고려선박으로 공인

 

한국의 조선공학자(造船工學者), 고선박사(古船舶史) 연구자 등과 함께 학술대회 초청을 받아 2006년 8월 다시 봉래를 찾게 된 필자는 2박 3일간 10여개 국가의 학자들과 봉래고선과 자국의 고선박 등에 관한 발표와 토론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필자의 발표주제는 ‘한국 안좌도선과 중국 봉래 3호선 비교 연구’. 당연히 중국측 학자들은 필자의 발표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학술대회에 참석한 날에서야 비로소 고선박 발굴에 관하여 상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발굴보고서를 받아볼 수 있었는데, 보고서를 작성한 산동성의 고고학자와 보고서의 부록에 실은 중국 고선박 연구자들의 논문이 서로 다른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고고학자는 발굴된 3척 모두 중국의 선박으로 기술하였고, 고선박 연구자들은 중국과 한국의 선박 제조기술이 혼용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기에 한국측 학자의 발표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발표에서 필자는,
중국의 고선박은 용골[龍骨 ; 선박 저부 구조의 중심이 되는 대형 목재로 중국 고대선박의 특징적 구조물이며, 한옥(韓屋)의 대들보와 같이 핵심적 기능을 함]을 사용하나, 봉래 3호선은 한국의 전통적 구조인 저판형식(底板形式 ; 저판 3개, 폭이 넓은 판재 3매를 연결하여 배의 저부를 이룸)임
판재와 판재를 잇는 방식에서 중국은 쇠못을 사용하나 고려에서는 나무못을 사용하는데, 봉래의 고선에서도 기본적으로 나무못을 사용하였고
배의 저부에서 외판을 연결함에 있어서 한국의 전통적 방식인 어린식(魚鱗式 ; 물고기 비늘의 형상)을 적용한 점
고려시대의 선박은 모두 소나무를 사용하고 중국은 마미송 등의 목재를 주로 이용하였는데, 봉래고선은 소나무로 제작된 점 등등의 구조적 특징 외에,
봉래고선 내에서 고려청자와 질그릇인 호, 장군 등 고려 선원들이 배 안에서 실제 사용한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점은 수중고고학적 측면에서 선박의 제작, 사용 국가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물이라는 점 등을 제시하였다.

...특히, 발굴보고서의 오류를 조목조목 비판함에 이르러서는 학술회의장의 열기가 매우 뜨거워지기까지 하였는데, 학술대회의 좌장(座長)이자 중국 고선박의 대가인 노교수(老敎授)는 필자의 견해에 적극 찬동하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하고, 마침내 총평 시간에 발굴보고서의 내용이 잘못되었고 반드시 한국에서 온 김 관장의 의견대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봉래의 옛 지명은 등주이다. 해안에는 조그마한 만(灣)이 형성되어 있다. 만의 좁은 입구와 주변 지형을 이용하여 성곽을 쌓았는데, 바다로의 출입부는 석축의 수문을 만들고 수문 위로 성곽과 성곽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어 배의 출입을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이름하여 등주수성인데, 우리나라와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실크로드’의 중심항구이자 군사적 기지였다.
...진시황(秦始皇)의 명을 받아 서복(徐福)이라는 사람이 수 천명의 남녀를 이끌고 등주항을 출발하여 불로초를 찾으러 떠난 항구로 유명하며, 신라시대에는 신라방(新羅坊)과 신라소(新羅所)가 설치되는 등 우리나라와의 중요 교류 항구였으며, 북송과 원대에 수군기지를 설치하였고, 명대에 이르러 왜구를 격퇴하기 위한 수성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른다.

...명대에 건설되어 지금껏 대체로 그 원형을 유지해 온 봉래각은 우리나라로 치면 국보에 해당하는 문화재로 중국 4대 명루(名樓) 중 하나이며, 성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봉래각에 오르면 드넓은 황해가 바로 눈 아래로 펼쳐진다. 봉래각 내에는 8명의 신선들이 술 취한 모습을 한 조각상이 있고, 봉래는 원래 해신(海神)과 신선들이 노닐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휴양과 관광지로도 저명하여 중국 각지와 외국에서 연간 800만명에 달하는 관광객이 거쳐 간다고 한다.

 

 

봉래시에는 1980년대에 발굴한 봉래 1호선[원대의 전선(戰船)]이 있고, 금번의 발굴로 2호선·3호선·4호선 3척의 배가 추가되었다.

...과거 등주라는 항구와 매우 가까운 곳에서 침몰직전의 상태에 놓이게 된 배를 예인하였거나 아니면 항구에 정박한 상태에서 침몰되어 있던 배를 2005년에 이르러 수중발굴이 아닌, 주변의 바닷물을 차단시켜 육상발굴을 실시하는 방식으로 발굴하였다.

 

 

 

 

이중 2호선은 1호선과 마찬가지로 전선(戰船)이고, 3호선과 4호선이 고려선박이다.
3호선의 배 안에서 선원들이 직접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출토유물로 보아 3호선은 사신단들의 왕래를 목적으로한 배라기 보다는 무역선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4호선에서는 추정의 단서가 될 만한 유물을 제시하지 않아 용도는 알 수 없다.

...3호선은 3열의 저판을 갖추었고 저판과 저판의 연결은 장삭 (長 : 긴 나무못)으로 3개의 저판을 관통시켜 연결하였다. 나무못은 상수리나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선체의 잔존 길이는 17.2m, 폭은 6.2m로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선박 중 최대 규모이다.

...저판의 길이는 15.73m이고, 앞 부분이 휘어져 올라가며, 너비 58cm~62cm, 두께 22cm 정도로, 너비와 두께는 선미와 선수 방향으로 갈수록 점점 줄어들어서 선수부 너비 약 1.25m, 선미부 너비 약 0.8m이다. 외판의 연결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어린식으로 연결하고 밤나무로 만든 나무못을 이용하였다.

...중국의 고선박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못을 이용한 연결방식은 염분이 가득한 바닷물에 의해 쇠못을 박아 연결한 부분의 부식을 사전에 방지하는 방법으로, 선박건조 기술에 있어서 우리 선조들의 과학적이고 지혜로운 창안을 엿볼 수 있다.

...선박 내부에는 전통적인 고려선박에서는 볼 수 없었던, 횡으로 격벽(隔璧)이 5개 남아 있었는데, 중국 선박에서 많이 보이는 양식인 바, 원거리 항해를 위한 선체의 보강시설로 판단되었다. 이 격벽의 존재는 우리나라 선박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으로 향후 우리나라 전통선박의 구조연구에 좋은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생각된다.

...4호선은 저판과 외판 등 4편의 선체편이 남아 있어 전모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저판의 결구방식이 장삭을 사용하였고, 돛대자리가 전통적인 한선의 구조를 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배로 선체의 잔존길이는 480cm, 폭 196cm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아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 13건의 수중발굴을 실시하였는데, 그중 7척의 고선박이 수중발굴에 의해서 인양되었다.

...그 중 2척이 중국 배이고 나머지 5척 모두 고려선박이다. 고려선박 5척이 공히 배 밑이 평평한 평저형식으로 지금까지는 중국 배처럼 밑이 뾰족한 첨저형이 아니라서 속도도 느리고, 원양항해는 불가능하고 연근해만 출입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금번의 봉래 3,4호선의 발견으로 인해 이러한 지견을 일거에 불식시켜 버린 의미가 있다.

...또한 봉래고선 중 고려선박의 실체 확인은 향후 고선박사 연구에 있어서, 밑이 평평한 구조를 갖춘 평저형의 배가 첨저형의 배와 비교하여 보다 많은 인원과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장점이 있음을 상기하여 배의 구조와 원양항해에 관련된 문제를 숙고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고려시대 수도인 개경의 항구로 저명한 벽란도 등지에서 배로 중국으로 간 뱃길이 연안항로인 발해만에 붙어서 이동했다는 지금까지의 통설보다는 직항로를 선택했을 것이라는 점 등 고대 항로에 대한 문제도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① 신안 방축리 해저발굴 (1976~1984년)
② 제주 신창리 해저발굴 (1980, 983, 1996년)
③ 태안반도 해저발굴 (1981~1987년)
④ 완도 어두리 해저발굴 (1983~1984년)
⑤ 진도 벽파리 고선박 발굴 (1991~1992년)
⑥ 목포 달리도 고선박 발굴 (1995년)
⑦ 무안 도리포 해저발굴 (1995~1996년)
⑧ 군산 비안도 해저발굴 (2002~2003년)
⑨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2003~2004년)
⑩ 신안 안좌도 고선박 발굴 (2005년)
⑪ 보령 원산도 해저발굴 (2005년)
⑫ 군산 야미도 해저발굴 (2006년)
⑬ 안산 대부도 고선박 발굴 (2006년)

 

 

 

수중발굴현황

 

연번

조사년도

조사지역

인양유물

발굴기관

1

1976~1984

신안 방축리

元代 배 1척, 宋元대 도자기 등 2만 3천 여점

문화재관리국·해군

2

1980~1996

제주 신창리

12~13세기 금제장신구류 등

문화관리국·제주대

3

1981~1987

충남 태안반도 근해

14세기 전반 고려청자 등 50 여점

문화재관리국·해군

4

1983~1984

완도 어두리

고려 배 1척, 11세기 후반 고려청자 등 3만 여점

문화재관리국

5

1992

진도 벽파리

중국 통나무배 1척, 동전 8점

국립해양유물전시관

6

1995

목포 달리도

고려 배 1척

국립해양유물전시관

7

1995~1996

무안 도리포

14세기 후반 고려청자 등 639점

국립해양·해군합동

8

2002~2003

군산 비안도

12세기 고려청자 등 3,178점

국립해양·해군합동

9

2003~2004

군산 십이동파도

고려 배 1척, 12세기초 고려청자 등 8,743점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0

2005

신안 안좌도

고려 배 1척, 14세기 고려청자 등 3점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1

2004~2005

충남 보령 원산도

13세기전반 국보급 고려청자편 1,000여점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2

2006

군산 야미도

고려청자 등 780여점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3

2006

안산 대부도

고려 배 1척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수중발굴현황

 

 

분류

조사년도

시대(세기)

잔존규모(m)

선형

인양유물

신안선

1976~1984

14

길이 28.4, 너비 6.6, 깊이 3.6

첨저

송원대 도자기

등 2만 3천여점

완도선

1983~1984

11

길이 10, 너비 3.5, 깊이 1.7

평저

고려청자 등 3만 여점

진도선

1991~1992

13~14

길이 14.3, 너비 2.3, 깊이 0.8

통나무배

중국동전 8점

달리도선

1995

14

길이 10.5, 너비 2.7, 깊이 0.8

평저

밧줄 등 선상용품

십이동파도선

2003~2004

12

길이 7.0, 너비 2.5, 깊이 0.8

평저

고려청자 8,700여점 등

안좌선

2005

14

길이 14.5, 너비 6.1, 깊이 0.9

평저

고려청자, 선상용품 등

대부도선

2006

12-13

길이 6.7, 너비 1.4, 깊이 0.1

평저

고려청자 등

 

우리나라 해양사 약사

 

일찍이 우리나라는 선사시대의 유적인 울산 반구대(盤龜臺) 암각화에 새겨져 있는 고래잡이 배(포경선)를 필두로 3면이 바다인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인해 삼국시대의 백제와 신라, 고구려는 해상을 통한 중국과 일본 등 국제교류를 왕성하게 하였다.

...그 한 예로 경주시에 소재하는 고분중 가장 큰 봉분을 자랑하는 ‘황남대총’이라는 옛 신라 왕의 무덤에서 지금의 오키나와 부근에서만 잡히는 ‘이모가이’라는 고동을 장식품으로 사용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신라의 해상활동 영역이 오키나와에까지 미쳤다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는 경쟁적으로 중국이나 일본과 바다를 통해 교류를 했던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의 청해진 대사 장보고 장군에 대한 일본 승려의 기록(『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장보고 선단의 배가 쏜살같이 지나갔다고 할 정도로 속도가 빠른 배로 동북아시아 해상권을 제패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장보고 대사의 해양활동 전통을 이어받은 고려는 우리 역사중 가장 활발한 개방정책 하에 국제적 해상교류를 하였고 그 결과로 Corea라는 국명이 유럽에까지 전해졌던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서 · 남해안의 갯벌에 지금도 수 많은 고려 선박과 청자들이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지도 : 해저유적 발굴과 신고 현황 참조).

...또한 조선시대의 임란 때엔 그러한 해양 조선술과 항해술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와 이순신 장군이 지휘했던 거북선과 판옥선은 섬나라 일본의 거함과 전선들을 무수히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중문화재의 보존과 보호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제일의 조선강국이다. 요지부동의 일등 조선국가라는 영예는 일찍이 ‘해양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국가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동서양의 역사적 교훈처럼 앞으로 우리나라의 장래는 매우 밝다고 생각한다.

...봉래 고선의 발견으로 이제 고려시대의 배도 4척에서 7척으로 늘어났다.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질적으로 수준 높게 진전이 더 되어야 하겠고, 나아가 중국 외에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고려선박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수중발굴 전문기관이자 해저출토 대형 목제유물의 보존처리 분야에 있어서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국가적 경쟁력을 갖춘 우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숙원사업이던 수중발굴 전용선박(SEA MUSE號 : SEA MUSE는 해양 박물관 또는 해양의 지혜와 학예(學藝) 분야의 여신이라는 뜻, 19톤, 35노트)을 아시아권에서는 최초로 건조, 2006년 11월 9일 취항식을 시작으로 운행 중에 있다.

...1970년대부터 2006년까지 전국 해안 216곳에 달하는 해저에서의 유물신고가 접수되었는 바, 지금까지 많아야 1년중 2회 밖에 수행하지 못했던 수중발굴이 금년부터는 SEA MUSE호와 함께 최소 연간 4회 이상 실시되어 매우 활발하게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소중한 우리의 수중문화유산에 대한 해저도굴이나 밀매(수 년전, 대마도 인근 해상까지 우리의 해양경찰이 모 선박을 추적한 끝에 해저도굴된 문화재를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려했던 시도를 극적으로 저지한 적도 있었다)가 끊이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수중발굴 전용선의 운용은 수중문화유산의 보존, 보호 활동에 박차를 가할 계기가 될 것이다.

...국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란다.

 

 

작성자 : 전시홍보과 학예연구관 김성범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