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5년 6월, 파리 탕플 감옥에서 열 살의 고아 소년이 사망했다. 온 몸은 상처 투성이였고 폐결핵과 종기로 부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루이-샤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루이 17세였다.
부모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후 지난 2년간 그는 좁은 감방에 갇혀 있었다. 화장실이 없어 자신의 분뇨가 쌓인 방 안에서 프랑스 혁명 찬가를 부르고 어머니를 저주하는 말을 강제로 외워야 했다.
그의 죽음 뒤 200년 간 수많은 소문이 뒤따랐다. 그의 감방에서 욕조가 몇 개나 나왔으며 그 안에는 살아 있는 소년이 들어 있었다는 둥, 소년은 감옥을 탈출했다는 둥, 죽은 소년이 대역이었다는 둥. 그리고 왕정이 회복되자 '내가 루이 17세'라고 주장하며 나선 이들이 백여 명에 달했다. 자신의 묘비에 '루이 17세 여기 잠들다'라고 새긴 이도 있었다.
루이 17세의 시신은 비석도 없이 공동매장 되었다. 그의 유골은 찾지 못했지만 심장은 그 후 200년 간 세상을 떠돌았다.
당시 프랑스 왕실에서는 죽은 왕족의 심장을 분리해 보관하는 전통이 있었다. 루이 17세의 부검을 집도한 의사 필리프 장 펠르탕은 몰래 소년의 심장을 빼 알코올에 보관했다.
심장은 펠르탕의 조수가 훔쳐갔다 돌려 주었고 파리 대주교가 보관하다 1830년 혁명의 혼란 중에 심장을 담은 알콜 수정구가 땅에 떨어져 깨졌다. 스페인으로 보내진 심장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1975년에야 프랑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심장이 정말 루이 17세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관한 책만도 500 권이 넘었다.
의혹은 많았지만 당시에는 상태가 좋지 않은 심장에서 DNA를 추출할 기술이 부족했다. 그러다 1983년 어느 금요일 밤, 캘리포니아의 한 고속도로 위에서 해결책이 발견되었다.
생화학자 캐리 멀리스는 여자친구와 주말을 보낼 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자친구는 잠들었고 그는 멍하니 핸들을 움직였다. 머리 속은 연구 중인 DNA 합성으로 가득차 있었다.
당시에는 DNA 조각을 증식시키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방법도 복잡했다. 비용도 천문학적이었다. '좀 더 쉬운 방법이 없을까...' 그가 갑자기 갓길에 차를 세웠다.
"DNA를 가열해 두 가닥을 푼 다음 원하는 부분만 복사하면?"
그는 연필을 꺼내 계산해 보았다. DNA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되니 30~40번만 반복하면 시험관 가득 새로운 DNA가 쌓이게 될 것이다.
"나는 노벨상을 받게 될거야." 그는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이것이 PCR(Polymerase Chain Reaction, 중합효소 연쇄반응) ,즉 DNA 복사기의 탄생이었다. PCR로 단 몇 시간 만에 몇 개의 DNA 조각만으로 수백만 개의 DNA 사본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극소량의 머리카락에서 추출한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이 가능해졌고 고인류의 뼈에서 0.06ng의 극미량 DNA로도 신뢰도 있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이는 곧 유전공학의 기본이 되었고 "지난 50년 간 법의학 분석에서 가장 위대한 진보"라는 평을 얻었다.
1999년, 연구진은 루이 17세의 심장 조직과 오스트리아에 보관 중이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카락에서 DNA를 추출했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어머니로부터 자녀에게로만 물려지므로 모계 혈통 추적에 사용할 수 있었다.
심장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머리카락과 완전히 일치했다. 심장이 루이 17세의 것이며 그가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음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심장은 2004년에 파리 교외 생드니 대성당, 부모의 곁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