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디토씨의 음악여행수첩] 세계 최고 테너의 ‘나비넥타이’

[휘목]

독일인들의 검박함은 유명하다. 실리를 숭상하고, 허세를 배격하며, 남에게 과장되게 보여 지는 걸 별로 원치 않는다. 일전에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슈퍼마켓에서 수행원 없이 손수 장을 보는 모습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보도사진을 들여다보니 총리의 단골로 소개된 슈퍼는 ‘울리히(Ulrich)’였다. 베를린 시절 나도 자주 갔던 슈퍼 체인이다.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 꽤나 저렴한 상품들이 가지런히 모아져있는 곳이다. ‘알디’, ‘페니막트’ 같은 다른 저가 체인 슈퍼들과 함께 베를린 서민들의 1번지 장터로 사랑받는 명소다. 당연히 유학생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잔뜩 몰리는 곳이기도 한데, 특히 지하철 ‘초’(Zoo,동물원)역에 있는 지점은 일요일에도 영업을 하기 때문에 24시간 편의점 등에 대한 짙은 향수(?)에 젖어 있는 한국 유학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한다. 여튼 그런 곳에, 일국의 총리가, 게다가 EU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독일 연방공화국의 총리가 수십 년째 단골로 장을 보고 있다고 하니, ‘과연 독일인이다’라는 짧은 감탄이 나왔다.

(메르켈 총리가 독일을 국빈 방문한 리커창 중국 총리와 함께 울리히 슈퍼에서 쇼핑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런 검박한 태도가 뭔가 민족적인 특성인가하면 그건 또 전혀 아니다. 당장 같은 핏줄들이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를 가 봐도 삶의 태도가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가령 수도 빈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여기는 아직도 ‘허세의 왕국’이다. 집들이 때 과시용으로 사용할 고가의 가구를 빌려주는 가구 렌탈 전문업체는 아직도 짬짬이로 성업 중이고, 빈 시민들의 명함 속에 새겨진 그들의 직함은 지금도 2줄 이상씩으로 장황하고 모호하다. 예를 들어 ‘전권특명대사이자 탁월하고 전능한 공학박사’라는 터무니없는 명함을 들고 다니는 뻣뻣한 태도의 공무원은 알고 보면 외무부에서 근무하는 기술담당 실무 사무관일 뿐이다.

여튼 나는 둘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느 쪽이든 나름 그들의 삶을 제대로 즐기며 살아가는 건 확실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뮌헨 공항에 내리면 출장을 다녀온 남자들이 편한 캐주얼 자켓에 병맥주 한 잔을 나눠 마시며 시내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게 되고, 빈의 슈베하트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갈라 치면 빳빳하게 잘 다린 네이비 컬러의 스리피쓰 수트를 제대로 차려입은 신사가 동양인 여성에게 유창한 일본어 내지 한국어 ‘몇 마디’를 연신 구사해가며 자신의 국제감각을 자랑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게 된다.

(요나스 카우프만의 푸치니 콘서트. 2015년 6월 밀라노 스칼라)

지난 달이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테너로 불리는 요나스 카우프만(Jonas Kaufmann)의 밀라노 스칼라 극장 푸치니 콘서트가 영상으로 나왔다. 웬일인지 아직도 국내에는 출반이 안 되어서 멀리 외국에서 공수를 해 왔다. 세계 최고의 테너답게 카우프만은 당당한 음성으로 푸치니의 주요 아리아를 찬란하게 노래해 나갔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응? 어딘지 모르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그건 그가 매고 있는 보우타이, 그러니까 ‘나비넥타이’의 매듭이었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보우타이를 맬 일이 거의 없다. 외국에서 공연을 볼 때, 그것도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특별한 페스티벌이나 기념비적인 갈라 콘서트 등을 볼 때만 보우타이를 매게 된다. 그런데 보우타이를 해 본 분들은 알 것이다. 내추럴 보우타이를 제대로 매려면 꽤나 연습이 필요하다. 게다가 일년에 기껏해야 한 두 번 정도 보우타이를 매게 되니 별로 실력이 늘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예 ‘플랜B’로 미리 매듭을 잡아놓고 고리로 걸기만 하면 되는 이른바 ‘프리타이(pre-tie)’를 하나씩 더 들고 다니곤 하는데, 이게 또 묘하게 남자의 자존심을 긁는다. ‘그래도 밀라노나 빈에서는 꼭 내추럴 타이를 매야지. 뉴욕 정도면 갈고리 타이를 써도 되지 않을까?’ 뭐 이런 허세작렬의 자기 규칙을 만든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여튼 평소 프리타이 실전 사용자로서 말하자면, 이 갈고리 타이와 내추럴 보우타이 간의 차이점은 분명한데, 프리타이쪽이 매듭이 작고 옹골지며, 좌우 비율이 완벽하게 나온다. 즉, 만들어서 짜맨 인위적인 티가 확실히 난다는 이야기다. 내추럴 타이는 좌우 비율이 부정형이며, 매듭의 크기도 더 크고 풍성하다.

여튼 세계 최고의 테너에다, 원 스테이지 개런티만도 어마어마한 카우프만의 목에 달린 보우타이가...아무리 살펴 봐도 ‘갈고리 타이’의 냄새가 계속 나는 게 아니겠는가. 에이, 거 아닐 꺼야. 설마 세계 최고의 테너가 무슨 유치원 학예회도 아니고 프리타이를...그래, 음악이나 계속 듣자.

그는 역시나 찬란하고 힘찬 음성으로 청중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연이어 몇 곡을 노래한 앵콜도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운명의 마지막 앵콜 곡, 누구나 예상했듯이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 Nessun Dorma’가 나왔다.

(노타이로 마지막 앵콜을 열창한 카우프만)

뚜벅뚜벅 씩씩하게 무대로 걸어 나온 카우프만이 지휘자의 도움을 받아 갑자기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어? 아! 역시나! 그건 갈고리형 프리타이였다. 나의 ‘매의 눈’을 감탄해야 할지, 이 수더분한 매너의 성실한 테너가 지닌 소박한 인간미에 다시 한번 감탄해야 할지. 여튼 그는 노타이인 채로, 뜨거운 용광로와도 같은 음성으로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포효하듯 노래했다. 게다가 1절의 중간부와 유명한 후렴구 가사를 헷갈리는 역사적인 해프닝도 함께 저질러 즐거움과 감동은 두 배가 되었다.
(혹시나 관심 있으신 분들은 Youtube에 올라온 당일 관객들의 비공식 촬영 영상을 참고삼아 보셔도 좋겠다. 물론 이런 식의 무단촬영은 반드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푸치니 ‘공주는 잠 못 이루고’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BBC Proms 실황.
여기선 내추럴 보우타이를 매고 있다 ^^;)

이탈리아 남자가 독일인처럼 행세하는 건 어색하다. 독일인이 이탈리아인 특유의 ‘bella figura’를 흉내 내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기만성형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노래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최고 스타이지만, 뉴욕에서도, 파리에서도, 밀라노에서도 그는 자신이 ‘건실한 뮌헨 출신의 남자’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수더분한 인간미가 찬란한 음악 속에서 더욱 빛났던 밤이었다. 이참에 나도 올 여름 휴가땐 갈고리 보우타이 하나만 챙겨서 가볍게 떠나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