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도 노벨평화상이 인도의 아동보호운동가 카일라시 사티아르시와 공동으로
17세의 파키스탄 인권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위 사진에서 오른쪽에 앉아 있는 분) 양에게 돌아갔다.
역대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말랄라 양의 선정은 참으로 신선하다.
파키스탄의 모든 소녀들에게도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달라는 그녀의 호소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그녀의 인권운동은 유엔총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 등 세계 지도자들과 지성인들의 양심을 일깨웠다.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들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억압과 차별을 받는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
종교는 영적(靈的)인 영역에 국한되어야지 현실에 개입하는 순간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
한국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비이성적 집단의 반사회활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있지도 않은 신을 내세워 지난 수만 년 동안 인류에게 자행되어왔고 현재도 자행되고 있는 온갖 범죄적 행태를 감안하면
모든 종교는 차라리 없는 게 인류의 평화안정과 발전에 훨씬 더 긍정적일 것이라는 주장이 점점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말랄라 양은 여성에게 교육을 금하는 탈레반의 폭압에 저항하다가 머리와 목에 총격을 받기도 했다.
“탈레반이 내 몸은 쐈지만 내 꿈을 쏠 수는 없어요.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사경을 헤매며 몇 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고 깨어나면서 말랄라 양이 한 첫마디였다.
지금까지 인간이 창안한 동서고금의 어떠한 신보다 더 위대하고 정의로운 의지다.
저런 인물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 심사위원들을 매수했다는 뒷말도 없을 것이며,
노벨상 수상을 노리고 적국에 퍼준 돈이 핵개발에 악용되어 평화는커녕 전쟁의 위협으로 되돌아오는 부작용도 없을 터이다. -
2007년 초, 이백천은 제천시장으로부터 간곡한 전화를 받았다.
공연의 기획‧연출 및 예산의 전권을 줄테니 청풍호반에 지어놓은 수상아트홀을 활성화시켜달라는 요청이었다.
제천시는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생겨난 청풍호반에 700석 규모의 공연장을 지어놓았는데,
접근성도 떨어지고 시청 공무원 가운데 유능한 기획자도 없어 문화공간으로서 설립목적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었다.
이 나라 공복들의 고질적인 병폐다.
인천의 월미은하레일, 용인과 의정부의 경전철, 전국 다목적댐의 물박물관 등이 모두 내 돈 아니라고 함부로 낭비한 애물단지다.
이백천은 그룹 ‘사월과 오월’ 멤버 이지민과 함께 제천시를 찾아가 공연계약을 체결한 뒤 공연장을 둘러보았다.
꼬불꼬불 산길에는 마침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하여 쪽빛 호수와 절정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었다.
외관만 보면 공연장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는 주변환경을 배경으로 호수 위에 떠 있는 수상아트홀은 시드니오페라하우스를 모방하여 매우 우아했다.
문제는 이 외진 곳으로 시민들을 유인할 알찬 공연 내용이었다.
이백천은 봄부터 가을까지 청, 풍, 명, 월, 네 번의 공연을 개최하기로 구상하고 세부계획에 들어갔다.
객석뿐 아니라 하늘과 호수와 바람까지 공연에 끌어들여 필생의 역작을 만들어보겠다는 열의가 솟구쳤다.
서울로 올라온 이백천은 대충 얼개를 짠 뒤 쎄시봉 시절부터 호흡을 함께해온 음악 동지들을 섭외했다.
모두들 이백천의 취지에 공감하여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흔쾌히 공연 참여를 수락했다,
2007년 5월 19일, ‘청, 풍, 명, 월, 콘서트’의 첫 번째 공연인 ‘청 콘서트’가 열렸다.
청풍호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노을 위로 아카시아향이 잔잔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뚜아에무아의 이필원이 부른 <추억>을 시작으로 라나에로스포의 김희진, 홍민, 둘다섯, 사월과 오월, 가람과 뫼, 하사와 병장,
장은아, 김홍경, 전영록, 이동원 등의 노래가 차례로 청풍호반을 둘러싸고 있는 월악산에 메아리쳤다.
모두가 한 시대를 풍미한 선 굵은 가수들이었다.
‘청 콘서트’의 하이라이트는 이동원과 테너 김현동이 함께 부른 <향수>였다.
비록 충북 옥천에서 탄생했지만, <향수>는 전국 어디를 가든 마치 그 고장의 주제가인 듯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어느 고장에나 옛 이야기 지즐대며 흘러가는 실개천이 있기 때문이다.
<향수>는 바로 우리 이야기요, 우리 집 이야기요, 우리 고향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동원‧김현동 커플은 전국구 대접을 받으며 오늘도 어디선가 <향수>를 부르고 있을 터이다.
마침 다른 일로 제천에 와 있던 <향수>의 작곡가 김희갑이 예고도 없이 기타를 들고 무대로 올라와 반주를 자청함으로써
이날 공연은 모든 출연자와 관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풍 콘서트’와 ‘명 콘서트’에 이어 11월 3일 마지막으로 ‘월 콘서트’가 열렸다.
‘월 콘서트’는 ‘詩, 歌, 舞’라는 콘셉트로 짜여졌다.
박남준 시인이 자작시를 낭송하면서 막을 올린 ‘詩, 歌, 舞’ 공연은
홍민, 소프라노 강명숙, 가수 겸 작곡가 김성봉, 이동원과 테너 김현동 등이 歌 무대를 달구었다.
마지막으로 舞 무대는 명창 박윤초 교수가 살풀이춤과 함께 시창(詩唱)을 불러 관객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대중가수 김성봉은 본인이 작곡한 <청풍연가>의 첫선을 보였는데, 그 노래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깃들어 있었다.
공연 1주일 전, 마지막 점검을 위해 관계자들과 함께 청풍호를 찾은 이백천에게 각중에 아이디어가 하나 번쩍 떠올랐다.
이백천은 당장 백승훈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도 공연에 참가하여 시를 낭송하기로 되어 있었다.
“백 시인. 노랫말 하나 만들어줘. 제목은 청풍연가로 하면 좋겠어.
이번 공연에서 부를 수 있도록 가사를 짓는 대로 김성봉 씨에게 작곡을 좀 맡기세요.”
백승훈은 바로 가사를 지어 작곡가 겸 가수 김성봉에게 넘겼고
이백천이 백승훈에게 전화를 건 지 여섯 시간 뒤, 김성봉은 e-mail을 통해 완성된 악보를 이백천에게 보냈다.
<청풍연가>의 탄생비화는 이처럼 멋들어지지만, 가사와 멜로디는 별로이니 찾아 들어보고 실망하는 노고를 접기 바란다.
1978년 8월,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걸고 박정희 식 경제개발에 진력하던 중국 국가주석 등소평이 일본을 국빈 방문했다.
그는 한국의 포항제철 성공신화에 질투와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던 터라 가장 먼저 신일본제철을 찾았다.
경제개발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에도 제철산업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등소평은 이나야마 사장에게 ‘중국에도 제철소를 세우도록 기술협력을 해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이나야마 사장은 의전도 무시한 채 단호하게 거절했다.
“중국에는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어서 제철산업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제천의 수상아트홀도 박희구 같은 인물이 없어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제천시 공무원 가운데서 희구처럼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공연을 기획‧운영할 수 있는 헌신적인 인물이 나와야 한다.
언제까지 연간 10억 원 넘게 들여서 외부 전문가에게 공연을 일임하겠는가.
2007년에는 다음해 시장선거를 겨냥하여 시민들의 표심을 사기 위해 무리하게 예산을 쏟아부었겠지만,
재정자립도도 낮은 제천시가 매년 그렇게 하다가는 제천면으로 강등되기 십상일 터이다.
다음으로는 입지 선정이 잘못됐다.
겉보기만 번드르르했지 접근성이 떨어져 웬만한 볼거리로는 시민들을 유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경군민문화회관은 참으로 자리를 잘 잡았다.
아무리 문화에 목이 말라도 문화회관이 진남교반에 있다면 점촌사람들이 몰려가겠는가.
길은 처음 닦기가 어렵지 한 번 난 길은 뒷사람이 가는 데 더없이 안전하고 편한 법이다.
이후에도 이백천은 전국 각 지자체의 요청에 따라 진도 광주 일산 등지에서 청풍명월 콘서트 같은 공연을 계속 열고 있다.
그러나 문화를 골고루 배분하는 효과는 있지만 가요사에 큰 의미는 없어 생략한다.
그리고 이백천에게나 지금까지 이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얘기지만,
「이백천의 음악여행」보다는 조영남의 「쎄시봉 친구들」이 훨씬 가슴에 와 닿는다.
조영남의 글은 좌고우면이 없어 사람냄새가 풍기고, 이백천의 글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지자랑냄새가 풍긴다.
특히 과장인지 오류인지 통계에도 여기저기 오류가 있어 신빙성에도 의문이 간다.
이백천은 1960년대 초 미8군 무대를 통해 벌어들인 연예인들의 연간 수입이 100~120만 달러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당시 우리나라 연간 수출총액인 100만 달러보다 많았다고 비교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수출총액은 혁명이 일어난 1961년 4088만 달러에서 1964년 1억 달러를 돌파한 뒤 급신장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들어가 통계청 자료를 검색하면 금방 비교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하여 이백천의 얘기를 대폭 줄이고 다음 회에 윤심덕의 비극적 최후를 덧붙이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계속)
- 청풍명월을 몹시 사랑한 어느 친구를 그리며
첫댓글 참 애 많이 쓴다. 술 한 잔 살 때쯤 됐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