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윤 감독의 『재심, New Trial, 2016, 119분』
살인 누명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밝힌 사회 고발영화
『재심』의 프레스킷은 전봇대 위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전선을 시각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적색 신호등이 켜져 있고, 속도 50km로 제한된 익산 약촌오거리가 공간적 배경이다. 2000년 8월 10일 새벽 두시, 약촌 오거리에서 택시기사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꼬여있는 사건들이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지만 관객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적 해석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
2006년 『잔혹한 출근』으로 데뷔한 김태윤 감독은 지역적 특성, 한정된 놀이 공간, 등장인물들의 정서적 흐름,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의 동선(動線)에 따라 거칠게 영화를 전개시킨다. 느린 흐름은 사건의 진행과정과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 이 사건을 대하는 방식을 대변한다. 영화적 상상력은 대공 분실의 스키마로 인권의 현주소와 이 시대 대한민국의 사법정의를 고발한다.
최근 사회고발 영화가 붐이다. 영화, TV, 소설, 미술 속에 표출된 분노는 잘 정제되고 슬기롭게 지속적으로 활용된다면 선진사회를 위한 좋은 지침이다. SBS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는 잊혀진 사건의 진실에 대한 의문점을 제시함과 아울러 많은 콘텐츠를 제공해왔다. 『재심』도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휴머니즘을 바탕에 깔고 사건을 전개시킨다.
부드러운 이미지의 두 연기자의 변신, 영화에서 사건을 끌어가는 중심축은 돈과 빽없는 벼랑 끝 변호사 준영(정우)과 경찰의 강압수사로 십년을 살인자로 살아온 목격자 현우(강하늘)이다. 상류사회(대형로펌)의 끝물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비상을 원하던 변호사는 낮은 곳에서 자신의 양심을 발견하게 되고, 자포자기로 살아가던 청년은 누명을 벗을 용기를 얻는다.
이 영화의 두드러진 장점은 수사적 기교의 외면적 장식보다는 거칠지만 진실에 접근해가는 심리변화의 흐름을 잘 컨트롤 해내는 연출의 힘이다. 사려 깊은 연출은 클로즈업과 인공광(人工光) 마저도 진실의 원칙을 위배한다는 사진가의 철학처럼 최대한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문명적 기기의 이점을 최대한 배제하고 영화를 투박한 질그릇 굽기처럼 다룬다.
준영은 호구지책으로 무료법률서비스 도중 증거 조작, 강압 수사에 의한 자백으로 목격자가 살인범로 뒤바뀐 기막힌 스토리를 듣게 된다. 마음의 유동(流動), 준영의 끈질긴 설득 끝에 현우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폭력에 의한 거짓 자백의 실체는 밝혀진다. 작은 힘과 용기가 이루어낸 성취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온 관객들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리얼리즘의 변주, 영화에서의 등장인물의 심리변화, 악인이나 탕자의 ‘개과천선’은 종교나 철학에서 다루는 미덕중의 하나이다. 이 영화에서는 악역을 했던 형사들의 개과천선 내용은 없고, 고군분투하는 힘없는 소시민들의 억울함과 고군분투만 있을 뿐이다. 소중하게 다루어져야할 인권이 사라지고, 불법 체포, 감금, 폭행이 난무했던 시대의 우울한 풍경이 담겨져 있다.
『재심』은 인간학을 다루는 교재의 기능을 하며 양심과 의식을 깨우쳐가는 보통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다. 익히 알려져 있으면서도 잊혀져간 사건들을 재해석하고 구성해내는 힘, 사건 당시의 분위기와 느낌을 공유하고자 하는 짜임새 있는 미장센, 공간감을 살리는 촬영, 극중 역할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연기들이 믿음을 주는 기본 요소들이다.
황당무계한 권력(경찰과 검찰, 법원)의 횡포, 목격자인 동네다방 배달아르바이트 소년을 살인자로 둔갑시켰던 사건은 2003년 6월, 진범이 밝혀졌지만 ‘증거 없는 자백’이라는 이유로 삼년 만에 풀려난다. 2001년 항소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상고하지 않아 만기 복역한 사건은 2016년 11월 17일 광주고법 제1형사부(노경필 부장판사)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상징적 의미의 공간 명칭인 판도라 다방, 대형로펌 회사 테미스(Themis), 갯벌의 의미를 헤아리며 『재심』이 화두로 던지는 진실의 실체, 부와 명예, 사법정의의 본질을 접하게 되면 빙판의 균열 같은 아찔함을 맛보게 된다. 영화에서 이런 자극은 익숙한 코드로 단련이 되어있지만, 실화가 주는 메시지는 배반이 이글거리는 사회에서도 믿음이 살아있음을 밝힌다.
『재심』은 감독의 놀라운 평정심, 의도된 투박한 장치들로 장르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엉킨 시대를 조망하는 능력을 보여준 작품이다. 특히 오맹(五盲)의 사회, 보지 못하는 사회, 듣지 않는 사회, 향기가 없는 사회, 맛보지 못하는 사회, 느끼지 못하는 사회의 상징으로서 시각장애인 순임(김해숙), 허망한 꿈을 좇아가는 창환(이동휘), 악질형사(한재영)의 설정은 흥미롭다.
장석용(Chang, Seokyong)/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한국문학신문 3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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