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기 전 춤을 추는 새 / 이린아
안녕, 잘 지내냐고요? 그럼요. 여기는 내 삶을 아주 송두리째 망쳐버리기 위해 온 곳이죠. 그런데 무척 잘 지내요. 왜냐고요? 공작새 알죠? 공작은 비가 내릴 무렵이면 침착성을 잃고 안절부절못해요. 그건 거의 춤이죠. 여기는 비가 아주 많이, 아니 아주 자주 와요. 많이도 오지만 오래 오진 않죠. 그런데 이 비가 흠뻑 내리다가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그쳐요. 그 덕에 나는 비가 오려다 만 춤을 매일 추고 있죠. 아주 엉망이에요. 공작새는 비가 오기 전에 춤을 춰 풍요의 상징이 되었는데 나는 온 사방에 소나기 같은 눈을 달고 택배 트럭에 쫓겨 파다닥 줄행랑치는 비에 젖은 타조니까요.
아니, 그런데 왜 공작은 비가 내릴 무렵이면 그렇게 불안에 빠질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난 말이죠. 내 인생을 아주 박살내고 싶었는데 그건 더 이상 불안할 수 없더라고요. 유에프오에요 유에프오! 미확인 비행 물체. 불안 말이에요.
내가 좋아하던 화가 로스코는 이런 이야기를 했죠. 모두 다 ‘좋아’의 세계에 빠졌어. 오늘 어때? 좋아, 맛은 어때? 좋아, 이 옷 어때? 좋아, 이 그림 어때? 좋아, 좋은 걸로만 세상을 살 수 없다고요. 그런데 좋은 건 싫은 거랑 같고, 좋고 싫은 걸로만 세상을 살 수는 없는 건 맞죠. 그렇다고 해서 좋지만은 않고 싫지만은 그 세계에서 누가 살아남아요?
유에프오는 우리에게 호기심을 줄 순 있지만 무언갈 외면할 변명도 만들어줄 순 있지만 결코 다정하거나 편안한 존재는 아니죠. 우린 일어나서 걸어야 하고 거북목을 내밀며 살펴야 하고 눈을 치켜뜨고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망원경을 통해 보아야 하죠.
나는 인간이 자신의 신체 능력을 정할 수 있다고 믿어요. 이건 선천적인 것들에 대한 잔인한 비평은 아니에요. 내가 말하려는 건, 정말로, 자기 몸에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떤 것도 자기 몸에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두 자기 자신만 결정할 수 있다는 거예요.
가령 내 목을 조르던 그 자식이나 아픈 강아지 앞에서 조심스레 무릎을 꿇던 그 자식이나 내가 함부로 나의 몸에 어떻게 그것을 기억할 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건 비가 오려다 만 춤처럼 이상한 자세가 될 게 뻔 하잖아요?
여자로 태어나 나는 끊임없이 생리를 시작했죠. 공작도 일이면 알을 낳는대요 물론 새끼 공작은 그 즉시 걸을 수 있지만요. 하하, 우린 앞으로 밀림에서 나무 열매와 키 작은 벌레를 먹어야 할까 봐요. 비가와도 계속 춤을 추고 있잖아요.
날지는 못해도 아주 빠른 새가 된 모양이에요. 어쩌겠어요? 비가 오든 말든 마음껏 춤을 출 것이죠. 자, 이제 그 어떤 나의 움직임도 모조리 당신에게 신호가 되지 않을 거예요.
이린아, 『내 사랑을 시작한다』, 2023년
언제부터인가 긍정적인 얘기만 하고 싶어졌다. 부정적인 사람은 왠지 시대의 낙오자 같은 생각을 부추기는 사회이기도 하고, 우울한 표정을 지으면 나의 삶 전체가 우울하게 낙인찍히는 것 같아,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나는 이렇게 긍정적이고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에요. 마치 페북에서 “좋아”요. 를 남발하듯이, 세상은 끊임없이 “좋”은 것이 “좋”다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아파서 흐느끼는 사람은 마치 사회의 낙오자나 열등생이라도 된 듯한 죄책감마저 느끼며, 서둘러 자신을 밝고 초 긍정적인 사람으로 포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람들은 밝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잘 살아온 사람인양 서둘러 자신의 우울과 슬픔을 감추기에 바빴다.
“나는 인간이 자신의 신체 능력을 정할 수 있다고 믿어요. 이건 선천적인 것들에 대한 잔인한 비평은 아니에요. 내가 말하려는 건, 정말로, 자기 몸에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떤 것도 자기 몸에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두 자기 자신만 결정할 수 있다는 거예요.”
시인은 어떤 프레임에 갇혀서 무언가를 수용하고 또 다른 무언가를 쳐내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은 어떤 사회적 프레임에 의해서 덧 씌워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단독적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나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나만의 시각으로 판단하고 표정 짓고 행동하겠다고, 세상의 무정부주의자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나도 항상 나만의 방식으로 말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행동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살고 싶었지!) 함께 어울려 같은 표정을 지으며 행복해하기보다 불행할지언정 ‘나’로 살아가겠다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사회적인 통념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읽는 단독자이자 떠돌이 개처럼 세상을 부유하는 존재이다.
“비가 오기 전에 춤을 춰 풍요의 상징이” 된 “공작새”처럼 세상의 기미를 재빠르게 눈치 채고 슬픈 춤을 출 수 있는 이가 시인이다. 시대의 흐름을 그 누구보다 적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예언자인 셈이다. “비가 오기 전 춤을 추는 새”가 되겠다는, “밀림에서” “비가와도 계속 춤을 추는” 자유로운 새가 되겠다는 시인의 꿈을 응원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