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간단한 일이 너무너무 복잡해졌다. 일이 잘 안되면 복잡해지는 법이다.
답이 나오면 쉬운데, 답이 안 나오면 복잡해진다. 뭐든지 다 그렇다.
요한복음은 마지막에 쓴 복음서다.
이 모든 과정들을 다 종합해서 글로 쓴 책이다.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고 아주 분명하게 쓰여있다.
분명하게 쓰여있는 이 말이 너무 멀리 가버리면 아주 복잡해지고, 가깝게
보면 아주 또 단순하고 쉬운 말씀이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랍오니(선생님)” 하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 20:17)” 또 제자들에게 마지막 하실 때는 “내 아버지 곧 너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이렇게 말씀했다. 그러니까 아주 간단한 일이다.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고 너희 아버지가 내 아버지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예수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되는가? 이 이유는 잘 모른다. 이 말만 듣고는 잘 모르지 않겠는가?
마지막에는 일곱 제자에 나타나서 일일이 어떤 위임을 하게 된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이런 얘기를 하시면서 다 제자들의 어떤 특성을 따라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따라서 위임을 하고 있다. 베드로에게 마가에게 요한에게 다 각기 하고 있다.
마지막 장을 읽는 것은 요한복음 전체를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 마지막 구절 보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이렇게 마지막을 맺어놓았다.
그러니까 이후의 신약 성경은 이후 라기보다 전에 써진 것들인데 말이 끝이 없다. 우리가 모르는 말이 너무 많고,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 바울같이 많은 책을 쓴 사람이 없지만 그것도 직접 쓴 것이 아니다.
바울의 경험을 우리는 해보지 못했다. 그냥 아는 체하고 넘어간 것이지 전혀 모르는 일이다.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든가,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말로 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다든가 하는 것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니까 이런 사람에 의해서 말해진 말들이 우리에게 그냥 닿을 리는 없다. 우리는 전혀 모른다.
그래서 바울이 떠난 후에 베드로와 죽은 후에 많은 혼란이 생겼던 것 같다. 요한은 30년 후에까지 살았으니까, 교회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다 본 사람이다. 그래서 도마에 대한 이야기도 마지막에 나오고 다 나온다.
나도 사실은 특별한 기회가 아니었으면 동기가 아니었으면 나대로 복음서의 예수를 내가 살 수 있도록 해석해서 먹었다. 그때 나는 양식을 먹고 사니까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딱 부딪치기를 “신화로 옷 입혀진 예수다.” 이러니까 내가 문제가 생겼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냐? 내가 아는 예수는 신화로 옷 입혀진 예수 아닌가? 그럼 나도 역시 사실로서의 예수를 몰랐구나. 그러면 나를 따라오던 사람들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문제가 나에게 부딪쳤다.
나는 그때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어 그것으로 만족했다. 사람들이 혹시 묻는다. “목사님, 어디로 갑니까?” “이 사람아,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다가 사람으로 죽으면 됐지. 뭐가 더 바랄 게 있는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그때로서는 만족했다. 그냥 그렇게 해도 우리 교회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만족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에게 들었던 사람들은 꼭 나처럼 할 수가 없다. 입장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늘 변하고 변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들어오면 신학대로 따르기 마련이다. 안 그런가?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우리나라의 통합직 장로교가 되는 것이다. 나는 장로교 하자고 시작한 교회도 아니고, 생명을 따라서 살자고 시작했다.
그런데 생명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트를 따라서 사는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혹시 또 다른 교파에서 다른 분이 왔다 하자. 합동식에서 왔다 하자. 그러면 우리 교회는 합동식 교회가 될 것이 아닌가? 신학을 한 사람들은 그것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도 결국 자기 길로 가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것은 정말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아주 묘하게 되고 만다. 누가 나보고 그런다. “시간이 흐르면 목사님은 신화적 인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대로 다른 길로 갈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요.
그 말을 듣고 좀 아찔했지만, 그래도 설마 그러겠는가 생각했었다. 이번 사건을 보니까 당연히 그러겠다. 그리고 자기들 입으로도 그렇게 말한다. 우리 교회에 2PM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김 목사가 인도했다. 거기로 사람이 120명이 넘어갔다.
그러니까 200명이 차면 당연히 열한 시 집회로 올라가자고 했던 것이다. 거기서 명예는 존중해주자고 할 때, 김 목사는 이 목사님 명예는 존중해 줘야 된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목사 50년에 금이 가게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을 했다 한다.
이미 숙지를 다 해버렸다. 이렇게 될 줄은 나는 생각 못 했다. 이 생각을 못 했다. 그동안의 말씀 듣고 40년의 시간이 흘렀다. 또 내가 순회하던 미주 교회를 다 맡겼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뒤에 가서 안 얘기다.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혹시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처음에 와서 소개할 때 나는 그랬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내 아들입니다. 나에게 축복한 것보다 더 많은 축복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다. 나를 위임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위임을 받은 후에 전혀 달랐다. 나를 성공한 목회자로 배울 것이 많은 사람으로 알았을 뿐이지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아니다. 이 말을 누가 했다. 그것을 나는 또 믿지 않았다. 이런 일이 우리 교회를 혼란케 했던 일이다. 형제들 모두가 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럴리가 있다. 그럴 수 없다고 말을 했다. 내가 보기엔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때 마침,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밀려날 준비를 저절로 그러지 않겠는가? 12시에 집회에 온단 말은 내가 하는 집회를 대신하겠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때도 사실은 나는 한 달에 한 번 하다가 두 번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할 수 없게 되면 밀려나는 거 아니겠는가? 일반 교회에서 교육자 교체하듯이 그런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나는 일반 교회의 목회자가 아니다. 그래서 밀려날 각오를 하고, 할 수 없이 밀려나면 밀려나야지 했다. 나는 방송실 하나로 유투버를 해서 세계를 향해서 복음을 전할 때가 왔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전에 여러분이 아는 MZ세대가 갑자기 불거져 나왔다. 나는 생각지 않았던 뜻밖의 일이고,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불거져 나왔다. 그냥 엉뚱하게 새로운 물결이 우리 교회를 막 흔들게 했던 것이다. 나도 잘 모른다. 왜 저렇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만나면 그냥 하나가 된다. 어떻게 처음 만났는데 하나가 되는가? 그리고 밤이 깊은 줄 모르고 모두 자기들끼리 그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매일 만나서 무슨 얘기하는지 나도 잘 모르지만, 아마 내용이 비슷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부러 돈 주고 하면 하겠는가?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어떤 사람은 “그것은 형식적이다. 주문을 외우도 한다.” 이렇게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러나 들어보면 나는 그 속을 잘 모르지만, 나오는 말은 진실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다.
MZ라는 말이 밀레니엄 제로라는 뜻이다. 세대를 모른다. 과거가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성경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른다. 그런데 나오는 말은 진실하다.
교리에 맞냐 안 맞냐 이런 문제가 아니고 말이 진실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그냥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그것이 막 물결을 이룬다. 그러니까 판도가 완전히 바뀌어졌다. 그리고 내가 강당에서 그 말을 했다. 청중이 어떻게 듣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강당에서 말하는 사람이 무엇을 말하느냐가 문제니까, 강당에서 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복음을 이야기해야 되지 않겠는가? 내가 말한 이 복음 말고 다른 복음이 있다면, 복음을 말해라. 이렇게 직접적으로 얘기했다.
나팔을 불면 잘 불어야지, 전진하라는 말인지 후퇴하라는 말인지 알 것이 아닌가? 그 이야기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퇴임사를 하면서 그랬다. 이런 일이 있었다. 분명히 밝혀야 되겠다. 교회 형편상 너무 혼란스러워졌으니까 분명히 밝혀야 되겠다.
항상 나에게 말했다. “머리로는 다 알겠는데 가슴에 안 닿습니다.” 그러니까 가슴에 닿을 때까지 몇 년을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뒤에서 양문의 학생들에게도 말한다. “이것이 무슨 복음이냐?” 이것은 이 목사님이 개인의 간증일 수는 있지만 어디에 이것을 내놓고 복음이라 하겠냐?“ 신학적으로 보면 그렇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앞 다르고 뒤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 얘기를 공석에서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 노선이 달라서 헤어지게 됐다.
그런데 다른 사람 앞에 가서 모두 절대로 자기 노선이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혼란이 생기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더니, 그때 120명 나오던 사람들이 60명이 줄어져 버렸다. 반으로 줄어졌다. 2PM으로 남은 사람이 반, 사라진 사람이 반이다. 그래서 축제가 끝이 난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원래 실수는 내가 한 것이다. 모르고 불렀으니까 내가 실수한 것이다. 의논하지 않고 불렀다. 그러니 역시 내가 오해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것도 물어보지도 않고 의논도 하지 않고 혼자서 결정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가 잘못한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와서 타작마당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 타작마당이 되니까 알곡은 모아서 곳간에 가고 쭉정이는 버리더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래서 콩은 두드러겨 맞는다. 타작마당에서 막 두들겨 맞는다.
그런데 콩이 깨지지 않으니까 주인에게로 갈 뿐만 아니라 다시 심으면 또 나게 돼 있다. 그러나 쭉정이는 콩을 키울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콩이 다 커버리면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것을 모아서 내가 살던 지방에서는 소죽이라고 넣어준다. 그러면 소는 아주 잘 먹는다.
거기가 타작마당이 됐다. 우리 교회가 타작마당이 되었다. 알곡이 무엇인지 죽정이가 무엇인지 구별되는 시간이 왔다. 그것을 보면서, 우연한 일이 아니다. 분명히 잘못은 내가 했는데 결과는 하나님께서 거두었다. 분명히 내가 잘못했는데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거두어 갔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였으니까 분명히 잘못했다. 이삭은 분명히 잘못했다. 아버지 실수 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썼다. 하나님은 야곱을 썼다. 이것은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실수를 하고 잘못했는데, 그 사람을 썼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이번에 나는 경험을 했다. 분명히 나는 잘못하고 실수했는데, 하나님께는 필요한 대로 쓰는구나. 자기 필요한 대로 쓰는구나. 그래서 나는 이 문제가 생겨서 벌 받을 일을 했지만, 하나님은 추수를 다 하는구나.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수술한 지 1년 반이다. 이렇게 걷지 못하는 사람도 아주 드물다. 또 수술한 자리가 아픈 것이 아니고 반대편이 아프다. 아직도 걸음을 못 걷는다. 내가 잘못을 한 것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러든지 저러든지 하나님은 자기 알곡을 딱 가져갔다. 내가 죽든 살든지 주의 것이다. 우리가 죽으나 사나 주의 것이다. 내가 어찌 됐든지 간에 주님은 자기 할 일을 다 한다. 하나님은 자기 할 일을 다 한다. 우리 때문에 못할 일이 없다.
그래서 이 책에 기록된 말씀보다도 너무나 많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나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다.“ 그러면 요한복음에 선별된 기적들은 무엇인가? 이러한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니고 훨씬 더 많은 것을 행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요한이 원하는 말을 하고자 선별해 놓은 것이 요한복음이다. 선별된 것이니까 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뒤에 숨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여기에 그런 말이 또 나온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사랑합니다.”라는 대답을 못 하고 “필레오 합니다.” 필레오 합니다. 세 번이나 묻자 대답해서 하는 말이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순교할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베드로는 또 물었다.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안겨있던 제자 요한에 대해서 물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으니까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요 21:22) 했는데, 제자들의 생각에는 요한이 안 죽는다고 했다는 소문이 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람의 생각이란 것은 이분의 생각을 따라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도 이분의 역사적인 얘기가 아니라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역사는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다. 사가들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이 없어진 다음에는 역사가 사실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역사를 사실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역력히 봤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사건들을 우리는 역력히 다 보고 왔다. 그런데 지금 젊은 아이들은 전혀 그것을 믿지 않는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무리 말해도 안 된다. 우리가 이것도 보고 저것도 다 보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우리가 본 것을 전혀 믿지 않는다. 자기들이 본 것만 믿는다.
이것을 보면 역사는 우리 세대가 없어진 다음 그 후에 사실은 감춰지고 역사만 남게 될 것 아닌가? 예수도 마찬가지다. 예수 사실은 필요가 없어서 다 버리고 가버렸다. 그러면 증거만 남았다. 따르던 사람들이 증거만 남았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예수를 알아야 된다.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100년 후에 이 나라가 그렇게 된다면 사실을, 역사적 사실은 알 길이 없다. 역사가 사실이 될 것 아닌가?
삼국사기는 김부식의 사관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삼국유사는 중, 그 사람의 사관에 쓰여진 것이다. 입장이 다르니까 서로 다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사가들의 입장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우리가 거기서 진실을 찾아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벌써 2000년이 지났다. 그래서 찾아내 쉽겠는가?
그래서 최소한도 사실을 잡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한 예수, 이것만은 사실이다. 역사가 아니고 사실이다. 좌우간 이것을 붙잡고 우리가 결판을 내야 될 그런 입장이다. 안 그러면 또 마찬가지다. 우리가 증거한 것을 다음 세대 사람들이 그대로 또 믿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버려진 예수를 다시 찾아서 말한 것이다. 다 필요 없어서 버리고 간 예수를 지금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 예수가 저런 사람인 줄 알면 누가 예수를 믿겠는가? 십자가에서 내려올 줄로 아는 사람들,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갔다. 못 박으면 죽을 사람, 누구는 못 박으면 안 죽는가? 그 자리에 오면 우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못 박아 놓으니까 똑같이 죽는다.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선한 사람, 악한 사람 전혀 구별이 안 된다. 그 자리에 가면 공평한가? 불공평한가? 그 자리는 공평하다.
만일에 이런 사람은 이런대로 저런 사람은 저런대로 된다면 공평할 수 없고, 인류는 하나가 될 수가 없다. 다 하나 되려면 다 한 점에서 만나져야 되는데, 다 한 점에서 만날 유일한 장소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 안에다. 다른 곳이 없다. 다른 곳을 초점으로 하면 다 갈라진다. 어디를 중심으로 하든지 다 갈라진다. 무엇을 중심으로 하든지 다 분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자리에 가면 분열이 될 필요가 없다. 어떤 것도 분열될 필요가 없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이런 것은 다 갈라질 필요가 없다. 교파도 이 교파 저 교파로 갈라질 필요도 물론 없다. 다 한 자리 만나지는데 갈라질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또 있다 하더라도 서로 아니라고 기대할 필요가 또 없어져 버린다. 그냥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한 자리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와 사실은 다르다. 나도 옛날에는 그 생각은 못 했어요. 역사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까 역사가 사실이 아니다. 역사는 역사고 사실은 사실이다. 우리가 역사를 무시한단 말이 아니고 사실이 먼저 중요하다. 이 사실을 토대로 해서 역사를 알아야 역사를 바로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역사와 사실, 늘 얘기하는 말이지만 또 다시 강조하고 싶다. 역사와 사실, 사실을 토대로 역사를 해석해야지, 역사를 토대로 사실을 생각하기는 너무너무 어렵다. 2000년이 되어도 안 됐다. 역사를 토대로 해서 사실을 안다는 것이 안 됐다.
그래서 이제는 사실을 통해서 역사를 아는 시대가 왔다. 좋든지 안 좋든지 나에게 좋은 것이 될 수만 없다. 하나님 행하신 일이 내가 보기에 다 좋을 수가 없다. 다 죽는데 무엇 때문에 동산에서 빠져나왔겠는가? 싫으니까 나왔다.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 했는데 먹었는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될 것 같으면 왜 먹었는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나온 것이다. 내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예수의 마지막을 보면, 저렇게 살려고 인생으로 태어났나? 내가 저렇게 되려고 예수를 따라왔나? 당연히 그 생각이 든다. 저보다 다른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따라온 것이다. 예수처럼 죽으려면 무엇 때문에 따라오는가? 무엇 때문에 그 예수를 믿는가? 믿지 않고 더 낫게 사는 것이 낫다.
그런데 이제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꼼짝 못하게 되었다.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감춰져 있는지를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다. 거기서 발견하지 못하면 끝이다. 그냥 절망이다. 끝이다. 인생은 절망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빛이 열리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그냥 이러나 저러나 결국은 죽으면 끝이다. 무엇을 잘 믿으나 못 믿으나 다 죽으면 끝이다.
세 번이나 죽어봤다. 아무것도 없다. 세 번이나 죽었다 깨났는데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지 막상 가보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사실이 먼저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만하겠다. 오늘은 역사와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하겠다. 역사에서 사실을 찾으려 하지말고 사실에서 역사를 찾자. 역사를 가지고 사실을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사실을 가지고 역사를 해석하자. 이 말을 하고 싶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