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도 자본주의 윤리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을 휩쓴 산업혁명은 은행가와 자본 소유자를 더욱 부유하게 맏르었지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는 비참하고 가난한 삶을 선고했다.
유럽 식민지에서는 사태가 더욱 나빴다.
1876년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중부 아프리카를 탐사하고
콩고 강 유역의 노예무역과 싸우는 것을 사명으로 내건 비정부 인도주의 기구를 설립했다.
기구에는 도로와 학교와 병원을 건설해 해당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책임도 주어졌다
1885년 유럽 열강들은 이 기구에 콩고강 유역 230만 제곱킬로미터의 통제권을 부여하기로 합의했다.
벨기에 국토의 75배에 이르는 그 땅은 이후 콩고 자유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곳에 산 주민 2천만~3천만 명의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도주의 기구는 눈 깜박할 사이에 성장과 이윤이 진정한 목적인 기업으로 변했다.
학교와 병원은 잊혔고, 콩고강 유역은 광산과 농원으로 채워졌다.
그 운영은 대부분 벨기에 관리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현지인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고무 산업은특히 악명 높았다.
고무는 빠른 속도로 중요한 산업 필수품이 되었고,
고무 수출은 벨기에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고무를 수집하는 아프리카 촌마을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많은 할당량이 주어졌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게으름'을 이유로 잔인한 벌이 주어졌다.
팔을 절단해버리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한 마을 전체를 학살하기도 했다.
가장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1885`1908년 성장과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은
6백만 명(콩고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에 이르렀다. 일부에서 1천명 에 육박한다고 추정한다.
최근 몇십 년 전부터, 특히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탐욕에는 어느 정도 고삐가 죄어졌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불평등은 여전히 만연했다.
2014년의 경제적 파이는 1500년보다 크지만 , 분배는 너무나 불공평해서
하루종일 힘들게 일한 아프리카의 농부와 인도네시아의 노동자가 집에 가져오는 식량은 5백 년 전보다 더 적다.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현대 경제의 성장은 거대한 사기로 들어날지도 모른다.
인류와 세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을지라도
기아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욱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이 같은 비판에 두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자만이 운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려 했던 유일하게 진지한 시도는 공산주의였으나,
그것은 거의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나빴기 때문에 다시 시도해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원전 8500년의 사람은 농업혁명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농업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두 번째 대답은 우리가 인내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천국이 눈앞에 와 있다고 약속한다.
인정하건대, 대서양 노예무억이나 유럽 노동계층 착취 같은 실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교훈을 얻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파이가 좀 더 커지도록 놔두면 모두에게 좀 더 두꺼운 조각이 돌아갈 것이다.
성과가 평등학 분배되는 일은 영영 없겠지만,
모든 남자와 여자, 어린이를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돌아갈 것이다. 심지어 콩고에서도.
실제로 긍정적인 신호가 조금 보인다.
최소한 순수한 물질적 기준에서는 ㅡ기대수명, 어린이 사망률, 칼로리 섭취ㅡ
2014년 평균적 인간의 생활수준은 1914년에 비해 상당히 나아졌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하지만 경제적 파이가 무한히 커질 수 있을까?
모든 파이에는 원자재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두운 결말을 예언하는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가 조만간 우리 지구의 원자재와 에너지를 고갈 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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