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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행위 (저자 - 작품(텍스트) - 독자)
(저자와 독자는 작품을 통하여 어떻게 만날까?)
저자와 작품 그리고 독자는 문학의 3대 요소이다. 문학의 요소에 독자가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지금까지는 무시당해 온 부분이었다. 독자가 없다면 독서란 존재할 수 없다. 독서를 통해서 작가 - 작품 - 독자의 관계가 형성한다. 작품은 독자의 읽기로서 완성된다고 말한다. 독자는 작품을 완성시키는 사람이다. 독서행위를 하면서 우리는 작가와 작품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독자인 나 자신은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독서이론에 의하면 책을 읽는 나는 작가만큼이나, 작품만큼이나 중요하다.
독서는 독자가 책을 찾으므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책을 찾아서 읽을까?
바르트는 ‘독서란 유희 행위이다.’라고 했다. 유희가 일어나는 장소는 작가와 작품과 독자가 만들어 내는 공간(장소)이라고 했다. 유희는 즐거움을 찾는 행위이다. 즐거움은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나타난다. 욕망의 바탕은 몸이다.(독서에서는 독자의 몸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몸이 원하는 것(매혹, 휴식, 고통, 쾌락, 심심함 등의 혼합, 즉 독자의 욕망이다.)을 채워주기 위해서 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료하고 심심해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책을 찾는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아서 재미가 없을 때, 욕망을 채워서 재미를 느끼려고 책을 찾는다.(지식을 구하려는 욕망도 호기심이라는 본능적인 행위라고 한다.)
바르트가 쓴 글을 직접 읽어 보면서 독서가 일어나는 행위를 보기로 하자.
“고통과 불의에 처했을 때 나는 눈물을 터트리기 위해 지붕 밑의 공부방 옆에 있는 (아이리스 꽃 향내가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 이곳에는 창을 통해 꽃 향내도 들어왔고, 루생빌르팽 탑도 보였다.-- 화장실은 오랫동안 나의 피난처였다. 그곳만이 독서, 몽상, 눈물, 쾌락 같은 절대적인 고독을 필요로 하는 나의 탐익의 장소이다. 내가 열쇠로 잠글 수 있는 유일한 방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분석해보면 저자(바르트)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이유는 고통과 불의가 찾아와서(욕망이다.) 외부의 현실을 피하는 방법으로 몽상하려고, 혹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은밀한 몸짓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책을 읽었다. 현실에서 도망하여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므로(몽상하고, 눈물을 흘리므로) 행복한 고립이 된다. 독서는 고립된 나만의 공간에 몰래 숨어서 하는 행위이다. 독서행위란 떠들썩한 놀이가 아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욕망과 은밀하고, 조용하게 나누는 대화인 동시에 만족을 얻으려는 놀이인 것이다. 어떤 분위기에서 독서행위가 이루어지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라면 독서는 몸이 원할 때, 즉 심심할 때, 고통스러울 때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행위이다.)
두 번 째로 알 수 있는 것은 독서를 통하여 행복함을 맛보는 것은 몸이 감동하여 반응하기 때문이다. 독서를 통하여 감동을 느낄 때는 우리 몸이 반응한다. 독서 안에는 우리의 몸이 감동을 느끼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매혹도 있고, 휴식도 있고, 쾌락도 있다. 심지어는 고통도 있다. 우리는 독서를 통하여 내밀한 몸짓을 한다. 즉 감동하는 몸을 만들어 낸다. 독자와 책 사이에는 몸이 개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몸으로 느끼는 즐거움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 어려운 심리학 이론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몸의 감각기관에 부딪힘으로 나타나는 감각적 흥분은 운동을 통해서 방출합니다. 이것은 장치이고, 구조입니다. 생명의 절박성은(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가슴이 답답하면 숨을 쉬는 따위의 육체적 행위) 육체적 욕구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심리 장치를 건드립니다. 감각적 흥분이란 심리적으로 일어나는 내적흥분이고 흥분은 육체적 운동을 함으로 변화가 온다는 말입니다. 독서에서 즐거움을 느끼면, 즉 감각적 흥분을 느끼면 육체적으로 반응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어렵지요. 그래서 유희와 같다는 것입니다.)
(** 기억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이미지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신체적 기억이다. 신체적 기억은 뇌를 거치지 않고, 신체가 반응하는 기전(mechanism)으로 되어 있다. 한 번 익힌 기술은 몸이 기억하여 쉬이 잊어지지 않는다.)
바르트의 독서에 대한 설명을 쉽게 요약하면, 우리는 감정적으로 심심할 때(욕망이 충족되지 못하여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때) 책을 찾는다. 이때는 책만이 아니고 텔레비전을 켤 수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친구를 찾아 집 밖으로 나설 수도 있다. 그렇게 하여 감각적 흥분을 찾으려고 한다.
문학 작품은 작가가 독자에게 의미를 강제로 주입하는 장치가 아니다. 독자가 독서를 위하여 작품을 선택할 때만이 의미의 전달이 가능하다. 독자는 작가가 주는 의미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작품을 선택하여 읽기를 하는, 말하자면 능동적인 수용자이다. 독자가 작품을 선택할 때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이다. 기분전환을 위해서거나, 친구처럼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선택한다. 책에서 얻은 정보를 나와 비교하거나(책 속의 인물을 나와 비교해본다는 말이다.),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도 책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책에서 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내용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 1.독자가 선택하는 내용이라고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인간은 작가이든, 독자이든, 삶이나, 심리까지 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봅니다. (예 ; 프롭의 민담론.) 선택하는 내용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2. 현대 문화이론에 의하면 예술작품도 상품이다. 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작품(독자가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을 만든다는 것은 팔리는 상품을 제작하는 것과 유사하다.)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는) 소설이나 수필은 독서가 소비가 된다. 작가는 소설의 소비(독서)를 위해서 소비가 가능한 감정도 투입하고, 이야기도 만든다. 문학작품도 소비라는 관점에서 보면 物神性을 전재하는 상품일 뿐이다.
독자는 작품의 스토리(또는 내용)에 밀착하여 자신의 감정을 이입함으로 작품을 읽는다. 작품에 독자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작품이 빚어내는 언어유희에 몰입하는 독서와는 다르다. 말하자면 재미만을 맛보기 위한 독서와는 다르다. 이때는 작품을 이미지로서 기억한다. 이미지는 주관성이다.
작가는 작품이 독자에게 최대한의 울림을 주도록 글을 쓴다. 이와 같이 글을 쓰는 방식에는 작가가 작품에 자신의 욕망을 담는다. 독자는 감정이입을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작가의 욕망과 합류시킨다. 저자와 독자는 서로의 몸으로 표현되는 욕망을 함께 함으로 공감의 끈으로 맺어진다.
또 하나는 작가의 문체이다.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이냐, 감성적으로 미화한 문체이냐에 따라서 독자의 반응이 달라진다. 문체는 감정을 전달하는 것과 관계를 가진다. 이 관계는 인격체로서의 관계가 아니다(인격체로서 관계라는 말은 책 속의 인물이 사회가 요구하는 인격을 갖춘 인간이라는 뜻이다). 감정이라는 표피와 관계있다.
글은 사람이다, 라는 전통 이론에 따르다 보면 작가는 글에다 인격을 담으려 한다. 그러나 글 속의 사람은 개개인이 갖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적인 모습이란 개개인이 사회 속에서 부대끼면 살아오는 동안에 만들어진 주체로서 인간을 말한다.(주체란 개인사적이고, 문화적인 사람을 말한다. 삶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인격체라고 하면 사회적 가치에 부합하도록 자신을 가공한 형태에 가깝다.) 독자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상품을 만들어내려면 작가가 자신의 욕망만을 표현하기보다는 독자의 욕망을 살펴보는 배려가 필요하다. 작가와 독자는 자신들의 의도를 투여한 작품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만난다.
작가가 욕망을 일방적으로 표현할 수 없고 독자의 눈치를 봐야 함으로 오늘의 독서 이론에서는 ‘저자의 죽음’을 말한다. 작품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독자에게로 돌아와서 숨을 쉬게 되는 것을 말한다. 독자에게 돌아왔다고 하여 위인전처럼 인격체로서 돌아 온 것이 아니고 욕망에서 만들어지는 허구적인 주체로, 작품에서 만들어진 주체로, 분산된 기호로서(이 말은 무척 어려운 말입니다. 기호로서 돌아왔다는 것은 작품에서 실재의 인격체로서가 아니고 상징하는 의미로, 이미지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돌아왔다. 따라서 독자는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를 작품의 내용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는 투사나 동일시를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는 동안에 작가를 간접적으로 알게 된다는 뜻이다.
(롤랑 바르트가 파리마치 지의 표지 사진에서 읽기를 했습니다. ‘기호’란 우리도 읽기를 그렇게 한다는 뜻입니다.)
독자가 작품을 통해서 작가를 간접적으로 안다는 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자의 역할을 독자반응이론으로 알아보자. 독자가 작품을 대할 때는 자신의 인생에서 얻은 경험과 지적 공동체와 연계하여 이해한다. 지적 공동체(지식을 공유한)와 경험은 독자의 의식을 만들고, 독자는 자신의 의식으로 작가가 아닌 작품을 읽는다. 독자의 의식이 페미니즘적이냐, 구조주의적이냐에 따라서 읽기도 페미니즘적이 되기도 하고, 구조주의적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의식이 정해지면 독자는 텍스트의 의미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능동적으로 찾아 나선다.
이때의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서 독자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 되어 버린다. (독서란 독자가 겪는 사건이지 작가가 겪는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을 독자들은 자신의 독법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읽는다. 말하자면 작품(텍스트)은 독자에게 자극을 주고,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와주는 안내판 역할을 한다. 이 말은 독자가 자기 멋대로 상상을 하게하고, 작품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면 작품의 줄거리나. 의미 내용들이 독자가 작품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는 뜻이다.
독자의 의식에는 자신의 욕망이 들어있다. 몸으로 느끼는 욕망이 들어 있지 않은 작품은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고, 물리적인 법칙에 의하여 만들어진 ‘언어의 거품’일 뿐이다. 우리는 이처럼 지식으로 작품을 읽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를 감동시키는 작품은 독자가 자신의 욕망을 작품과 교류하는 공간(무대)에 등장시켜서 즐거움을 주는 텍스트(작품)이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독서란 근본적으로 저자와 작품, 텍스트의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언어유희이다.’라고 했다. (*텍스트는 의미가 들어 있는 글을 말한다.) 읽기는 작가의 의도, 작품의 의도, 그리고 독자의 의도가 서로 뒤엉켜서 만나는 어느 지점에서 답을 찾으려는 유희이다.
이 이론을 수필에 적용하면 작가가 지식과 가치관만을 강요하는 교시문학이라는 분류는 잘못이다. 수정해야 한다. 작가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욕망하는 것을 채워주는, 언어유희로서의 글을 써야 한다. 그럴 때라야 독자들은 수필을 읽는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가치도 전달된다.
(** 독서 이론을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인간은 각자 어머니의 뱃속에서 탯줄로 영양을 공급받고 생존한다. 따라서 사람마다 어머니가 다르므로 서로 다른 개인사적인 가치가 형성된다. 그러나 탄생과 더불어 탯줄은 끊어지고, 사회 속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사회학자의 말로는 사회 속에 던져져도 여전히 탯줄을 통해서 영양을 공급받아야 산다. 이때 공급받는 영양은 사회적 가치이기 때문에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은 같은 영양을 공급 받는다. 따라서 각 개인은 개인사적인 경험과, 사회에서 받아들인 가치 등으로 서로 간에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진다. 따라서 독서 행위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르다는 것도 깨닫는다.)
*** 우리 모임에서 수필이론을 공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대하여 일부에서는 수필쓰기 공부에 너무 이론에 치우친다면서, 우리가 공부하는 수필이론을 부담스러워하는 회원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독서이론은 형이상학적인 고급 이론이 아니고 글쓰기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쉬운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예학의 책에서는 독서이론을 가디머, 야우스, 이저, 후설, 잉가르덴이라는 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해석학, 현상학, 기호학이라는 학문으로 설명을 합니다. 철학적 명제를 담아서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문예이론으로서 수용미학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문 이론가들이라면 이들을 연구하겠지만, 우리 모임에서 공부하는 이론은 머리가 아픈 이들의 이론이 아니고 글쓰기 실제와 관계있는 쉬운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입니다.
===> 아주 어려운 글이었으리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수필쓰기에 응용한다면 좋은 일이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되는 어떻게 응용한다는 말입니까. 해도, 당연한 불만이다.
이런 글은 글쓰기에 직접 적용하기보다는, 지적 욕망을 가진 사람에게 그 욕망을 채워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을 탐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식으로만 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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