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공명공주(貞明公主, 1603년~1685년)가 80세 되던 1682년 8월 에 막내아들 홍만회에게 소학의 일부분을 써준 친필 서첩으로 막내 아들 홍만회(洪萬恢, 1643년~1709년)가 제목을
붙이고 첩으로 만들었다. 필사본. 1책. 숙명여자대학교 도서관 소장.
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 6대 조선 국왕과 시대를 함께 하며 83세까지 장수했다.
임진왜란 직후에 태어나 격랑이 휘몰아친 조선 역사의 5분의 1을 경험했다.
서궁에서 죽은 듯이 유폐 생활을 했고, 인조를 저주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생사를 넘나들기도 했다.
정명공주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남자가 쓰기에도 힘에 부친다는 한석봉의 필법을 수련하는 데 정진했다.
정명공주는 서궁에 유폐된 동안 ‘화정’을 비롯한 많은 서예 작품을 썼고, 모녀가 처한 비극적 상황은 정명공주를 조선 최고의 여류 서예 작가 반열에 올려놓는 바탕이 되었다.
1623년 3월 16일 예조(禮曹)에서 정명공주의 부마 간택을 속히 시행하자는 건의를 올렸고, 인목대비의 마음을 헤아린 인조가 이를 즉각 허락하면서 부마 간택이 급물살을 탔다.
8월쯤 혼례를 치르기로 계획하고 부마 단자(單子)를 받기로 했고, 아홉 명만이 단자를 올렸다.
음력 8월 11일에야 초간택을 치러 아홉 명을 선발했고, 음력 9월 12일 재간택을 거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홍영(洪霙, 1584년~1645년)의 아들 홍주원(洪柱元, 1606년∼1672년)을 부마로 간택했고, 혼례는 음력 12월 11일에야 비로소 치러졌다
인조는 정명공주의 신혼집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안동별궁에 마련해 주어 정명공주가 궁궐을 출입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자위수택에 포함된 ‘화정(華政)’은 조선 6대 왕과 함께 하며 정치 투쟁의 냉엄함을 몸소 겪었던 광해군의 이복여동생 정명공주가 남긴 처세훈이다.
발문은 홍경모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