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시 이산면 소재의 명소
경북 영주시 이산면 소재의 명소
①흑석사 ②괴헌고택 ③덕산고택 ④칠성루및 휴계재사 ⑤이산서원 ⑥천운정 ⑦일우정 ⑧만취당 ⑨두암고택
⑩김해 허씨 묘 ⑪신암리 마애삼존석불 ⑫성이성 묘 ⑬박봉산
①흑석사 -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산200
삼국시대 석조마애여래상과 통일신라의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절로, 늦어도 통일신라때 창건된 절이라고 할수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되었다가 1945년 다시 중창되었는데, 1990년대 대웅전에 봉안되어있던 목조아미타불상 몸체 안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흑석사 모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 유물 과 흑석사 석조여래좌상
②괴헌고택
순조 4년(1804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 부정자, 사헌부 지평 등을 지낸 괴헌 김영이 조선 정조 3년 (1779년) 선고인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덕산공 김경집으로부터 살림집으로 건축하여 물려받은 것이다. 그 뒤 고종 8년 선생의 증손 진사 김복연이 일부를 중수하였다고 한다. 1972년 수해를 당하여 다락과 사랑방 다락 뒷벽에 은신처가 마련되어 있는것이 특이하다.
③덕산고택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덕산공 김경집이 영조 32년 (1756년) 두암에서 옮겨와 지은 집이며, 그의 현손인 의금부도사 희연이 1904년 일부 중수하였다고 한다. 민속자료 제65호인 괴헌고택과 서남향으로 접하고 있는 이 가옥의 상부가구는 오량가이며, 지붕은 안채와 사랑채만 팔작지붕이고 나머지는 우진각 지붕이다.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의 전형적인 □ 자형 가옥으로 정침 및 대문간채와 방앗간채, 서당이 잘 갖춰져 있다. 또한 좌측 사랑방과 마루방에는 벽장과 안채로 통하는 은밀한 통로를 두었는데, 내외간에 통행을 편리하게 한 연결 동선 등의 특징이 잘 남아있어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좋은자료로 평가되고있다.
④칠성루및 후계재사
조선 단종때에 불사이군의 충절로 영주에 은거하였던 휴계공 전희철의 유덕을 추모하여 인조 9년 (1631년)에 5대손인 설월당 전익희가 현 위치에 창건하였고, 휴계재사는 선조 9년(1576년) 휴계공의 증손 망일당 전개가 용상 석봉 아래에 창건하였으나 숙종 22~23년 (1696~1697년) 사이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후 참봉 전박, 송파 전응두, 망일당 전개, 설월당 전익희 등을 모시는 재사로 사용되고있다.
⑤이산서원
명종 13년(1558년) 구서원에 군수 안상이 창건하여 선조 5년(1572년)에 사당을 세워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봉안, 동 7년(1574년) 사액을 받아 사학기관이 되었다. 광해군 6년(1614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나 고종 8년(1871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철폐되었으며, 1936년에 경지당만 복원하였다. 건물이 노후하고 붕괴 위험이 있어 1995년에 해체보수와 주변 정비를 하였다.
⑥천운정
1588년에 이조참판을 지낸 백암 김륵이 만년을 보내기위해 지은 정자이다. 건립 후 퇴락하여 무너진 것을 알수없는 시기에 이건하였으나 또다시 붕괴되어 176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건하고 그 앞에 연못을 조성했다. 김륵은 영주에 서쪽에는 귀학정과 서벽정, 동쪽에는 천운정의 세 정자를 지었는데, 서벽정은 안동으로 옮겨지고, 천운정은 대대로 구업을 전하였다고 하며, 정자 앞에 연못이 있어 정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귀학정은 1988년 봉화읍 문단리로 이전하였다.
⑦일우정
우엄 전규병(1840~1905년)이 1866년에 연못을 파고 그 옆에 있는 바위에 "일우대"를 새기고 1868년 (고종5년)에 정자를 짓고, 계당 류주목에게 청하여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는 문헌 기록이 남아있다. 구조양식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두드러진 특징은 없으나 특수목적으로 꾸민 공간구성과 집터의 상징 의미인 금구몰니(금거북이 진흙에 묻혀 있는 명당자리)의 형태를 살려 관념적 형태로 특색있게 조성한 연못과 게류등의 전통 조경이 주목된다.
⑧만취당
예조좌랑, 충청도도사, 강원도도사, 옥천군수를 역임한 만취당 김개국(1548~1603)이 건립한 정자이다. 김개국의 본관은 연안, 자는 공제, 호는 만취당이다. 그는 건물 서쪽에 있는 수백 그루의 솔들이 설한에도 푸르름을 잃지않음을 보고 본보기로 삼아 "만취당"이란 당호를 짓고, 또한 스스로 아호로도 삼았다고 한다.
⑨두암고택
□ 자형의 정침 24칸,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독립된 사랑채인 함집당 6칸, 정침 우측에 사당 6칸으로 구성되어있다. 정침은 두암 김우익이 20세에 분가할 때인 조선 선조 23년(1590년)에 건립하였고, 함집당과 사당은 그 후대의 건축이다. 두암은 선조 4년(1571년)에 출생하여 광해군 4년(161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영원군수, 해미현감을 역임한 후 한성부윤에 이르렀고, 인조 17년(1639년)에 별세하였다.
⑩김해 허씨 묘
해동주자라 일컬어지는 퇴계 이황(1501~1570년)의 첫번째 부인인 김해허씨의 묘이다. 퇴계는 20살 되던 1521년에 당시 영주 초곡에 살던 진사 허찬(1581~1535)의 맏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허찬은 본래 의령에 살았었는데 청풍군수를 지낸 영주사람 문경동(1457~1521)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로 이거하였다. 문경동은 성종때 생원진사 양시에 모두 합격한 후 문과급제까지 한 인물로 당시 인근에서 제일가는 석학으로 추앙받았었다. 또한 대대로 벼슬한 집안으로 가세가 매우 부유하였다. 이에 퇴계가 처가에서 공부하며,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경제적 밑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허씨부인은 혼인한 이듬해인 1522년 장남 준을 낳고, 5년 뒤인 1527년 차남 채를 낳고선 산독을 풀지 못해 향년 27세로 돌아가셨다.
⑪신암리 마애삼존석불
삼국시대 말기 또는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마애삼존석불로 바위 네 면에 돋을 새김한 사면석불이나 지금은 마멸되어 한 면의 삼존불상만 뚜렸하다. 결가부좌한 본존불을 협시보살이 좌,우에서 모시고 선 삼존상인데, 가운데 본조불은 민머리에 갸름한 얼굴, 당당한 어깨, 큼직한 시무외,여원인의 손모양을 하고있다.
⑫성이성 묘
소설 "춘향전"에서 주인공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라고 전해지는 성이성(1595~1664)의 묘이다. 성이성은 남원부사를 지낸 부용당 성안의 의 아들로 13살때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가 5년간 생활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성이성은 32살때인 인조 5년(162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의 요직, 진주부사등을 거쳐 암행어사로 호남지방을 순찰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춘향전"의 실제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이성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여습이며, 호는 계서이다. 사후 청백리에 오르고, 부제학(정3품)으로 추증되었다.
⑬박봉산
백골에서 약1.2km를 따라 올라가면 해발 389m의 높은 산이 있는데, 이산에 옥돌이 많이 난다하여 옥돌 박· 산봉우리 봉자를 써서 "박봉산"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박봉산 주변에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일곱 봉우리인 두리봉·알봉·돌봉·진혈봉·꺼칠봉·소봉·검습봉이 있다.
돗밤실 둘레길 5.6km, 2시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