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드라마
이우상
세월아 가지 말어라 가려거든 혼자 가거라
청춘아 거기 섰거라 네가 가면 세월도 간다
어차피 가는 세월 잡을 수는 없지만
한 번 사는 게 인생이라면
청춘도 사랑도 만남도 이별도 모두가 드라마야
바람에 구름 가듯 사는 것도 인생 드라마야
유명 가수, 현철의 <인생은 드라마야> 노랫말이다. 청춘, 사랑, 만남, 이별, 여기에 한 술 더하여 잘 살고 못 사는 것, 권력의 무상함 이 모두가 드라마에 지나지 않음을 본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대통령 물러나면 본인 또는 아들이 감옥에 가기도 하고 부정에 연루되어 자살도 하고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감옥 갔다가 대통령도 되는 희한한 세상에 살고 있다. 미국은 지난 9,11 제 17주기 추모 행사 때 생존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오바마, 클린턴, 부시 부자지간, 카터- 다섯 분이 손에 손을 마주 잡고 미국 국가를 엄숙하게 불러, 전 세계인들을 감동 시켰는데 이들 중 감옥에 간 사람은 물론 한 분도 없었다. 정치적으로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인지 문화의 차이인지 알 수가 없다.
“내 일찍이 시골에 묻혀 누렁이(黃狗)와 더불어 사냥이나 하고 살았더라면 오늘 이런 참변은 면했을 것인데........결국 내 욕심이 나를 망쳤구나. 너희들은 절대로 아비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아다오...........” 한때 천하의 대권을 잡아 권세와 명예와 부를 한 손에 잡고 영화의 극치를 누렸던 중국 진나라 재상, 이사(李斯)가 정적(政敵)에게 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으로 이 고사를 일컬어 황구지탄(黃狗之嘆)이라 하여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 봐도 당파 싸움이 반복되면서 한 때는 벼슬에 올라 충신으로 권세를 누렸던 이들이 정권이 바뀐 뒤에는 역적으로 몰려 귀양을 가기도 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일들을 수 없이 보았고 어쩌면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들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비운(悲運)을, 개탄과 후회로 감내해야만 하는데도 죽기 살기로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안간 힘을 쓰고들 있으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후회 없는 삶을 살기를 바라고들 있지만 그러나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고 보면 후회 없는 삶을 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일의 초기 단계에서 오는 단순한 실패와 후회는 그 자체가 교훈과 바탕이 되어 성공의 열쇠가 될 수도 있지만 영영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저질러 급기야는 인생을 파국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일들을 우리는 수 없이 보아왔다. 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자신의 앞길에 훌륭한 자대로 삼아야 하는데도.....막상 자기 앞에 닥치는 일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인 것 같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간혹 더 큰 명예와 더 큰 부(富)와,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정도(正道)를 벗어나 사로(邪路)를 걷다가 황구지탄을 읊조리며 “내 욕심이 나를 망쳤구나.....”후회하면서 눈물을 뿌리는 사람들을 본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나 하나 만의 이득만을 탐내는 자는 언젠가에는 화를 입게 된다는,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럴 때의 후회는 가치가 없다.
톨스토이의 명작, ‘부활’을 보면 자신의 순간적인 실수 -신분의 차이 때문에 사랑했던 카튜사를 버림-로 파멸한 여인(카튜사)을 위해 시베리아 감옥까지 따라가는 등, 안간힘을 쓰는 네오돌프의 후회는 진정한 뉘우침으로...... 자신이 저지른 허물을 통하여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삶을 살고자 끊임없이 반성하고 노력하는 그의 모습 자체가 바로 후회의 미학(美學)이라 할 수 있다. 후회는 후회로 끝나면 가치가 없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네오들프처럼 미래지향적인 의지로 바꾸어 갈 때 후회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은 후회를 가르치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돈만 있으면 무조건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해왔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밀치고라도 윗자리에 올라서면 입신출세한 것으로 믿어 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진리가 얼굴을 내 밀게 되는 날, 바벨탑의 영광은 한낱 허황된 꿈이었던 것을 깨닫게 된다. 무분별한 출세주의는 인간을 파멸의 낭떠러지로 추락시키고야 만다. 비록 크게 출세를 하지 못 해도, 돈을 많이 벌지 못 해도, 많은 권세를 못 누려도 ‘부활’에서의 네오돌프처럼 초기 단계의 후회와 실패를 거울삼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이웃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함께 잘 꾸려 나간다면 이것이 인생무상을 뛰어 넘는 진정한 가치 있는 인생드라마가 아닐까 싶다.
결실(結實)의 가을에
이우상
무더운 한여름의 열기가 계속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풀벌레 울음이 드높아가고 있다. 고향집에 들렀다가 한낮에 입을 연 귀뚜라미 노래 소리에 나도 모르게 스적스적 문밖을 나섰다.
가을은 소리 없이 다가와 우리들 눈앞에 황금벌판을 펄쳐 놓고 알곡이 익어가는 소리를 들려준다. 이렇게 골짜기마다 들녘마다 어김없이 제몫을 다해 생의 결실의 잔치를 벌이는 모습이 거저 황홀하기만 하다.
청명한 하늘 아래 탐스럽게 익어가는 붉은 사과는 한낮의 따가운 열기로 속살을 더욱 단단하게 익혀가고 땅콩과 고구마는 땅 속에서 이제 곳간으로 이사할 채비를 서두르며 풍성한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부모님 산소를 모신 고향마을 앞산의 밤나무 옆을 지나가니“툭”하며 알밤이 추락하면서 자기의 존재를 알리는 파격음을 던진다. 여기 저기 봄에 뿌려진 곡식들이 저마다 알차게 여물어 하나의 구김살도 없이 대견스럽게 계절의 광채를 던져주는 튼실한 모습에 그저 고마움을 표할 뿐이다. 특히나 알뜰살뜰 보살핌도 없었는데 스스로 그렇게 자라준 밤을 보니 갑자기 ‘조복거인(造福擧人)’ - 자기 복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간다.- 이란 말이 떠오른다. 올 여름은 예년에 볼 수 없을 만큼 무더웠고 가을장마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채소들이 견뎌내지 못하고 그냥 녹아내리기도 했다.
쉽게 가을이 올 것 같지 않더니, 그러나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오듯 결국 가을은 오고야 말았다. 빛나는 생명들은 무서운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고 저마다 승리의 깃발을 들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고운 빛깔로 우리들에게 안겨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을 들녘에는 우리들 가슴을 훈훈하게 풀어주는 이름 모를 풀꽃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알차게 여무는 곡식들을 보면 농부의 피땀 흘린 수고에 고개가 숙여지고 충만하게 가꿔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이즈음 외진 들길에 피어 있는 야생초를 대하면서 속세에 물들지 않은 청순한 자태를 보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우리네가 부끄럽기만 하다.
자연에 결실이 있듯이 인생에도 결실이 있다. 그래서 자식을 기르는 일을 ‘자식농사’라고들 한다. 우리 가정에도 비록 크진 않지만 솔솔한 결실을 맞은 금년이다. 캐나다로 시집간 딸애는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하여 시민권을 얻었고 시위 녀석은 밴쿠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안정된 생활을 보장 받게 되었으며 손주녀석은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며느리는 김천의료원에 간호사로 복직을 하는 등, 작지만 이런 결실 하나하나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초석을 놓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그렇다, 계절적 결실도 풍요롭지만 인생의 결실 또한 여기에 못지않게 한 몫을 한다. 어떻게 보면 결실이란 게 또 다른 면으로는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결실 뒤에는 또 새로운 시작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과 결실이 끊임없이 순환 반복 되고 있다. 결실은 등위를 매기기 곤란하다.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빨리 커는 나무가 있고 평생을 자라도 다 커지 않는 나무가 있듯이 인생사에도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있고 삶의 이모저모를 폭넓게 체험하면서 뒤늦게 결실을 맺는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인생도 있다. 결실에 등위나 크기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작으면 어떻고 좀 늦으면 어떠랴? 그저 나에게 주어진 삶을 알차게 가꿔 수확물을 기쁘게 소쿠리에 담는 일이면 훌륭한 결실이 아니겠는가? 목적지에 언제 도착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만큼의 최선을 다한 결실인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이 가을, 들녘에 서서 무엇을 왈가왈부(曰可曰否)하랴? 다만 자연에서 들려오는 결실의 신비로움을 바라보면서 여기에 인생의 결실을 보듬어 얹어보는 것으로 이 가을을 만끽하면 그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