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 후보작품
굴참나무
안현심
너는
지상을 유영하던
혹등고래
바람이 지날 때마다
휘파람을 잘도 불더니
등허리 달라붙은 따개비처럼
우툴두툴한 이끼를 덮어쓰고 있구나
운장산 골짜기
오래된 바다에서
늙은
휘파람 소리
아장아장 헤엄쳐온다.
----{애지}, 2021년 여름호에서
항아리
송찬호
물이 반쯤 찼다고
항아리 웃네
항아리 옹알이 하네
물이 반쯤 찼다고
항아리 배불뚝하네
물이 반쯤만 차도
꺄르르 웃는
오, 항아리는 튼실하여라
항아리 저리 의젓하니
물맛도 똑똑해지네
젖살이 올라 물이 통통해지네
----{애지}, 2021년 여름호에서
나를 응시하는 눈이 있다
김추인
미행 당하는 기미에 휙 돌아본다 없다
내 안에 나인 듯 아닌 듯 들키는 이
바깥과 안쪽
현실의 나와 꿈꾸는 나
때때마다 다른 면상이
물과 기름 같아서
때론 샴 쌍동이 같아서
훈장님네 반듯한 딸과 바람 타는 딸이 내 안에서 티격태격 툭하면 목을 비틀고 싸우는 둘의 불화 그런 ‘나’들을 한심스레 바라보는 또 다른 내가 있고
바라보는 ‘나’의 근심에 안스러워 궁구하는 또 하나의 ‘나’라니...
이들만이 아니고
가끔 허락도 없이 생뚱맞게 튀어나오는
내 안의 ‘나’들
슬픔이와 우울이 사랑이와 명랑이 찬찬이와 덜렁이 팔랑이 부산이 묵묵이 탐심이 헐렁이 한심이 투박이 비단이 시치미 뚝뚝이 쪼잔이 대범이 상큼이 그리고 삐죽이와 넉살이, 숨겨둔 딸년들처럼 무시로 나오기도 하는데
광화문 교차로
숱한 내가
죽어도 아닌 것이 아닌 내가
신호등에 동공을 박고 섰던 처녀인 내가 상남자인 내가 깜박 바뀐 파란불이 지상명령이란 듯
삽시간에 부딪치며 스치며 흘끔거리며 조잘대며
겨울을 벗지 못한 내가 미리 꺼낸 반팔의 내가
환절기 기침을 숨기며 총총걸음으로 느릿느릿 팔랑팔랑
길을 건너가고 있다 다들 내안에서 때를 엿보던 것들
너도 나이고 파릇한 너도 완고한 너도 개같은 너도 너도 나다
----{애지}, 2021년 여름호에서
그래서 구구
한연희
구구와 구팔은 자매인 동시에 그저 남이다 한쪽은 암기 능력이 뛰어나지만 한쪽은 관찰력이 뛰어나다 구구는 왼손잡이지만 구팔은 오른손잡이이다 그래서 구구와 구팔은 서로 닮지 않은 것에 안도하면서 닮은 구석을 발견한다 가령 새끼손가락이 유난히 짧거나 귓불이 둥글고 도톰한 것
구구와 구팔이 서로를 깎아내리기 시작하면 둘은 사과 같아진다 사과는 하나다 하지만 곧 쪼개진다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껍데기는 종종 알맹이를 잃어버린다 모난 부분을 도려낸다 사과였던 흔적을 본다 어째서 우리는 뼛속까지 다르지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할 수 있는 건 사람뿐이라서
구구는 구팔을 껴안는다 실체가 없는 구팔은 차갑다 손 아래로 흘러내린다 너는 구구일까 구팔일까 아니면 구삼 구이 구영…… 흐르는 동시에 멈춘 시간이 물통에 빠진다 물통에서 오늘이 불쑥 솟아난다 줄줄 바깥으로 흘러내린다 바닐라와 초코, 아몬드와 슈퍼에고, 이드와 숟가락,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 한 스푼으로 자신을 깨달을 거야
구구는 크게 떠서 먹는다
구팔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애지}, 2021년 여름호에서
봄똥으로 온 여자
이영식
불가촉천민으로 살았지.
천지간, 풍찬노숙 툭툭 털고 일어선 알몸의 여자. 납작 엎드려만 살다가 속이 차지 못한 몸종 같은 여자. 오가는 바람 치근덕거려도 손사래 치거나 도망치는 법 모르는 여자. 억울하고 분할 때면 푸하하! 한 무더기 소똥 같은 웃음 터트리는 여자. 봄― 봄동이라 부르기보다는 봄똥이 어울리는 여자.
잔설 남아있는 겨울 끝자락. 잡히는 손에 쩍쩍 찢어져 즉석 겉절이로 버무려지는 여자. 냉이 달래처럼 곱고 예쁘지는 않지만 그 이름 자꾸 씹다보면 아삭, 고소한 맛이 나는 여자. 속이 시끄럽지 않고 편해서 곁에 있는 줄도 몰랐던 여자. 얼룩져 우그러진 하루에 은근히 힘이 되어주는 내 여자.
고향이 어디냐 물어도 남쪽이라 흘리며 먼 하늘만 바라보네.
----{애지}, 2021년 여름호에서
그들
오은
난 날은 같은데 간 날은 다른
사람 둘
남은 자는 먼저 간 자를 생각한다
왜 이렇게 빨리 떠났냐고
저세상을 향해 울부짖는다
난 날은 다른데 간 날은 같은
사람 둘
먼저 난 자는
한창때인데 왜 따라왔냐고
나중에 난 자에게 역정을 낸다
난 날과 간 날이 같은
사람 하나
남은 자는
박수하다가 기도하다가
축하하다가 애도하다가
생일이 기일일 때
나고 간 것은 다름 아닌 너인데
눈물 나고 맛 간 것은 왜 나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남은 자의 몸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주저앉는다
----{애지}, 2021년 여름호에서
직박구리 봄을 노래하다
이복규
새가 날면 새~하고 소리가 난다
금요일 저녁 멀리 있는 딸이 노래를 녹음하여 카톡으로 보냈다 종일 바쁘게 일하다 집으로 쫓기듯 돌아와 겨우 노래를 듣는다 소리가 피로를 야금야금 먹는다 아내의 눈에는 강의 하류 건너는 물소리 잔잔히 울린다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그 겨울의 네가 봄을 부른다
어둠 속에 네가 울고 있다 어둠 속에 네가 빛나고 있다, 때로는 밝음 속에 숨어 있고 밝음 속에 눈물이 눈부셨다 노래는 잠들지 않고 밤을 깨우기도 하고 낮을 깨우기도 하고 너를 위해 잠들지 못한 불면의 밤을 위해, 너는 밤을 지키는 소리가 되고
내가 너를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해가 길어진다는 것은 해가 더 뜨거워졌다는 것, 해가 진 시간에도 달빛을 빛나게 하는 너를 ‘영원’이라 한다 어둠의 뿌리를 ‘나무’라 부르고 잎들을 ‘노래’라 부른다
직박구리 한 쌍 까치머리로 나뭇가지에 앉아 비 오는 소리로 운다 어제 왔던 그 새인가, 어머니가 소리로 그리워지는 날, 가지를 흔들고 땅을 툭툭 치며 눈을 소리 소리가 소리를 만들고 소리는 공간을 연다 고요하면 고요할수록 소리는 날개 되어 날아오른다
목련이 어깨를 부르르 떨면 날이 밝아 온다 언제부터인가 잠들지 않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잠 들 때까지 밤이 있어 주었다 아침은 가벼웠다 어둠이 저절로 물러갔으니까, 구십이 넘은 외할머니의 떠나는 소리는 아침에 전해졌다, 직박구리가 물어다 놓았다 어제 왔던 새인가 새끼를 데리고 와 새~하고 울었다
*주 품에 품으소서의 가사 부분.
----{애지}, 2021년 여름호에서
동백꽃 피려 할 때
전 영 숙
찌르르 젖이 돈다
둥글게 문질러
아기의 입에 젖을 물린다
동백나무가 공중의 입에
꽃몽우리를 물리 듯
어찌나 세게 빠는지
아기의 이마와 코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꽃몽우리 끝도 피가 몰린 듯 발갛다
쓰리고 화끈거리겠지
속엣 것을 빨아 낼 때
부르르 떨리던 고통
흔들리는 동백나무가
바람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쏟아져 나오는 젖 물처럼
터져 나올 꽃잎들
또 공중의 입속은 얼마나 달콤할까
햇빛과 바람에
통통 분 꽃몽우리가 벌어진다
벌과 나비
공중에 속한 것 모두
잠든 아기 배만큼
부르겠다
찌르르 젖이 돈다
동백이 피려 한다
----{애지}, 2021년 여름호에서
멈춰 버린 심장처럼
김지요
폭설이 내렸습니다
검은 까마귀 떼가 설원을 날았죠
12월의 사라오름엔 흑과 백
두 가지 색만 남았어요
종아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눈 보다
당신의 침묵이 더 서늘했어요
결빙의 호수를 가로질러 간
선명한 발자국만 남았죠
압 안의 말은 더 이상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아요
당신에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어리석게도 마음을 가지려 한 적 있어요
호수를 삼킬 듯이 눈이 내리고
얼음심장으로 숨을 쉬는
호수와 함께 하얗게 지워져 가요
귀가 먹먹하게 내리는 눈발이
돌아갈 길을 숨겨 버린 지금
눈이 멀어 가요
나는 누구인가요
----{애지}, 2021년 여름호에서
서커스 집
신영배
이 집이 마음에 들어 젤소미나가 사는 집 허공에 줄을 치는 집 줄 그림자를 따라 토마토 씨앗을 뿌리는 집 머물 수 없는 집 줄을 걷고 떠나는 집 이 집이 마음에 들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집 영원히 토마토가 열리지 않는 집 젤소미나가 죽을 집 해변에서 해변으로 이어지는 집 몸은 말이 되고 말은 집이 되고 쓰러지는 집 이 집이 마음에 들어 마지막 물 한 방울의 집 길과 사람들 그림자로 가득 찬 마을 바람의 입구로 흘러드는 집 태양의 천막을 치는 집 바다를 끌어 오는 서커스 바다 속으로 뛰어내리는 서커스 다시 바다를 뒤집는 서커스 박수 소리와 파도 소리 이 집이 마음에 들어 젤소미나가 사는 집 서커스와 함께 피어나는 집 언젠가 시들고 말 집 접어야 하는 집 젤소미나가 죽을 집 이 집이 마음에 들어 달에 천막을 걸어두는 집
----{애지}, 2021년 여름호에서
왼쪽의 깊이
우현순
왼쪽 손목이 이상이 생겼다 나는 오른손잡이 인데 어디 부딪혔나 곰곰이 생각한다 이렇게 왼손을 못 쓰게 되고 보니 오른손잡이가 왼손을 더 쓰고 있었다
요리할 때 칼을 쥐는 것은 오른손 이지만 단단히 잡고 있는 것은 왼손이네 프라이팬이 움직이지 않도록 쥐고 있는 것도 왼손이네 못을 박을 때 쓰러지지 않도록 꼭 쥐고 있는 것도 왼손이네 책을 읽는다 책을 받치고 있는 것도 왼손이네
왼쪽으로 산다는 것
아무 때나 갖다 써도 되는
그런 왼손 같은 존재라고
여기던 당신에게
오른손이 묻고 싶어지는
어느 날, 오후
----{애지}, 2021년 여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