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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의 교회를 가다
(최재영)
「미국에서 소셜 무브먼트 그룹 NK VISION 2020을 설립해 남과 북을 서로 왕래하며 동포들에게 민족화합과 자주통일을 위한 새로운 이슈와 비전을 제시하는 통일ㅇ누동가. NK VISION 2020산하에 손정도목사 기념학술원(역사), 동북아종교위원회(종교), 남북동반성장위원회(경제), 오작교포럼(언론) 등 네 기관을 두었으며, 남 북 해외 동포 3자가 민족공조를 이룬 후에 국제공조 속에 주권적인 통일을 이루도록 조력하고 있다. 풀러신학교 대학원 선교목회학 박사이며, 미국 The Lighr of Glory Church 담임목사를 역임하였다. 저저에 <평양에서 누구나 미식가가 된다>,<평양에서 서울로 카톡을 띄우다>,<평양냉면>공저),<북한 다름을 만나다>(공저) 등이 있다.」
[책을 펴내며]
이 책은 분단 이후 최초로 현존하는 북측의 교회공동체들을 집중 탐방한 실록이다.
광복 70주년을 전후해 민간 차원의 대북 프로젝트를 세워 이를 성사시킨 후 몇 년에 걸쳐 틈틈이 방북 길에 올라 면밀히 조사하며 돌아보았다. 북측 영토 내에 있는 모든 개신교 교회들과 기관들은 물론 가톨릭교회와 러시아 정교회도 돌아보았으며, 정통 개신교에서는 이단으로 규정한 통일교와 몰몬교, 안식교까지 빠짐없이 참관하여 실태를 알아보았다.
북측 개신교 중에는 조선 그리스도교연맹이 직접 주도해서 설립한 교회, 남측이나 해외에서 설립한 교회도 있었고, 현재 설립을 추진 중인 교회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다. 그런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를 지닌 북녘의 교회들과 자생적인 500여 가정 교회와 처소 교회 공동체들에 대한 실태 파악이 수면 위에 드러났으며, 동시에 남측과 해외에서 북측 영토에 세운 교회들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한국교회와 해외 한인교회들이 그동안 펼쳐왔던 북한 선교의 민낯도 여과 없이 드러났다.
필자가 볼 때 분단 이후 남북문제로 인해 발생한 남녘 사회 내부 갈등의 본질은 좌우 이념 대립이라기보다는 진실과 거짓의 문제였다. 그러기에 북에서 체험한 다양한 기록들과 다면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사실들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남측의 보수 기독교 세력들은 그동안 북에 대한 종교적 상황에 대해 너무 큰 증오와 편견을 불러 일으켜왔다.
북녘의 인민들은 자신들이 피땀 흘려 지켜온 민족정신과 자주정신의 바탕위에 주체 문화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가정 교회와 처소 교회들을 이끌어왔고, 몇몇 교회당들을 건축하며 예배를 드려왔다.
내가 북녘의 교회공동체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주체 문화가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토착화되었으며, 기독교의 정체성은 주체 문화와 공존하며 민족종교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기독교라는 거대하고도 세계적인 종교를 자신들만의 고유한 민족종교로 정착시킨 국가는 지구상에 이북 사회뿐인 것 같다.
그 후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변함없이 수 십 년간 꾸준하게 예배를 드리며 신앙의 그루터기 역할을 해오던 중 1988년 11월에 평양 봉수교회당, 1989년 말에 평양 칠골 교회당을 건축해 자신들의 신앙을 세상에 드러냈고 새로운 터전을 삼은 것이다.
미국이라는 외세가 개입한 6.25전쟁으로 인해 이북 지역에서만 희생당한 수가 120만명(1,231,540명)이 넘는다. 이런 생명을 앗아간 참혹한 전쟁을 직접 경험한 북녘의 신자들은 미국의 실체를 제국주의로 받아들였고 자신들은 철저한 민족주의로 뭉쳤다.
나는 이 책이 독자들로 하여금 북의 인민들이 왜 서양 기독교, 특히 미국식 기독교를 철저히 경계할 수밖에 없는지, 왜 민족주의적인 기독교를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강조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깊은 역사적, 문화적 성찰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필자가 북측 교회들을 탐방해보니 이북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자국민에 대한 종교를 핍박하거나 억압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적극 권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미국과 첨예하게 대결하는 상황이고 남북 관계가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다 보니 자신들이 지켜온 자주성과 국가의 생존을 침해하는 경우에 한해서 그리고 종교라는 명분으로 선교와 포교활동을 빙자해 자신들의 안보를 위협하거나 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두고 있는 외부 기독교 세력들을 유동성 있게 제한할 뿐이다. 마치 한국교회가 이슬람교가 국내에 유입되는 것을 반대하고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이북 교회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를 조용히 묻고 싶다. 또한 한국 교회가 그토록 미워하는 북측을 향해 북한 선교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또한 묻고 싶다.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하고 있는 나라가 있는데 여기서 종교가 아편이라는 비유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이는 종교가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민중의 아편이 된다는 뜻이다. 사랑의 종교가 침략의 종교로, 섬김의 종교가 군림의 종교로, 평화의 종교가 잔혹한 종교로, 나눔의 종교가 착취의 종교로, 평등의 종교가 억압의 종교로 둔갑할 때 그 종교는 이미 신자들과 민중들의 피를 말리며 그 사회를 황폐시키는 독소가 되는 것이다.
내부적으로 부패한 한국교회가 철저한 자기 개혁 없이 선교의 허영에 들떠 맹목적으로 북한 선교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 청정지역인 이북 사회를 오염시키는 일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머리글] 북녘의 교회를 찾아가다.
동이 터가는 무렵의 강가에는 70대 후반의 할머니 두 분이 나란히 쉬고 계시는 모습이 눈에 띄어 다가갔다. ~~~~어릴 적에 교회에 다녀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아무 말 없이 고개만 좌우로 흔들었다.
이튼 날 다시 만난 할머니는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6.25전쟁 당시 미군 폭격에 의해 형제 3명과 어머니를 동시에 잃고 자신과 아버지만 구사일생으로 남았다고 전해주었다.
피난민 대열 속에 할머니의 가족들은 미군 폭격을 피하려 이리저리 몸을 숨기던 중 가장 안전하게 생각한 교회당으로 피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잔인한 미군 조종사는 오히려 그 교회 건물에 더 집중적으로 폭탄을 퍼부어 식구들이 모두 몰살을 당했다고 했다.
반미감정은 미국이 믿고 있던 종교라는 이유 때문에 기독교라는 종교까지 거부하고 증오하게 하였다.
김일성 지도부가 이끄는 당과 내각에서는 모든 종교시설물들을 재건하려고 했으나 인민들과 일반 대중들이 반대하여 좌절되었다.
※북녘의 교회를 이해하는 첫 걸음은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
수가 성의 여인에게 다가가 물 한 모금 얻어 마시며 대화를 통해 원초적인 갈등을 해소시킨 예수처럼....
신약성경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유대민족과 사마리아 민족은 원래 한 혈통이었으나 앗수르 제국의 침략전쟁의 비극적 결과로 두 민족은 서로 갈라지며 적대관계가 되었다. 솔로몬 시대 이후 남북이 분열되어 남왕국 유다,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할된 후 BC722년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앗수르인들이 북부 사마리아에 내려와 살며 유대인과 결혼해 피가 섞인다. 반면 유다는 BC58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 남 유대인은 북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고 조롱하며 왕래조차 없이 높은 장벽을 두고 각자 살아갔다.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역사를 경험했고,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으며 서로 포악하고 적대적인 행위를 하다 보니 화목하고 평화로울 수 없었다.
이 경계는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주 깊고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는데 어느 누구도 이 경계를 허물 수 없을 만큼 깊고 완강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 경계를 가로질러 모두가 회피하던 장벽을 허물고자 사마리아를 찾아가 우물가의 한 여인을 만났고 그녀가 평생 풀지 못하던 인생의 문제와 정치적, 종교적인 문제를 회복시켜 주었다. 오늘날의 남측의 교회도 그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성도 없는 북한선교의 허영에 들떠 있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예수께서 성경에서 모범을 보이신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의 기초를 놓는 과업부터 하나씩 차근차근히 시작해야 한다.
1972년도부터 조금씩 그 경계심과 불신의 마음을 열고 이북은 가정 교회와 처소 교회들을 세우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도엔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연이어 설립했다. 또한 목회자를 배출하는 평양 신학원까지 설립하는 진전을 보였다.
남한 식 기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동안 북측 교회와의 진지한 대화와 교류를 무시하고 단지 식량과 물품지원을 받는 구호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오만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 교회와 지하교회를 혼동하는 데 가정교회(처소교회)는 노동당과 내각, 조선그리스도 연맹이 승인하고 공인한 합법적 교회인 반면, 지하교회는 미국과 한국과 중국 등에서 훈련 받은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북측 영토 내에 비합법적으로 입국하여 북 당국의 승인 절차 없이 음성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거나 조직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경우는 북 당국이 체제전복 세력과 반통일 세력으로 규정하여 철저하게 단속한다.
1980년대 이후 북측 영토에 설립되었던 기독교를 유형별로 크게 분류하면 민간교회와 공식 교회로 나눠진다. 민간교회란 남과 북이 상호 협의하여 북측 영토에 설립한 남한 교회들을 일컫는다. 이런 민간 교회의 경우는 주로 직장교회가 대부분이다. 지금은 중단됐지만 함경도 신포의 KEDO경수로 공사현장 생활관 부지 내에 건축된 신포교회와 금호성당을 비롯해 금강산관광 시기에 금강산 빌리지에 세워진 금강산교회가 있고 개성공단 내에 건축된 개성신원교회가 있다. 또한 평양과기대 게스트하우스 내에 평양과기대 채풀에서는 지금도 매주 오전 9시에 주일예배가 드려진다. 이와는 별도의 민간교회로는 대동강변에 건축된 평양제1교회가 있는데, 이는 다용도 교회로서 원래의 온실건물 용도와 함께 2층에 별도로 작은 기도처소형식의 예배당이 마련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공식교회를 살펴보면 현재 예배나 미사가 드려지는 사역교회로는 개신교의 평양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있으며 천주교의 장충성당과 러시아정교회의 정백성당에서는 매주 미사가 드려지고 있다. 또한 사적지 교회로는 황해도 은률읍교회와 량강도 포평 사적지 내에 있는 포평교회가 있다. 또한 형제산 구역에 있는 영화셋트 촬영ㅈ아소로 사용되는 형제산 교회가 있으며 통일교가 보통강호텔 앞에서 운영하는 국제평화센터가 있다.
현재 교회 건물이 추진되거나 추진 중에 중단된 교회들을 살펴보면 미국의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빌리그래이엄 목사 아들)가 추진 중인 평양 국제외국인교회가 설립 준비 중이며, 미국의 IT 기업 노바의 조명호 사장이 대동강변 IT단지에 설립하던 중 갑자기 타계하는 바람에 현재 중단된 상태에 있는 평양 국제 하베스트교회가 있다. 또한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설립한 평양 조용기목사심장병원 건물에 30평 규모의 교회당이 허가를 받았으며, 이 병원 건물은 5.24 대북 조치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현재 공사가 중단된 상태에 있다.
또한 개신교는 전국적으로 500여 개의 가정교회(처소교회)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천주교 측도 20곳의 가정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그 외에도 북에는 정형화되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 교회가 더러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부분도 심도 있게 다를 것이다.
■ 제1부 북녘의 교회 편
[평양 봉수교회]
북측 조그련(조선 그리스도교 연맹) 소속 목회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동독은 내부의 모순이었으나 현재 우리 조선민족에게 있어서의 최대 모순과 최대의 적은 남조선을 정치, 군사적으로 식민지 삼고 있는 미국이라고 강조한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사대주의를 타파하고 우리 민족 당사자들끼리 자주적인 통일을 이루는 데 앞장서 평화통일의 촛불을 지펴야 하며 그 도화선이 이곳 봉수교회를 거쳐 삼천리 반도 전역에 퍼져나가야 한다.
조그련은 김일성 주석의 외종조부이며 창덕소학교 담임선생이었던 강량욱 목사의 주도로 설립된 북조선기독교련맹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해방 직후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기존 교단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 결성된 북한의 공식 기독교 교단은 1946년 11월 28일에 설립 되었으며 그 명칭은 북조선기독교연맹이었다.
봉수교회는 1988년 11월에 건축됐기 때문에 건물이 노후화됐다. 이 소식을 접한 남측의 예장 남선교회 전국연합회가 ~~~2005년 11월 10일 기공식 예배를 마친 후 남북협력사업의 차원에서 신축공사에 들어갔다.~~~ 600평 규모. 당시 건축위원장은 남측의 김용덕 장로가 이끄는 사단법인. ~~~1000여개의 좌석. 총 공사비 33억 원이 소요된 것으로 보고됐다. ~~2008년 7월 16일에 헌당식 감사예배가 드려졌다.
2015년 현재 담임은 송철민 목사(47세)이며 출석하는 신자 수는 변함없이 300명 정도 내외.
개신교회는 공식적으로 평양에는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그련의 오 경우 서기장의 증언에 의하면 508~515개의 가정교회, 처소 교회 등이 운영되고 있어 이북의 공식적인 전체 기독교인 규모는 15,000여 명에 달한다고 했다.
기독교에 대한 북측 인민들의 정서와 감정은 그뿐 아니었다. 어느 해외교포가 얼마 전에 방북해서 북측 대학원의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일정이 있었다. 대화중에 지하교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질문했더니 청년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장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자기들 손으로 직접 처단하겠다고 불같이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평양 칠골교회]
김일성 주석의 경우 유년시절에는 만경대 생가 인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 196번지에 있는 송산교회당에 모친과 함께 출석했다.
[평양제1교회]
현재 평양에는 남측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통합측 교단에서 수십억을 지원해 재건축한 봉수당교회 외에도 교회 언덕에 지은 460평 규모의 평양 신학원도 있으며, 그 옆에는 480평 되는 제1온실도 지었다.
예장 통합측은 이와는 별도로 동평양대극장 건너편 대동강 변에 400평 규모의 제2온실을 연이어 지었다. 마침 제2온실 옆에 200평 정도의 부지가 남게 되자 북측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 교회당 건축을 요청했으나 반대해 무산되고 그 대신 조그련과 남측 예장 통합측은 제2온실을 관리할 수 있는 온실관리동을 짓기로 합의했다. 온실관리동 건물 1층에는 온실관리를 위한 관리동을 만들었고 2층에는 30여평 규모의 평양 제1기도처소가 여러 우여곡절 끝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필자는 2014년 4월의 어느 봄날, 봉헌식 이후 지금까지 마치 금단의 구역처럼 출입이 통제된 평양 제1기도처소가 입주해 있는 200평 규모의 온실관리동을 방문해 둘러봤다.
제2온실을 건축할 당시 남측의 예장 통합에서는 이곳에 평양제1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수백 석 규모의 교회당을 건축하려 했으나 북측 조그련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 대신 온실관리동 건물 2층에 50여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의 작은 예배당(기도처소)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곳 평양 제1기도처소는 완공 이래 지금까지 주일예배가 드려진 적이 거의 없으며 조그련 소속 목회자가 정식으로 파송돼 목회활동이 이뤄지는 곳도 아니었다.
[량강도 포평교회]
현재 이 교회당은 매주 일요일 마다 주일예배를 드리거나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사역교회가 아니다. 또한 예배당으로서 갖추어야 할 건축양식이나 종교적인 장식물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그 어떤 강렬한 영적인 기운이 감도는 듯하여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김성주는 동생 철주, 영주를 비롯해 부친 김형직, 모친 강반석, 작은 아버지 김형권 등 모든 집안 식구들이 빠지지 않고 이 교회에 출석해 예배를 드리거나 예배 후에는 신자들을 대상으로 항일 계몽을 했다.
[황해도 은률읍교회]
1951년 중공군 투입, 유엔군의 1.4후퇴 등 전화의 격동 속에서도 다행히 이 예배당은 부분적으로 훼손되기는 했으나 즉시 복구되어 거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지금까지 본존 되어 있다.
은률읍 교회는 조선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가 이 지역을 전도한 이후 그 결실로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어 그들에 의해 1898년에 세워졌다.
[개성신원교회]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북측 당국과의 협상과정을 통해 북측 영토 내에 세워진 남측의 다양한 종교 시설들이 있었다.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가 내린 개성공단 폐쇄조치로 예배가 중단된 개성공단교회(일명, 개성교회 혹은 개성신원교회)가 있다.
이명박 정부의 5.24 대북조치에 의해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면서 예배와 목회기능이 중단된 금강산교회.
김영삼 정부시절 한미일 3국이 공동으로 투자해 함경남도 신포에 건설하던 케도(KEDO)경수로 공사현장에는 기독교 교회, 천주교 성당, 불교 사찰 등 다양한 남측의 종교 시설들이 세워졌다. 그중에서도 10만평 생활관 부지에 건설한 신포교회(기독교), 금호성당(천주교) 등이 세워져 활발하게 운영됐으나 북핵문제로 경수로 공사가 중단되고 남측 근로자들이 모두 철수하면서 예배나 각종 종교 활동 등이 중단되어 교회당과 성당은 지금도 텅 빈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오래전 한국교회와 해외 한인교회가 성금을 모아 세워진 평양과학기술대학 캠퍼스 게스트하우스에는 매 주일이 되면 교수들과 그의 가족들 위주로 정기 주일예배가 드려진다. 그러나 북측 영토에 세워진 이런 모든 특수교회들은 각계각층의 북측 인민들이 합류해 함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다.
[금강산교회]
생전의 정 회장은 80년대 초부터 매년 현대그룹 사옥 지하에서 거행된 연말 행사장의 공개석상에서 ‘나는 유년시절 강원도 통천 교향마을의 교회를 다녔으며 주일학교도 빠짐없이 다녔다’~~~증언했다.
정회장은 2001년 임종을 앞둔 서너 달 전에 불편한 몸으로 아들 정몽준 의원 내외와 주치의 최 모 박사 등이 배석한 가운데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서 온누리교회 하용조 묵사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은바 있고 운명하기 직전까지 그의 침대 머리맡에는 성경책이 놓여 졌고 수발들어 주는 과장급 직원에 의해 성경이 읽혀지고 카세트로는 찬송가를 들었다.
[함경남도 신포교회]
1994년 10월 21일 북미간의 합의문이 체결된 지 1년 후인 1995년 2월 15일 경수로 공급협정이 체결 되었고, 2년 후인 1997년 7월 28일 KEDO 사무소가 함경남도 신포시 금호지구에 개설되었다.
2001년 8월 31일 금호 지구에 270만평을 확보해 현장부지 정지를 완료하며 시설공사에 들어갔으며 9월 14일은 원전 본관 기초 굴착 착수식을 거행하였다.
당초 계획대로 2003년까지 1000메가와트 원전 2개를 완공할 목표로 관련 시설들이 들어섰다. ~~~지역에는 훗날 교회, 성당, 사찰이 들어설 종교동이 세워졌다.
1998년 컨테이너를 구입해 정기예배를 드리고 4년이 지난 후 예배당을 건축해 입당한 날은 2002년 4월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06년 1월 7일 직원과 근로자들이 모두 철수하며 교회운영은 완전히 중단되어 교회당도 무기한 폐쇄되었다.
[평양과학기술대학교교회]
현재 연간 70억 원에 이르는 운영 재원은 정부 및 민간 차원이 지원으로 이뤄지며 특히 교사와 신자들의 지원이 대부분이다. 설립이후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1억 원을 지원 받았으나 5.24 조치 후 남측 정부의 지원은 중단된 상태다. 현재는 미국과 유럽의 기독교 단체가 지원하고 있는데 가장 많이 차지하는 비용이 바로 900여 명이 하루 세끼를 먹는 식대와 17개 건물동의 난방비다. 그러나 이런 재정확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평양과기대는 그동안 2011년과 2013년, 그리고 2015년 총 세 차례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2015년 현재 전체 학부생은 500명, 대학원생은 90명가량으로 늘었다.
[평양 형제산 교회]
산 위에 지어진 이 예배당은 현재 예배를 드리거나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아니다. 오직 일반 방문객과 관광객들에게 보여 주거나 전적으로 촬영 용도도로만 사용되는 세트장이다. 그러나 과거 해방 전에는 이 교회당이 있던 자리에 tfl제로 교회당과 수양관이 있던 자리였다.
[평양제3인민병원교회]
평양제3인민병원은 미국 북미주에서 활동하는 기독교 의사들이 주축이 돼 건립한 병원이기 때문에 설립 초기에는 병원 내의 작은 공간에 예배실을 마련해 한동안 운영했으나 현재는 이 예배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평양 조용기심장전문병원교회]
3만m2의 드넓은 대지 위에 연면적 2만m2규모로서 지하1층 지상 7층에 260개 병상이 들어서며 계획대로라면 2010년 말 개원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착공식 후 공사가 일취월장 무리 없이 진착 되던 중 느닷없이 건축 시공사의 부도가 발생해 공사에 어려움을 겪으며 주춤했으나 어느 정도 잘 극복했다. 그러나 연이어 이명박 정부의 5.24 대북제재조치가 내려져 공사는 전격 중단돼 거대한 흉물덩어리로 방치돼 있다.
[평양국제외국인교회]
중국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던 넬슨 벨 박사는 로사, 루스, 버지니아, 크레이튼 등 네 자녀를 두었는데 이 자녀들은 모두 당시 평양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둘째 딸 루스벨도 다른 자녀들과 같이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평양에 있는 외국인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평양외국인학교는 아시아 최고의 명문 기숙학교로서 매우 유명한 학교였고 이곳에서 배출된 많은 졸업생들이 미국의 명문대학에 합격했기 때문에 당시 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을 매우 안전하고 유명한 평양외국인학교에 입학시키려고 애썼다.
둘째 딸 루스가 11살 되던 해인 1931년, 평양으로 유학을 보냈으며 여학생 루스는 이후 6년 동안 평양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루스벨이 평양외국인학교에 입학하던 1931년 당시 아버지 벨 선교사는 37세였으며 당시 김일성은 중국에서 항일 투쟁에 돌입하기 시작한 19세의 청년이었다. 또한 부친 김형직은 항일투쟁 활동 주이었으며 남편과 자녀들을 돌보던 강반석은 39세였다.
그후 루스벨은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해 20세가 되던해인 1940년 시카고의 휘튼대학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빌리그레이엄을 만나 교대하던 중 3년 후 결혼을 하게 된다.
[평양국제하베스트교회]
미국에서 컴퓨터사업을 하며 IT기업 NOVA를 경영하던 조명호 대표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 2001년 1월 북측으로부터 IT산업 육성 전략 계획에 대한 전문가 의뢰를 받으며 북측과 관련을 맺기 시작한 조 대표가 그 후 북 정보화산업을 위한 대동강변 IT단지 프로젝트를 직접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IT단지 조성과는 별도로 교회설립을 제안한 것이다.
평양의 국제전시장 인근 부지 25,000평을 제공키로 약속하고 토지측량까지 모두 마쳤다. ~~~2004년 가을에 외국인 전용 교회 설립에 대해 정식 승인을 내렸고 ~~교회 이름을 ‘평양국제하베스트교회’라고 명명했다.
교회당은 1,772평의 부지에 건평 639평, 지하1층과 지상3층에 1천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며 건축비가 총 600만 달러가 투입되는 공사였다.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북 당국이 두 차례에 걸친 교회당 변경 요청을 하는 바람에 건축에 큰 차질이 생겼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모든 프로젝트의 핵심 당사자였던 조명호 대표가 갑자기 지병으로 타계하는 바람에 ~~~건축 프로젝트는 무기한 중단되어 지금까지 무기한 연기 상태에 있다.
북측 인민들의 입장과 정서를 배려하지 않고 제국주의적 선교나 근본주의 기독교 관점에서의 일방적 선교 개념으로 무조건 교회당만 지으려 한다면 이는 매우 무모한 일이며 실패한 사역에 불과하다. 설령 교회당이 원하는 대로 건축되었다 한들 건축 이후의 철저한 사후 대책과 대안이 없다면 차라리 건축을 시도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이미 남한의 예장 통합측이 주도해서 동평양 지역 대동강변에 건축한 평양제1교회당(제1기도처)은 수억을 투입해 준공했으나 사후 운영 대책이 전혀 없어 결국 건물 일부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텅 비어 있는 공간으로 방치되어 있고 나머지 건물은 거대한 온실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도 북 중앙당과 군부에는 대남 강경파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며 이들의 대남 정책과 인식은 아직도 반미, 반기독교정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그들은 보수적인 남한 교회와 해외 한인교회들이 반공, 반북 사상을 품은 채 북 영토에 교회당을 짓는 것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북 영토에 교회당을 지으려는 순수한 행위를 저들은 오히려 스파이 혐의나 체제전복 세력으로 오해할 소지가 많기 때문에 교회당 건축을 순수하게 허락할 리 없다. 평양국제하베스트교회를 신축하는 대신 기존 칠골교회를 허물고 다시 재건축해서 사용하라는 제안과 평양사회복지센터를 건축해 달라는 제안은 조그련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이 권한 밖의 일이며 인민들과 당의 방침을 받드는 행위일 뿐이며 거기까지가 조그련의 한계이다. 모든 대북사역자들에게는 민족의 앵글에서 북을 바라보는 내재적인 접근 방식이 절실하다.
[평양 장대현교회]
평양장대현교회 복원 프로젝트는 북 조그련 측의 견해 차이와 예장 합동 측 대표단의 북에 대한 몰이해와 협상 능력 부재 등으로 결국 결렬되고 말았는데~~예장 통합 측은 비록 평양의 옛 장대현교회터는 아닐지라도 남측 영토인 경기도 이천군에 교회를 복원해 기념하기로 했다.
100년 전인 1907년 당시 모습으로 평양 옛 터전에 세운다는 예장 합동 측의 프로젝트는 결렬되고 그와는 별도로 예장 통합측 기관과 인사들에 의해 5분의 1 크리로 재현된 것이다. 이천시 대월면에 세워진 교회당은 크기는 축소됐지만 옛 모습과 풍습을 그대로 재현했으며 남녀를 구분해서 낮았던 기역자 형으로 지어졌고 종탑도 그대로 세웠다.
북의 진정성은 북 영토에 교회당을 하나 짓는 것보다 남북통일 문제와 민족의 자주적인 공조 문제에 더 큰 관심이 있다.
아무리 남한 교회가 수십억 원의 예산을 들여 제3, 제4의 교회들을 평양에 건축한다 해도 과연 보수적인 남한 교회들이 생각하는 선교 효과를 거둘지에 대해서는 계속 의문이다. 만일 30억 원 이상이 책정된 이번 4,5층 규모의 평양 장대현봉사센터가 칠골교회 앞에 실제로 건축되었다면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평양에 세운 류경체육관처럼 남북 교회 간의 교류와 협력의 장으로 사용됐을 것이며 남북 화합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물이 됐을 것이다.
[나진선봉교회]
그동안 각 교단 차원에서 많은 교회들과 대북 지원 단체와 선교 단체들을 통해 나진선봉지역에 교회당을 설립하고자 무던히 안간힘을 써왔으나 모두 허사였다.
라선시에서는 예배를 통해 북 인민들을 끌어들이거나 기독교를 전파하는 행위는 일절 금기시되어있다. 공식적인 교회당은 없어도 당국에서는 라선시에 상주하는 해와동포나 외국인들이 자체적으로 주일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 거주하는 미국교포 그리스 김과 그의 가족들과 사역일행들 그리고 만나미션의 이영호 박사와 같이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의료봉사를 하는 사역자들은 라선시에서 어떤 방식으로 예배 공동체를 운영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라선특별시는 1991년 12월 자유무역지대로 지정된 후 95년부터 외국인투자자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현재 170개 업체가 입주해 활발한 기업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중 대부분은 중국기업이며 그 뒤를 이어 미국과 유럽의 기업들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다.
6.25 전쟁을 치룬 후 현재까지 라선시 지역에는 평양처럼 북 당국과 조그련에서 공식적으로 세운 교회당은 존재하지 않으며 남한 교회나 서방 세계에서 세운 교회당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해외동포 사역자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드려지는 교회 공동체는 여러 개가 존재하고 있다.
※ 라선시에서 발생했던 대표적인 억류 사례들
라선시에서 선교와 전도 혹은 포교 활동의 목적으로 성경책이나 종교 경전 혹은 전도용 책자나 전단지,CD/DVD등을 배포하는 행위는 매우 무모하고 위험한 행동이다.
1998년 6월 나진선봉지역에서 간첩 혐의로 채포돼 3개월간 억류된 후 풀려난 미국 LA의 이광덕 목사가 미국국적 목회자에 대한 최초의 억류사태였다. ~~2007년 11월 3일 캐나다 시민권자인 김재열 목사가 라선시에 자신이 설립한 치과병원에서 ‘인민들이 보는 공공장소에서 종교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억류되었고, 이어서 2009년 12월 25일 성탄절에는 김일성 하야, 정치범 수용소 해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며 방문비자도 없이 두만강을 무단으로 건너 월북해 체포되어 43일 만에 석방된 로버트 박 사건이 발생했다.
2010년 11월에는 ~~모퉁이돌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미국 시민권자인 전용수 목사가 북측을 자극하는 공격적 선교 행위로 인해 억류된 사건이 발생했다. 2012년 11월에는 미국의 예수 전도단 소속 선교사인 미국 시민권자 케네스 배 목사가 종교 활동을 통한 정부 전복 혐의로 북 당국에 체포되어 이듬해 4월 국가전복음모죄로 노동교화형 15년형을 선고받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미국인으로는 가장 최장기간인 2년간의 복역생활을 하던 중 석방됐다.
2015년 1월 31일에는 캐나다 시민권자로서 전문적인 대북 사역 활동을 하던 임현수 목사가 라선시에서 평양으로 이동한 후 억류되어 그해 12월 16일 북 최고 재판소에서 극가전복음모 등의 혐의로 종신노동교화형을 선고 받고 현재 복역 중에 있다.
2015년 4월 8일에는 미 서부 LA에 본부를 둔 민간 구호 단체 위트 미션 대표로서 왕성한 대북 구호 활동을 해온 한국계 미국인 서계옥 권사가 억류됐다가 보름 만에 석방되어 추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주북한선교회 소속 선교사인 김동철 목사가 2015년 10월 2일 라선시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됐는데 그는 이듬해인 2016년 4월 29일 열린 재판에서 국가 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10년 노동 교화형을 선고 받고 현재 복역중이다. 또한 현재 북에는 남한에서 북으로 건너가 억류된 목회자와 선교사들도 여러 명이 있다. 2013년 10월 기독교 한국침례회 소속 김정욱 선교사가 체포돼 간첩 혐의로 무기노동교화형을 선고 받아 현재 복역 중에 있으며 대한 예수교장로회 합동중앙총회 소속 김국기 목사와 최춘길도 체포되어 2015년 6월 23일 무기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에 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라선시내에서의 rduwod적인 선교 정책을 wnde나하고 통일지향적인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또한 이북의 교회들을 무조건 매도할 것이 아니라 가정 교회와 처소 교회 그리고 공식적인 교회당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함께 한국교회의 통일의 파트너인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파트너십이 절실하다. 또한 일제강점기 역사와 더불어 분단사와 한국전쟁사 등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 이해는 물론 북미 관계와 국제질서에서의 대북 정책에 대한 객관적 소신이 있어야 한다.
대북사역자들은 소위 북한붕괴나 흡수통일의 잘못된 통일 망령과 통일관에서 벗어나 민족공조와 상생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통일관점이 필요하다. 대북 풍선 전도지 삐라 살포 행위처럼 잘못된 선교관은 현지 사역자들을 오히려 더욱 어렵게 하거나 오히려 기독교의 이미지와 입지를 제한한다.
북의 실체를 축소하지도 말고 과장하지 않아야 하며 민족의 앵글로 접근하여 객관적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 제2부 북녘의 가정/처소교회와 종교단체 편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본격적으로 전후 복구 사업이 시작되자 기존 기독교 신자들과 조기련측은 기독교를 믿는 인민들의 신앙생활 유지에 대한 가장 올바른 대책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북측 기독교 공동체는 전 세계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도 매우 보기 드믄 독특한 교회 형태인 가정 교회 제도를 정착시키며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정교회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45년 8.15 해방 직후 북조선 인민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태동되었다.
원래 김일성 위원장이 이끄는 당과 내각은 교회, 성당, 사찰 등을 우선적으로 복구하려 했으나 인민들과 민중들의 반대로 소극적으로 전환되었다. 일제 강점기 36년간 조선의 카톨릭과 개신교, 불교가 워낙 친일행각을 자처했던 것을 대중들이 모를리 없었다. 그래서 인민대중들은 역사 청산과 친일친미 사대주의 청산 차원에서 카톨릭 성당과 개신교 교회당을 복구하는 것은 물론 교회 조직이 활성화되는 것조차 꺼려하고 혐오스러워할 정도로 반대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가정교회와 처소 교회가 그 대안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방북시 봉수교회, 칠골교회 외에도 형제산구역, 옥류구역, 순안구역 등 전 지역에 산재한 다양한 형태의 가정교회들을 방문해 함께 예배를 드렸다.
1997년 당시 가정교회 현장을 직접 탐방한 백종현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교회 분포는 평양특별시에 30개소를 비롯해 남포직할시 30개소, 개성직할시 30개소, 평안남도에 무려 60개소가 있었으며 기타지역에 40개소가 있었다. 당시에는 양강도, 자강도 지역에는 가정교회가 없었으나 2016년 현재는 몇 군데 세워져 있다.
가정예배소는 신자들이 대략 10~12명 단위로 모이며 매우 가족적이고 단합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북에는 2016년 현재 전국적으로 520개소의 가정예배소가 확실히 존재한다.
북에는 기독교가 없다며 단정 짓는 사람들은 도대체 북으로부터 어떤 종교 활동의 모습을 목격해야 속 시원하게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것인가? 아마 그들의 생각 속에는 종교적 가치보다 정치적 가치가 앞서기 때문에 북에는 종교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남한과 서방세계의 비판세력들은 6.25전쟁 직후에는 북 사회를 종교의 무덤이라고 비판했다가 실제 종교인들이 모임을 갖고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되자 이번엔 십자가가 걸린 교회당이 없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 후 북측이 교회당을 건축하자 이번엔 형식적인 가짜 교회라며 매도하고 비판해왔다.
철저한 사회주의 국가인 북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는 달리 사회주의를 더욱 강화하게 만든 주체사상으로 재무장된 사회이다.
육체를 지닌 개인의 한 생애는 죽음으로서 끝이 나지만 그가 속했던 사회와 집단은 영원히 존재하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즉 생전에 이웃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며 자기 목숨까지도 민중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삶을 살았을 때 그 사람은 연원한 사회적 생명체와 함께 영생하게 된다는 원리이다.
대동강구역에 있는 옥류동 가정예배처소를 방문하면 강세영 장로라는 칠십 중반이 넘은 여성 장로가 교회 책임자로서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를 전한다. 1940년 평양 서성교회 담임을 맡은 강병석 목사의 딸이라고 한다.
해방 직후 자신의 부친 강병석 목사가 남에서 북파한 정치공작대가 던지 수류탄에 의해 살해된 뼈아픈 기억을 술회하는 대목.
기독교에 대한 대다수 북 인민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기독교는 곧 미국, 미국은 곧 기독교라는 공식이 성립되며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해졌다는 것이다.
북 당국은 아직 이성판단력과 자아성 정립이 안 된 청소년들에게는 종교교육을 시킬 수 없도록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기 때문에 주일학교나 교회학교가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청년들을 교회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북은 신앙의 자유는 있으나 만 18세 미만 청소년들에게는 종교교육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전도의 대상자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사회이다.
8.15 해방 직후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출범하자 반민족 친일청산을 위한 일제 잔재 소탕은 물론 친미 제국주의자들과 봉건적 지주, 소작제 폐지 등의 토지 개혁 등을 강력히 주도해나갔으며 2년이 지난 1947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출범했다. 이때 당시 북측의 친미 친일성향의 기독교 세력은 기독교 정당을 만들어 대항했고, 선거를 조직적, 공개적으로 보이콧하며 인민정권과 격돌했다.
이때 기독교 목회자들과 신자들 중에 일제에 부역했던 세력과 친미 세력들은 반제 반봉건에 동참하는 중산층 이상의 지주계급들을 등에 업고 공개적으로 정부와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북 체제에서 생존과 적응이 불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 목회자들이라고해도 지주계층, 부일, 친미세력이 아닌 목사들과 신자들은 자연스레 북 체제 내에 존속했다.
그리고 곧바로 6.25전쟁이 발발했는데 전쟁의 피해는 매우 심각해 북측지역에만 1,000여개 이상의 교회당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나머지도 반파되거나 부분적인 훼손을 입은 교회당이 대부분이었다.
일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13년 북측지역에 732개의 교회가 존재했으며 20년 후인 1942년에는 2,339개로 약 3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온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해방 전 이북에만 3,035개의 교회가 존재한 것으로 보고됐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필자는 평일인 2014년 4월 23일 ~~~ 평양 조그련 연맹 영접실에서 강명철 위원장과 독대하며 공개적인 환담 자리를 가졌다.
조그련의 신임 위원장에 선출된 강명철 목사의 할아버지인 강량욱목사(김일성 주석의 외종조부이자 창덕소학교 시절 담임선생)역시 조그련을 설립하고 오랫동안 위원장을 지냈고~~~
해방 후 남측의 정치공작대와 백의사가 조직한 암살 테러범들에 의해 강량욱 목사의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다섯 명의 부장 암살단원들은 1946년 3월 13일 한밤중을 기해 강 목사와 가족들이 기거하는 평양 기림리 고정교회 사택을 권총과 수류탄으로 기습 공격했다. ~~~무차별 난사에 강량욱 목사의 큰아들 강영해는 머리에 관통상을 입어 현장에서 즉사하고, 딸도 어깨에서 가슴으로 뚫고 나온 총알에 의해 현장에서 죽었다. 강량욱 목사는 얼굴 양쪽과 팔에 총알이 스쳐간 경상을 입었으며 부인 송석정 사모는 머리를 다쳤다.
사건 당시 형님과 누님의 비극적 죽음을 목격하며 악몽 같은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바로 강영섭(당시 열 네 살) 목사이다. 그 후 목사가 되어 평생 북측 기독교를 이끌었으며 그의 장남이 바로 오늘 만난 강명철 목사이다.
현재 조그련의 강명철 위원장을 비롯해 천주교, 불교 등 여러 wdhryrlrn의 책임자나 대표자들은 대부분 당과 내각의 영향력 있는 간부 출신들 중에서 선출되거나 겸임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 교회의 관점에서 기대하는 북과의 비정치적인 종교 교류는 기대하기 어려우며 자본주의 체제의 교회에서 바라보는 순수한 종교적 교류 혹은 종교교류의 비정치화는 불가능하다.
조직부는 북의 520개소에 달하는 가정교회와 처소교회를 비롯해 봉수, 칠골교회 등을 직접 관리하거나 교역자들의 인사 이동 문제를 취급하는 부서라고 보면 된다.
매월 설교 제목과 방향 등을 제시하거나 새신자 관리, 해외나 외부인사들이 가정교회나 봉수, 칠골교회 등을 방문할 때 준비를 하는 곳이다.
초대 위원장에 원래 김익두 목사가 취임했으나 훗날 6.25 전쟁 직전의 이중 적인 배신행위로 연혁에서 제외되었다.
김익두 위원장은 전쟁 중 좌우 대립이 치열했던 상황에서 인민군의 총격으로 숨진 후 강량욱 목사가 그 뒤를 승계했다.
[평양신학원]
신학원 건물은 지하1층, 지상 3층으로, 2003년 9월에 완공됐다. ~~~재학생이 12명에 불과하다.
평양신학원은 2003년 9월, 남측의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통합) 북한선교위원회 측과 기독교대한감리회 서부연회측의 지원으로 현재 위치에 6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연건축면적 340.5 평으로 건축했다. ~~~기감측은 신학원 운영을 위해 매학기 10만 달러를 지원하기 시작했으나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로 인해 지원과 교류는 전격 중단됐다.
북에서 목사가 되려면 공식적으로 조그련 연맹 본부에서 직영하는 평양신학원을 필수적으로 졸업해야 한다.
조그련 측에 따르면 북 전체 기독교 신자는 15,000여명을 웃돌고 있으며 가정교회가 520여개이다.
1972년 3월에 3년제로 개원한 평양신학원은 1992년까지 20년 동안 제 7기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그 후 고난의 행군 등의 어려운 사정 등으로 잠시 학사운영이 소강상태에 빠졌다. ~~~2000년 9월부터 3년제에서 5년제로 개편하여 다시 재 개원했다. ~~~지금까지 재학생 수는 12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
[Review]
“윈스턴은 바로 발아래 바위틈에 있는 좁쌀 풀 꽃 몇 송이를 보게 되었다. 분명히 같은 뿌리에서 자란 한 포기인데 자홍색과 벽돌색 두 가지 빛깔의 꽃이 피어 있었다. 그는 이런 꽃을 여태껏 한 번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불러서 보라고 했다. 저기 봐, 캐서린! 저 꽃들 좀 봐! 저기 바닥 가까이에 있는 꽃떨기 말이야. 두 가지 빛깔로 핀 걸 봐.”
조지오웰의 소설<1984>에 나오는 대목이다. 인간의 생각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가지를 모두 수용 할 수 있다는 소위 말하는 더블 싱크(double think)를 은유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조지 오웰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사회에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 꾸며진 말 거짓 정보도 진실처럼 따를 수 있고, 또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항거와 자유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북녘의 교회를 가다> 책을 읽으면서 조지오웰의 소설이 생각난 것은 북한의 현실이 소설의 내용과 흡사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자인 최재영 목사는 미국 시민권자로 최근까지 북한을 왕래하며 활동하고 있다. 2018년에는 우리나라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 책에는 지금까지 국내외적으로 북한 선교를 통해서 남한 기독교 단체 또는 기업인들이 북한에 세운 교회와 기관들의 운영 실태와, 더 나아가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한에서 기독교 가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많은 부분에서 북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내용으로 쓴 책이기 때문에 편향적이다. 그런 이유로 탈북자 선교단체에서 거짓된 실상이라고 항의하는 기사도 보았다. 북한이 주장하는 기독교 반대가 전쟁 당시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북한의 교회를 무차별 파괴했기 때문이라는 그들 선전을 여과 없이 실었고, 김일성 과 그 부친 김형직 모친 강반석이 항일 투쟁과 모두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을 미화한 측면도 있다.
철저하게 통제된 기독교 활동을 북한식 민족기독교로 정당화하며, 마치 종교의 자유처럼 표현한 것은 오늘날 북한의 선전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독교 단체의 공분을 사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북한을 왕래하며 수고한 내용들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북한의 기독교 실정을 이해하는데 유익하다고 본다.
북한에는 기독교를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단체인 조그련(조선 그리스도교 연맹)과 신학원도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조그련에 파견된 책임자나 대표자들은 당 과 내각의 영향력 있는 간부 출신들 중에서 선출되거나 겸임하고 있어서 외부와의 순수한 종교적 교류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조그련은 북한 전역에 있는 520개소에 달하는 가정교회와 봉수, 칠골교회 등 북한 전역의 교회를 직접 관리하는 기관이라고 한다. 또 교역자들의 인사이동 문제와 매월 설교 제목과 방향 등을 제시하거나 새 신자 관리, 해외나 외부 인사들이 방문할 때 준비도 담당한다고 한다. 현재 5년제인 평양 신학원은 북한에서 목사를 배출하는 유일한 기관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재학생은 열두 명으로 제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북한의 기독교인 수는 가정교회를 포함하여 약 15,000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하지만, 사상교육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18세 이하는 기독교가 금지되고 모든 운영이 철저하게 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그동안 탈북 동포들의 증언에 의해 알려진 수 만 명에 달한다는 북한의 비공식 가정교회(지하교회)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철저히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다고 본다.
북한에는 현재 [평양 봉수교회], [평양 제1 교회], [평양 칠골교회], [량강도 포평교회], [황해도 은률읍교회], [개성 신원교회], [금강산교회], [함경남도 신포교회], [평양과학기술대학교 교회], [평양 형제산 교회], [평양 제3 인민병원 교회], [평양 조용기 심장 전문 병원교회], [평양국제외국인교회]가 있으나 현재까지 제대로 주일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2008년 남측의 지원으로 1000여 개의 좌석을 갖춘 ‘평양 봉수교회’(300명 정도)와 특수층의 소수 모임인 ‘평양국제외국인교회’와 ‘평양과학기술대학교‘ 뿐이며 나머지는 방치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남북통일은 남북한이 모두 원하는 일이지만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관계를 풀 수 있는 해법은 지금 당장으로서는 없는 것 같다. 남북 간에 인간적으로 소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북한 동포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지난 70여 년 동안 개인의 자유가 통제되는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그들의 생각 속에 진리처럼 박혀 버린 김일성 우상과 왜곡 날조된 전쟁 후유증을 치료하기에는 인내가 필요하기에 복음의 불씨는 끄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억압과 통제 속에서도 인간의 마음에는 조지 오웰이 말하는 작은 불씨 “자유를 향한 항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1~3)■
<본문>
“내가 북녘의 교회공동체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주체 문화가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토착화되었으며, 기독교의 정체성은 주체 문화와 공존하며 민족종교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기독교라는 거대하고도 세계적인 종교를 자신들만의 고유한 민족종교로 정착시킨 국가는 지구상에 이북 사회뿐인 것 같다.”
“내부적으로 부패한 한국교회가 철저한 자기 개혁 없이 선교의 허영에 들떠 맹목적으로 북한 선교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 청정지역인 이북 사회를 오염시키는 일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남한 식 기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동안 북측 교회와의 진지한 대화와 교류를 무시하고 단지 식량과 물품지원을 받는 구호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오만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
“어느 해외교포가 얼마 전에 방북해서 북측 대학원의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일정이 있었다. 대화중에 지하교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질문했더니 청년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장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자기들 손으로 직접 처단하겠다고 불같이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2015년 1월 31일에는 캐나다 시민권자로서 전문적인 대북 사역 활동을 하던 임현수 목사가 라선시에서 평양으로 이동한 후 억류되어 그해 12월 16일 북 최고 재판소에서 극가전복음모 등의 혐의로 종신노동교화형을 선고 받고 현재 복역 중에 있다.(2017년 석방)”
“미주북한선교회 소속 선교사인 김동철 목사가 2015년 10월 2일 라선시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됐는데 그는 이듬해인 2016년 4월 29일 열린 재판에서 국가 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10년 노동 교화형을 선고 받고 현재 복역중이다(2018년 석방). 또한 현재 북에는 남한에서 북으로 건너가 억류된 목회자와 선교사들도 여러 명이 있다. 2013년 10월 기독교 한국침례회 소속 김정욱 선교사가 체포돼 간첩 혐의로 무기노동교화형을 선고 받아 현재 복역 중에 있으며 대한 예수교장로회 합동중앙총회 소속 김국기 목사와 최춘길도 체포되어 2015년 6월 23일 무기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에 있다.”
“북측 인민들의 입장과 정서를 배려하지 않고 제국주의적 선교나 근본주의 기독교 관점에서의 일방적 선교 개념으로 무조건 교회당만 지으려 한다면 이는 매우 무모한 일이며 실패한 사역에 불과하다. 설령 교회당이 원하는 대로 건축되었다 한들 건축 이후의 철저한 사후 대책과 대안이 없다면 차라리 건축을 시도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이미 남한의 예장 통합측이 주도해서 동평양 지역 대동강변에 건축한 평양제1교회당(제1기도처)은 수억을 투입해 준공했으나 사후 운영 대책이 전혀 없어 결국 건물 일부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텅 비어 있는 공간으로 방치되어 있고 나머지 건물은 거대한 온실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알아야 한다.”
“북에는 2016년 현재 전국적으로 520개소의 가정예배소가 확실히 존재한다. 신자들이 대략 10~12명 단위로 모이며 매우 가족적이고 단합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라선시에서 선교와 전도 혹은 포교 활동의 목적으로 성경책이나 종교 경전 혹은 전도용 책자나 전단지,CD/DVD등을 배포하는 행위는 매우 무모하고 위험한 행동이다.”
“북 당국은 만 18세 미만 청소년들에게는 종교교육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주일학교나 교회학교가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청년들을 교회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일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13년 북측지역에 732개의 교회가 존재했으며 20년 후인 1942년에는 2,339개로 약 3배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어떤 연구에서는 해방 전 이북에만 3,035개의 교회가 존재한 것으로 보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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