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가 있는 우리나라는 한발 한발 내딛는 작은 땅 한조각에도 수많은 인간사가 얽혀있다. 이것을 인문지리(人文地理)라 부른다. 사람과 땅, 문화가 만들어내는 인문학이다. 인문지리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여행은 역사가 되고 역사는 여행이 된다. 나에게는 오랜 역사가 남아있는 지역의 여행은 늘 가슴뛰는 설레임의 순간이다. 이곳에서 난 과연 어떤 재밌는 이야기를 듣게 될까.
비대면 여행지가 뜨고 있는 요즘, 힐링 여행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곳 중 하나가 전라남도 강진이다.
땅끝마을 해남, 보물섬 남해 등 한반도 남반구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있는 곳이다.
덜 알려져있다는 건 교통, 시설 인프라가 그만큼 적은 첩첩산중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 강진은 오히려 유배지로는 더 잘 알려진 곳이다.
강진에는 인적드문 소박한 장소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백운동 정원이다.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 부용동 정원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불린다. 얼마나 풍경이 멋있었던지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기간 중 1812년 불과 하룻동안 백운동 정원에 머물었는데도, 아름다운 풍경을 잊지 못해 '백운동 12경'을 명명하고 초의선사에게 이곳의 그림까지 부탁했다고 한다.
백운동 정원으로 향하는길, 이곳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남아있을까.
백운동 정원의 보다 명확한 명칭은 백운동 별서 정원이다. 별서란 본집에서 멀지 않은 경치 좋은 곳에 은거를 위해 조성된 집을 말한다. 즉, 조선시대 문인들의 은거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소다.
백운동 정원은 월출산 백운곡 동쪽 산자락에 위치해있다. 주변은 녹차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있다. 강진은 보성과 더불어 질좋은 차가 생산되는 유명한 차재배지다. 다산은 강진 유배생활 동안 이곳의 차맛에 반해 매일 차를 마셨을 정도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이 매일 차를 마셨다는 다조라는 공간도 남아 있다.
다산초당에서 차를 마시던 장소인 다조
다시 백운동 정원으로 돌아가보면, 이곳은 처음에 조선 숙종때 이담로라는 인물이 조성한 곳이다.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이름이다. 그의 둘째 손자 이언길이 할아버지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12대로 이어지는 유서깊은 장소가 됐다.
네비게이션에 백운동 정원을 입력하고 차를 몰았다. 왕복 2차선의 완만한 산길, 끝모를듯 펼쳐져있는 푸릇푸릇한 차밭 풍경에 눈과 가슴이 시원해진다. 흔히들 해안도로를 드라이브의 최고 코스로 꼽는데, 차밭길도 그에 못지 않을듯하다.
어느새 네비게이션에서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는 안내멘트가 나왔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전혀 정원스러워 보이는 곳이 없었다. 교통정보가 잘못된건가, 다시 한번 입력했는데도 네비게이션은 여전히 이곳을 가르키고 있었다.
일단 차에서 내려 걸어가 보기로 했다. 역시 비밀의 정원이라는 별명 답게 녹차밭 속에 꽁꽁 숨어있는 모양이었다.
조금만 걷다보면 나오겠지. 하지만 녹차밭 사이길을 한참을 걸어도 여전히 정원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지쳐갈 즈음, 저 멀리 대나무숲길이 보였다. 저곳이구나!
강진의 차는 아주 향기롭기로 유명하다. 백운동 정원 주변에 있는 설록다원
어릴 때 소풍가면 늘 보물찾기가 소풍의 대미를 장식하곤 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최대한 찾기 어렵게 보물을 숨겨놨다. 결국 보물을 찾고 보면 별곳 아닌 장소인데, 찾는 과정은 늘 어려웠다.
백운동 별서 정원이 그런 느낌이었다. 찾고 보니 이렇게 쉬운데, 왜 계속 보이지가 않았는지.
앞서도 말했듯이 다산은 강진 유배생활 중 월출산 등반을 하고 이곳에 들렀다.
다산은 이곳 풍경에 큰 감동을 받아서 초의선사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 백운동이 그리울 때마다 화첩을 보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백운동의 12개 포토스팟인 셈이다.
백운동 정원 입구에서부터 동백나무 숲길이 펼쳐진다. 내가 갔을 때는 동백꽃은 피지 않았지만, 동백꽃이 피었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이 동백나무 꽃길이 백운동 2경으로 꼽힌 산다경이다. 동백나무가 숲으로 이루어진 작은 길을 말한다.
그럼 언제 1경이 지나갔지? 다시 안내문을 보니 1경은 옥판봉이다. 옥판봉은 월출산 구정봉의 서남쪽 봉우리의 이름인데, 별서정원 정자에 앉으면 보다 잘 보일 수 있다.
산다경을 지나니 작은 폭포가 나온다. 바로 4경으로 꼽히는 홍옥폭이다. 흐르는 물이 루비같이 보인다는 의미다. 홍옥폭 옆에는 6경인 창하벽이라는 암벽이 있다. 암벽의 이끼가 계곡의 물기와 안개를 늘 머금어 깊은 푸르름을 띠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드디어 별서 내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산비탈이라 경사면을 따라 조성되어 있어 건물 높이가 각기 달라 오히려 보는 재미가 있다. 본채에는 '백운유거'라는 근사한 이름이 붙어있다. 외지고 조용한 곳에 있는 집이란 뜻이다. 이담로의 6세손인 이시헌은 '자이당', 즉 저절로 즐거움을 맛보는 집으로 고쳤다. 옛 선비들의 정취란 이렇게 깊고 자유로웠구나.
앞뜰에는 경주의 포석정이 연상되는 도랑이 만들어져있다. 전문용어로 유상곡수, 술잔을 띄울 수 있는 굽은 물길이다. 여기가 백운동 5경이다. 민간 정원으로 유상곡수 자취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곳은 전국에서 백운동이 유일하다. 좋은 벗과 술한잔 하고 싶어지는 풍경이다. 여기서 먹다보면 밤새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듯하다.
작은 언덕위에 정자가 있는 데 이곳이 11경, 정선대다. 신선이 머무는 돈대라는 뜻이다. 특히 여기서 보는 옥판봉이 장관인데, 옥판봉은 바로 백운동의 첫번째 볼거리인 1경이다.
입구의 동백나무길(산다경)
백운동정원의 유상곡수
정선대에서 바라보는 백운동 정원
백운동 정취에 흠뻑 빠져 담장 밖을 나가니 또 다시 볼거리가 있다. 바로 백운동의 마지막 12경인 대나무숲 정원 '운당원'이다. 초의선사도 이곳을 특별히 신경써서 그렸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강진에서 유명한 백운옥판차는 이 대나무숲에서 자생하는 차나무에서 자생하는 차다.
백운동 정원에 온김에 백운옥판차를 마셔보고 싶어 백운옥판차 찻집으로 향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이후 남양주로 돌아가면서 제자들과 '다신계'를 맺는다. 다산에게 해마다 차를 만들어 1년간 공부한 글과 함께 보내기로 한 약속이다. 다산의 가장 어린 제자였던 이시헌은 이 약속을 평생 지켰다. 100여년이 지나갈 무렵, 이 약속을 계속 지켜온 사람은 이한영이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차를 만들어 '다산가'에 보내오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차가 일본의 차로 둔갑되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우리 고유의 차인 '백운옥판차'를 만들게 됐다.
평소 커피를 좋아하지만, 강진에서만큼은 향긋한 차 한잔을 마셔야겠다 싶었는데 아쉽게도 찻집은 그날 하루 문을 닫은 듯했다. 아쉽긴 했지만, 백운동 정원의 깊고 아름다은 정취를 느꼈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답사였다.
백운옥판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