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적, 그리고 포스트콜로니알 성서연구
어제 가나안 교회 특강에서 정미혜 박사(Claremont School of Theology)는 이 방법론으로 그다랴의 설교(렘 40:7-12)를 해석했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어떻게 이해, 수용할 수 있을까, 라는 후속 질문과 함께.
바빌론 포로기 전후에 전개되는 치열한 국제 정세, 바빌론과 이집트, 앗시리아의 거대한 제국의 틈새에 끼어있는 유다 왕국, 풍전등화다. 말하자면 유다 국내에는 친바빌론파가 있는가 하면 친이집트파, 친 앗시리아파가 있고, 국제적으로는 유다를 먹는 자가 수위를 차지하는 치열한 정글의 전쟁게임, 그 안에서 쪼그만 유다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예언자 예레미아의 고뇌는 무엇인가? 그다랴는 "보라 나는 미스바에 살면서 우리에게로 오는 갈대아 사람 앞에 서리니..."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서라! 서라! 담대히 서라!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잠시 잠적한다.
학생 시절 읽은 서인석 교수(서강대), 『구약성서연구』인가에서 “예레미야의 고통-한 예언자의 고백론”이란 제목의 글이 나에게는 예레미야에 대한 원형으로 남아 있다. 예레미야서에 실린 예레미야 자신의 5개의 고백록, 서인석 교수의 해석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넘쳤다. 예레미야의 인간학의 핵심! 그후 일본 신학자 기타모리 가조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 예레미야 31:20의 “내 창자가 들끓으니”,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가지신 하나님, 신론의 핵심!
미국 신학대학에서는 구약신학이 사라졌다 한다. 그러니까 성서는 신학의 자료라기보다는 인문고전이고 여러 비평적 방법론, 사회사적, 인류학적, 포스트콜로니알, 수사학적, 문학적... 비평으로 읽는 인류 고전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미국 신학대학과 연구기관에서는 아시안 여성학자에게 이상의 방법을 권장한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정치적 상황까지 고려한.... 독일신학이 발견했던 방법론은 이제 고전이다. 박물관에 진열될지도 모르겠다. 게네들은 최후에는 신학으로 회귀한다.
컨텍스트 없는 텍스트는 공허하고 텍스트 없는 컨텍스트는 맹목이란 말을 되뇌인 적이 있는데, 사실상 실체와 같은 텍스트는 없다. 그러니 루터의 ‘성서로 돌아가자’는 말은 사실 빈말, 맹목적인 구호가 되기 십상이다. 텍스트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컨텍스트의 상호작용, 교호적 갈등을 통해서 그때마다 탄생되는 유의미한 사건이다.
현대의 다양한 연구 방법을 통한 성서연구가 교회 밖에서 인문학의 고전으로 알려졌으면 좋겠다.
어차피 당분간 교회 안에서 수용되기는 어려울 테니까......
심광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