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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로 그린 그림
- 송재학 재즈시 감상기
성기완(시인, 뮤지션, 밴드 트레봉봉 리더)
1. 희미하다
송재학의 신작 재즈시(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열 편을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받아보았다. 단숨에 읽었다. 다 읽는데 시간이 얼마 들지 않았다. 노랫말로 엮어진 짧은 이별 이야기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뭘 봤드라? 뭔가 감흥이 희미하다. 열 번 째 시의 제목이기도 한, 마일스 데이비스 Miles Davis 의 마스터 피스인 「연두 안의 푸른 빛(블루 인 그린 Blue in Green)」처럼, 배경과 대상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고, 그 경계도 어슴푸레하다.
이런 시들을 ‘지우개 시’라고 부르고 싶다. 시적인 대상들을 빨간 사과처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뚜렷함을 지워나가는 지우개 같은 시들. 때로 시인은 지우개를 들고 시를 쓴다. 이런 시는 쓰는 동안 지워진다. 그렇다면 백지상태가 그 결과인가? 그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지우개를 들고 시를 써서 남겨진 언어들이 있다. 이제니 시인은 어느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에서 ‘지우개 가루가 검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이제니,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 이 지우개 가루는 언어적으로 존재함으로써 더욱 의미를 뿌옇게 만든다. 아무 것도 없는 백지상태보다 더 효과적으로 뜻이 지워진다. 19세기 말에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 Mallarmé 가 했던 일이 그것이다. 이런 언어가 펼쳐지는 공간은
그림자가 그림자를 포옹하는 곳
(「푸른 별」)
이다. 이 흐릿한 존재들의 포옹은 무엇을 뜻할까? 속도감 있는 연주로 슥, 내 정신을 스쳐지나간 가벼운 즉흥연주 같은 이 ‘희미함’의 정체는 뭘까?
2. 내 젊은 날의 재즈
한 때 나는 재즈적인, 재즈에 관한, 재즈에서 영감받은 글쓰기와 시쓰기에 열을 올렸었다. 혹시라도 궁금한 분들은 나의 첫 시집 『쇼핑갔다 오십니까?』(문학과지성사, 1998)에 실린 「月印千江
- 주제와 애들립」이라는 시를 한 번 보기 바란다. 이 시는 작정하고 즉흥연주하듯 쓴 시다. 또 나는 아주 예전에, 그러니까 26년 전에 『재즈를 찾아서』라는 얇은 재즈 입문서를 낸 적도 있다(문학과지성사, 1996,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 게다가 2005년에는 무대에서 즉흥적인 글쓰기를 한 적도 있다(윤사비, 김영은, 성기완, 『수도권 사랑 풍경』, 퍼포먼스, 일민미술관, 2005).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 Miles Davis의 자서전을 번역하기도 했다(『마일스』, 퀸시 트라우프 Quincy Troupe 지음, 성기완 옮김). 욕설이 난무하는 이 자서전은 그 자체로 재즈였다. 마침 옛날 판본이 명을 다한 이 책을 새로 내기 위해 다시 번역하고 있던 참이다.
한 마디로 재즈는 내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중고생 때, 다른 모든 것은 늦깎이였으나 음악 만은 조숙했던 나는 친구들과 함께 록 음악과 영미 팝에 열광하면서도 재즈를 파고 들었다. 고 2 때는 강태환의 프리 재즈 공연을 보러 공간사랑에 가기도 했다. 아마 그 청중에서 내가 제일 어린 축이었으리라. 강태환, 김대환, 최선배의 트리오가 순간을 빚어 끊어내는 즉흥연주의 가래떡은 너무나 맛났다. 1980년대 중반, 20대가 되어서도 나의 재즈 사랑은 지속되었다. 당시는 학생운동의 시대였으나 내게 재즈의 즉흥연주는 가슴에 품은 또다른 자유와 평등의 깃발이었다. 그 깃발은 정치적인 것 저 너머에서, 동시에 나의 귓전에서 문자그대로 나-부-꼈-다. 내 젊은 날에 재즈의 자유로움은 역설적으로 나를 옭아맸다. 나는 거기 속박당한 프로메테우스였다. 내 영혼의 간은 재즈에 쪼아먹혔다. 시와 음악은 그 감옥에서 하나였다. 나는 출구없는 자유를 향해 스스로 사슬을 만들어 내 심장에 칭칭 감았다. 그 감옥 안에서 나는 후련했다.
3. 즉흥연주
그리고 1990년대가 되었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1990년대 초반이 떠올랐다. 우연한 기회에 월간 『객석』에 재즈기사를 연재했고 그 이후 원고청탁이 밀려왔다. 나는 그렇게 ‘음악평론가’가 되었다. 당시 나는 거의 1주일에 하나 씩 재즈에 관한 원고를 썼다. 한국에서 뒤늦게 재즈 바람이 불던 그 때, 봉인이 풀린 자유의 단맛을 알게 모르게 만끽하던 우리들, 한대수가 1970년대에 처절하게 노래한 ‘자유의 바람’의 지연된 현시 같았던 그 때, 이상하게 홍수처럼 밀려왔던 재즈의 존재감. 갑자기 역사적인 재즈 음반들이 라이센스로 재발매되고 신촌 ‘야누스’와 이태원 ‘올댓재즈' 뿐이었던 재즈 클럽이 우후죽순처럼 늘더니 급기야 팔리아먼트 같은 양담배 회사들의 주선으로 전설로만 듣던 뮤지션들이 한국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20대 중반이었던 다는 여기 저기 현장을 누비며 즉흥연주하듯 재즈에 관한 글을 휘갈겨 써제꼈다.
나는 송재학의 시들과 함께, 30년의 시간을 돌려 어떤 재즈 클럽으로 들어간다. 열기가 후끈한 재즈 클럽의 문을 열어 젖히고 들어갔는데 예정에 없던 어느 대목에서 즉흥연주를 한 순배 돌리라는 청을 받고 무대에 올려진다. 이미 연주가 무르익은 밤, 조금은 뻣뻣한 손가락을 풀며 송재학 재즈시들의 즉흥연주에 나의 즉흥연주로 화답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첫 시부터 한참 무르익었다.
별빛이 중얼거리기 전에
별빛에 닿기 전에
너무 많은 밤낮이기 전에
(송재학, 「스타더스트」)
첫 시가 첫 시가 아니다. 첫 시가 벌써 중턱이다. 첫 시가 첫 시가 아닌 것은 이 시가 재즈시라서 그렇다. 이미 연주는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언제? 아마도 인류의 탄생과 함께, 서아프리카 말리의 초원에서. 재즈는 시작도 끝도 없다. 「스타더스트 Stardust」, 아스라한 노래. 먼 과거를 추억하는 노래. 직역하면 별들의 먼지, 별가루, 작은 별똥별들. 산란하는 오늘의 빛은 어제의 것, 지금 별들은 별빛이 중얼거리기 전에, 다시 말해 별들이 지금 노래하기 전에, 시각적으로 ‘지금 반짝이기 전에’ 이미 끝나버린 사랑의 잔상들. 「스타더스트」 원곡 가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이 대목이다.
You wander down the lane and far away
Leaving me a song that will not die
Love is now the stardust of yesterday
당신은 별길 따라 멀리 사라지며
불멸의 노래를 남겼네
지금의 사랑은 어제의 별가루
(「스타더스트」원곡 중에서)
도리스 데이 Doris Day 도 불렀고 냇 킹 콜 Nat King Cole 이 불러서 더 유명해진 스탠다드 넘버인 이 노래는 흥미롭게도 ‘노래’ 자체가 노래의 소재다. 노래는 어제의 연속이기 때문에 영원하다. 어제는 끝났어도 노래는 어제의 현재형을, 빛나던 사랑을 ‘지금 나의’ 귓가에 쟁쟁하게 뿌려준다. 노래는 그렇게 영원한 현재형이다. 별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별빛은 몇 천 년 전에 쏘아진 빛의 화살이 ‘지금’ 내 눈에 닿은 것일 뿐이다. 그 반짝이은 지나간 것의 맥박이다. 맥박은 장단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되는 라이드 심벌의 박자, 한 마디를 네 개의 박으로 분할하여 이른바 ‘four play’로 불리는 재즈 고유의 워킹 베이스 비트,
스타더스트는 맥박
피 흘리는 유성이
내 손금을 새기고 지나갔다네
나라는 먼지를 기억하면서
(「스타더스트」)
별빛은 과거에 정해진 어떤 운명이 시간의 바다를 여행한 흔적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그 빛의 반짝임은 역설적으로 고정된 운명에 저항한다. 그와 비슷하게 재즈는 본질적으로 작곡이라는 개념에 저항한다. 모든 음표와 코드는 잠재적인 개념일 뿐이다. 재즈는 연주하는 순간에만 현존한다. 그리고 별가루처럼 사라진다. 차라리 그 사라짐이 재즈다. 공연이 끝나 관객이 집에 가고 클럽이 문을 닫으면 뮤지션들끼리 모여서 ‘애프터 아우어 After Hour’ 잼 세션이 시작된다. ‘싯-인 Sit-in’이라 불리는 이 세션에서 비로소 진짜가 나온다. 비밥 Bebop이 탄생하고 쿨 Cool이 실험된다. 그게 끝나면 아침이다. 해가 뜨면 잠시 눈을 붙일 뿐, 재즈는 잠의 리듬 속에서도 계속된다. 창문으로 스미는 빛 속에서 춤추는 먼지와 같다(‘일출의 지도’에 대한 기억 - ‘푸른 별’). 재즈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소리의 은하수를 타고 흐르는 별들의 얼룩이다. 우리는 그 얼룩을 ‘즉흥연주’라고 부른다. 시인이 <무경계> ( 켄 웰버 지음, 김철수 옮김, 정신세계사 2012)에서 인용한대로,
스쳐가는 현재가 영원한 현재
(「굿바이 용문객잔」)
4. 그 때는 핫했고 지금은 쿨하다
재즈는 영원히 지속되는 ‘스쳐가는 현재’다. 그 현재의 비트는 뜨거운 요소와 차가운 요소의 결합을 엔진삼아 작동한다. 핫 hot한 재즈가 있고 쿨 cool한 재즈가 있다. 재즈사는 핫과 쿨의 교차라고 일컬어진다. 2차 대전 직후의 재즈는 뜨거웠다. 반면 한국전쟁 이후에는 쿨해진다. 그러다가 1960년대가 되어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다시 뜨거워졌다. 지금의 구호가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Black Lives Matter’라면 당시에는 ‘검은 것은 아름답다 Black is Beautiful’이었다. 그 때가 가장 뜨거웠다. 프리 재즈의 화산폭발이 있은 후 재즈는 점차 식어갔다. 이제 재즈는 휴화산이 된 느낌이다. 그 휴화산 마저 “지평선과 만년설을 거쳐”(「굿바이 용문객잔」) 모래바람 속에 묻혀가는 중이다. 인류는 21세기 들어 “사막을 저지”(「굿바이 용문객잔」)른 것 같다.
모래가 몰려드는 물결
죄의식도 없고 새도 없지만
누군가 여기 조금씩 살았다네
바람의 손가락이 모래를 움켜 잡으면서
하루는 흘러내리지만
(「굿바이 용문객잔」)
21세기에 지구는 뜨거워지고 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다. 이대로 가면 파멸이다. 그래서 식히고자 한다. 21세기 전반기는 쿨이 지배하고 있다. 뜨거움은 비난받는다. 과도한 열정이 드러난 작업은 청중의 냉소 앞에서 차가워진다. 송재학의 재즈시들도 쿨한 쪽에 가깝다. 시인은 시를 통해 열정을 과시하거나 드러내기 보다는 외려 그것들을 숨긴다. 이 점이 재미나다. 시는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도구다. 다시 말하면, ‘지우개 시’다. 나도 시인이라 잘 알지만, 시는 의외로 뭔가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시는 비밀금고 비슷한 것이다. 시인은 때로 시어를 낚는 어부가 되기도 하지만 시어의 파도 안에 마음의 물고기들을 방생시켜 망망대해로 사라져버리도록 한다. 그 때 열정은 ‘거의 모두’ 사라진다. 쿨해진다.
거의 모두 …… 지평선이라네
거의 모두 …… 입이 없는 곳
(「거의 모두」)
쿨 재즈의 아이콘 챗 베이커 Chat Baker의 노래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물빛을 띤다. 그의 대표적인 넘버인 「Almost Blue」에서 인용된 이 시의 제목은 '거의 모두’. 문장이 완성되어 있지 않고 긴 여운의 골짜기를 만들어내는 말없음표에 의해 지워져 있다. 나는 15년 전인 2008년에 서아프리카 말리를 홀로 여행했다. 말리는 블루스의 고향이니까 재즈의 고향이다. 거리의 사람들이 마일스 데이비스를 닮아 놀랬던 기억이 있다. 만딩고 사람들이었다. 음악을 연구하러 갔던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그들의 리듬감은 세계 최고였다. 말리에서 북쪽으로 12시간 버스를 타고 가니 니제르 강이 나왔다. 이 드넓은 강가에서 노숙을 했다. 강을 건너면 사하라 사막이었다. 송재학의 시처럼, 문자그대로 ‘거의 모두’ 지평선이었다. 360도 전체가 지평선인 평평한 공간을 체험했다. 언덕 하나 없이 온통 평평한 거기서는 최소한 천동설이 옳았다. 하늘과 맞닿은 저 땅의 경계는 어른거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 속으로 ‘땅의 바다’라고 중얼거렸다. 그 때 ’입’은 없어졌다. 모든 것이 지워지는 극한의 넓이 앞에서 언어는 힘을 잃고 만다. ‘거의 모두’라는 말은 바로 그 때, 일종의 고백처럼 툭, 성대를 거치지 않고 식도에서 바로 역류한다. ‘거의 모두’가 품고 있는 깊은 의미는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
‘거의 모두’를 읽은 후, 즉흥연주의 톤이 바뀐다. 이 대목에서 나는 1990년대의 후끈한 재즈 클럽에서 나와 21세기의 차가운 가상세계로 돌아온다. 21세기의 중반으로 치닫는 지금 여기에 송재학의 재즈시들이 쿨하게 놓여 있다. 1990년대의 재즈 붐이 ‘청각적 자유’를 체험하고자 하는 열정의 소산이었다면 송재학의 재즈시들은 시대적 쿨함을 음미하는 신중함과 관계있어 보인다. 그 때는 핫했고 지금은 쿨하다.
5. 연소, 기억, 사막, 전체
이 ‘쿨함’이 21세기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종’의 상황을 말해준다. ‘연소’는 모든 생명의 본질적 작용이다. 불을 지펴 태워야 생명이 유지된다. 목숨 있는 것들은 ‘남’을 태워 자신의 열을 유지한다. 그러다가 목숨이 다하면 남을 위해 태워진다. 뜨거운 열정으로 뼈와 살을 불사르고 재가 남는다. 뜨거운 문명은 필연적으로 재가 된다. 남는 것은 사막이다.
사막을 떠나가는 사막
사막으로 돌아오는 사막은
같은 신기루에서 태어났다네
(「굿바이 용문객잔」)
사막의 심연에는 뼈와 살의 흔적이 어김없이 존재한다. 화석연료다. 사막의 심연을 파헤쳐 떠나보낸다. 이 연료로 지상의 꽃잎은 화려해진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울긋불긋한 불빛은 심연에서 왔다.
꽃잎마다
지상으로 심연을 이끌고 온 색깔이 있다네
(「꽃잎마다 너라는 잔상」)
심연을 퍼내 색이 난무하는 세상을 만든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은 하늘에 가 닿으려 한다. 로켓을 쏘아올린다. 온 천지에 거대 연기를 뿜으며 불덩어리가 하늘로 향한다. 하나의 작은 발자국이 ‘위대한 발걸음(「자이언트 스텝스 Giant Steps」)’가 된다. 존 콜트레인의 연주를 ‘소리의 다발 Sheets of Sound’라고 부른다. 그의 연주는
물을 튕기면서 허공의 힘줄을 움켜잡으면서
일만 개의 뼈를 뱉어내면서
일만 개의 방언인 날치 떼
(「자이언트 스텝스」)
처럼 작열한다. 한 때 이 성스럽고 위대한 재즈 음반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이 위대한 ‘소리의 날치떼’와 대비되는 ‘영역’이 존재한다. 바로 사막이다. 돌아본다. 기억한다. 추억한다. 사막은 고요하다. 뜨거운 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로드 킬’이 있었다(「거의 모두」). 아픈 상처가 심연에 있다. 사랑은 떠나가고 오늘의 별가루로 남았다(「스타더스트」). 꽃잎은 흔들리고 그 이파리마다 ‘너라는 잔상’이 어른거린다. 연애가 끝나고 마음은 황량한 사막이 된다. 흔들리는 잔상이 브라운 운동을 한다. 담배연기다. 그 연기가 재즈의 즉흥연주다. 푸른 별은 그 연기에 휩싸인다. ‘내가 돌아가야 하는’ 푸른 별은 ‘위태롭고 지루하’다(「푸른 별」). 이 지루한 푸른 별을 떠나 사람이 달을 산책한다.
달에 닿으려는
수많은 발자국
(「달에 닿기 위하여」)
‘달빛과 함께’ ‘달의 표면’을 알아간다. 그러나 이 앎, 이 깨달음으로 달은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알면 알수록 달은 멀리 있다. 여전하다. 이 길은
왠지 모를 슬픔의 입구
(「달에 닿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슬픔의 입구에 서 있다. 화성으로의 이주는 인류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패배의 결과일 수 있다. 먼 훗날, 꽃이 질 것이다. ‘푸른 별’은 사막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제 지구 전체가 사막이 될 차례다. 거기서는 ‘기억도 희미해지’고 (「거의 모두」), 따라서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따라서
나의 어떤 부분은 고요
(「꽃잎마다 너라는 잔상」)
해진다. 지우개가 내 앞에 있다. 펜 대신.
6. 운 포코 로코 Un Poco Loco, 물로 그린 그림
지우개를 든 시인은 물감 없이 물로 그림을 그린다. 그 때 표현된 그림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영역’이 된다. 그 영역은 ‘사막’의 모습이다.
여러 개의
사막을 생각했다
며칠이 필요했다
사막은 어떻게 들키는 걸까
사막의 왼쪽 지형은
오후 한시라는
직립
(「굿바이 용문객잔」)
‘오후 한 시라는 직립’은 사막에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한낮의 태양을 암시한다. 그 이외의 대상은 지워져 있다. ’사막의 왼쪽 지형’은 여러 개의 사막의 일부다. 동시에 그 여러 개의 사막은 하나의 전체, 또는 전체적인 하나를 뜻한다.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은 구체적으로 묘사되기 보다는 ‘알지 못할 소란’(「거의 모두」)으로 요약된다. 이 사막은 ‘먼 해안’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밤의 감촉들,
어둠을 만져보았어
나의 먼 해안이 생겼어
(「어제와 비에 대한 인터뷰」)
이 먼 해안에서 만져지는 것은 ‘어둠’이다. 송재학 시인은 ‘어둠을 만져보’기 위해 재즈시를 쓴다. 이 어둠 속에서 만져지는 ‘밤의 감촉’은 대상과 그 대상이 속해 있는 세계의 경계를 지운다. 밤바다 앞에서의 거대한 합일, 하늘과 수평선의 경계가 지워지고 단지 파도소리만이 넓은 물의 존재를 알려 준다.
이 상태를 소리의 관점에서 설명해 보자. 지금 하나의 공간에서 색소폰 소리가 들린다고 하자. 홀의 천장이 높아서 색소폰 소리가 제법 많이 울린다. 이 때 이 소리는 연주자의 날숨이 색소폰의 리드를 거쳐서 나오는 악기의 소리이면서 동시에 그 소리가 공간으로 퍼지면서 울리는 공간 전체의 소리다. ‘가구 음악 Furniture Music’을 제안한 에릭 사티 Erik Satie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소리는 그 공간의 것이다. 소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소리는 존재의 기척이면서 동시에 그 존재가 몸담고 있는 공간의 ‘감촉’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 Bill Evans의 어떤 라이브 앨범을 들으면 청중들이 대화하는 소리나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음악 소리와 함께 들린다. 음악 듣는데 방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재즈 본연의 호흡, 일체감이 느껴져서 좋다. 송재학은 어느 실내에서 버드 파웰의 「운 포코 로코」를 들으며 느낀 이 일체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흑백의 손가락이
가늘어지면서 건드리는
빗방울은 블루
비와 물방울을 이해한다면
나는 투명해지는 거지
(「어제와 비에 대한 인터뷰」)
재즈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 Bud Powell이 불세출의 드러머 맥스 로치 Max Roach와 함께 녹음한, 독특한 싱코페이션 리듬과 묘한 불협화음의 애수가 뒤섞인 운 포코 로코를 들을 때 비가 오는 것은 행운이다. 너무 좋은 조합이기 때문이다. 삐걱이는 듯한 리듬감은 재즈의 정수를 들려준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려내는 리듬은 순간적이고 우발적이다. 그 어떤 판단도 개입되어 있지 않지만 그래서 완벽하다. 제멋대로 그어지는 것 같아도 촌철살인의 균형감을 보여주는 추사의 획이 연상된다. 그 음악의 리듬은 또한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리듬과 닮았다. 제멋대로인 비의 리듬은 맞고 틀리고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는다. 미니멀리스트 스티브 라이히 Steve Reich는 일찍이 빗방울의 자유 인터벌을 음악적으로 개념화하면서 ‘위상음악 Phase Music’을 체안한 바 있다. 빗방울의 리듬은 최고경지의 ‘위상음악’이다. 버드 파웰과 맥스 로치의 간결하고 드라이한 리듬감은 거의 빗방울의 경지를 보여준다. 비의 리듬과 음악의 리듬이 청각의 창을 통해 서로를 비춘다. 바로 그 때 나는 ‘투명해지는’ 거다. ’나’는 물이 되어, 창문이 되어(유리라는 물), 그 둘의 춤사위를 투명하게 반사한다.
창문으로만 보이는 겨울비 때문에
뒤척이는 눈물 대신
나의 긴 해안이 생겼다네
(「어제와 비에 대한 인터뷰」)
그 때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눈물은 겨울비가 되고 그 비는 창문으로 흐르며 윤곽을 만들고 그 윤곽이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긴 해안’으로 변신한다. 이 해안은 리듬 하나 하나, 해안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 각각의 설명을 거부한다. 차라리 그것들을 품는다. 그게 바로 ‘어둠’이다. 특별한 어둠 속에서의 체험, 존재와 세계의 합일은 자아의 관점에서 보자면 ‘몰아’의 상태다. 그 날을 시인은 ’이상한 하루’라 표현한다.
이상한 하루였어
물이 나이고
내가 물,
무엇이든 서로가 되는 날이었어
(「어제와 비에 대한 인터뷰」)
‘물이 나이고 내가 물’이라는 말은 이제 쉽게 이해된다. 창문에 그려진 ‘해안’은 ‘물로 그린 그림’이다. 물로 그림을 그릴 수록 공간은 텅비워진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시인은 재즈시편 곳곳에서 이 영역, 옛날에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가 ‘존 Zone’이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한 어슴푸레한 구역을 암시한다.
저녁부터 밤의 가로수는 울기 시작했다
브라스 밴드의 잉크로 묘비명이 새겨진다
(「스토리빌」)
문명이 거기서 끝난다. 재즈가 시작된 마을, 스토리빌에서. 가보지는 않았으나 뉴올리언즈에서는 장례식이 축제라지. 상여를 꽃으로 장식하듯, 이 마을에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흥겨운 뉴올리언즈 재즈로 치장한다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고, 슬퍼하며 기뻐하지. 이 눈물이 흘러내려 그림을 그린다. 운 포코 로코. 별가루 같은 이 발음. 물로 그린 그림을.
7. 거의 모두, 흐린, 얼룩, 터울림
물로 그린 그림은 어슴푸레한 흔적을 남긴다. 시간의 지형도다. 어슴푸레한 그 흔적을 우리는 ‘얼룩’이라 부른다. 이 얼룩을 송재학의 시 속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해석하면 ‘거의 모두’가 된다. 물이 스며들었다가 말라 살짝 우그러든, 자세히 바라 보면 특유의 해안선이 그려진 종이를 본 적이 있나. 그 해안선 종이 ‘일부’에 남겨진 젖은 시간의 덧없는 춤사위다. 그러나 그 경계를 정확히 구분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이 물의 얼룩은 종이의 ‘거의 모든’ 영역에 이미 번져있는지 모른다. 한 때 종이는 다 젖었었다. 물로 그린 그림이 남긴 얼룩은 무라카미 류가 표현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세계, 물이 세계의 ‘거의 모든’ 영역과 호흡한 흔적이다.
나는 그 ‘거의 모든’ 접점들이 빚어내는 공간적 결과로서의 소리를 ‘터울림’이라 부른다. 터울림은 대화의 흔적이지만 인칭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의 감지되는 희미한 상호주관적 얼룩으로서의 시각적 존재와 소통한다. 재즈는 바로 그 순간적인 ‘터울림’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소리는 공간의 ‘거의 모든’ 틈을 다 방문한다. 음파의 공간 방문은 미세한 수억의 겹침들로 메아리가 된다. 사람이 다 계산할 수 없어서 그렇지 이 방문은 공기의 떨림에 의해 아주 정확히 계산된다. 소리에는 빈 틈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하나의 추구, 또는 방향성을 감지하게 된다. 존재의 증발을 마다않는 일. 이 감수성은 21세기 전반기를 살고 있는 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바로 대상에서 부재로, 또는 비가시적인 ‘얼룩’, 또는 ‘블러’로의 이행이다. 나 역시 이 쪽에 관심이 많다. ‘후위파 선언’이라는 걸 한 적도 있다. 노래란 그런 것이다. 그만큼 가볍고, 덧없이 사라진다. 이 가벼움 속에서만 푸른 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문명이 열쇠를 찾을 수 있다.
맨 처음에 송재학의 시들을 ‘흐릿하다’고 했다. 흐릿한 느낌은 바로 이 ‘얼룩’ 때문이었다. 송재학 시인은 대상들을 시어로 가두는 대신, 그것들이 어떤 영역 안에 스며들어, 또는 (이 쪽이 더 맞을 듯 한데) 증발하여 희미하게 남는 ‘얼룩’으로 사라지도록 놔둔다. 이 얼룩은 터울림으로만 존재하고 덧없이 사라진다. 그 때 즉흥연주는 공간으로 스며 ‘공간의 즉흥연주’가 된다. 재즈는 그토록 가볍고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