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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29) 바라는 대로?
타인에게 바라기만 하는 ‘거지근성’은 버려야 합니다
■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황금율로 유명한 이 말씀을 들으면 갸우뚱하게 됩니다. 남에게 바랄 것이 더 많은 사람도 있고, 남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말씀을 지키기 어렵지 않을까요?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주어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는 들으면 맞는 말씀인데 왠지 실행하기엔 부담스런 말씀들이 많습니다. 복음의 이 말씀도 그중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해주길 바라는 것을 남들에게 해주란 말씀은 분명 맞는 말씀인데 지나치다는 느낌이 듭니다.
만약 어떤 본당 신부가 강론 중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큰돈을 주기를 바라신다면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현금을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신자들이 동의할까요? 당신부터 해보라고 하면서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이런 무리한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이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윤리적인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에 나온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십계명의 경우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그 당시 사람들이 살인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도둑질 하지 말라, 남의 여인을 탐하지 말라 등등의 계명들도 그 당시 그런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었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믿음이 깊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대로 산 민족이 아니라 십계명의 내용처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도둑질, 간음 심지어 살인까지 하고 있던 민족이란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많은 거지근성을 가진 사람들인지 대놓고 비판을 하십니다. 남에게 바라지만 말고 남에게 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이 부분을 보는 분들 중 지나치게 착한 분들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베풀고자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얼핏 보면 성인들처럼 보이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신경증적인 면들이 보입니다. 일명 ‘착한 아이 콤플렉스’입니다. 이 콤플렉스를 가진 분들은 성경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바라기는커녕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무언가를 해주면 마음이 부담스러워서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짐 위에 더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종교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그 외의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라는 식의 가르침을 종용해서 심리적인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증세를 더 악화시키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집회서 4,11)
구약 집회서의 이 말씀을 유념해야, 말씀으로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 마태 7,1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0) 안수의 효과
사제가 머리에 손을 대고 신자들 위해 기도할 때
■ 성경에 예수님이 손을 대시어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치실 수 있을 텐데 손을 대고 고쳐주시는 이유가 있으실까요?
“신부님 안수 좀 해주세요.”
성당 마당에 서있으면 가끔 신자분들이 안수를 청합니다. “저는 안수하는 신부가 아니에요”라고 하면 “주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에게 안수해주셔서 병을 낫게 하셨으니 신부님도 그러셔야지요”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마태오복음 8장에 나오는 치유기사. 이 부분을 처음 봤을 때 놀랐습니다. ‘아니, 베드로 사도의 장모라니. 그럼 아내와 자식들도 있단 말인가’하고 말입니다. 초대 교황이신 베드로 사도가 유부남이란 사실에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베드로 사도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에 대해 영성심리에서는 그냥 병이 아니라 홧병일 것이라 추측합니다. 돈을 벌어와야 할 사위가 웬 이상한 자의 뒤를 따라다닌다니, 그만 열 받아서 누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베드로의 장모에게 다가가시어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십니다. 베드로 사도 장모의 마음에 공감을 해주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먹하거나 불편한 감정은 신체 접촉으로 해소가 된다고 합니다.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거나 안아주거나 하면 그동안 쌓여온 감정들이 일시에 해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체 접촉 중 압권인 것이 안수입니다.
그래서 처음 간 본당에서 본당 신부가 교우분들과 친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안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수로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일으키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사제로서 신자들에게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안수기도를 해주면 사제와 신자 간에 깊은 정이 생깁니다. 다른 것보다 안수가 효과가 더 큰 것은 머리에 기도를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이 자기 머리를 만지는 것에 불쾌감을 느낍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런데 사제가 안수를 해준다고 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청합니다. 사제를 마음의 아버지로 받아들일 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본당 신부들이 신자분들에게 사랑받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좋은 방법이 안수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신자분들이 모여서 본당 신부님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신부님은 강론을 너무 잘하셔.”
“우리 신부님은 술자리마다 다 참석하셔.”
“우리 신부님은 신자들 이름을 다 기억하셔.”
그런데 한 자매만 조용히 있어서 “자매님 본당 신부님은 무얼 잘하세요?”하고 묻자, “우리 신부님은 잘하시는 게 없는데, 매일 신자들 안수를 해주세요”라고 하자 모두 부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신자분들이 성당에 나오는 것이 감소됐다고 걱정들합니다. 이런 걱정을 불식시킬 가장 좋은 방법이 안수가 아닌가 합니다.
■ 마태 8,14-17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 당신 손을 그 부인의 손에 대시니 열이 가셨다. 그래서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28) 거짓 예언자
교만과 거짓으로 대중 현혹하는 이들 조심해야
■ 성경에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라”면서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는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주님께서 거짓 예언자들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지금은 사이비교주들을 말합니다. ‘나는 신이다’란 다큐멘터리에서 보듯이 우리나라는 사이비교주들의 천국입니다. 그만큼 사회적 불안이 크다는 것입니다.
사이비교주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교주의 자아 팽창. 즉 교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이 성령, 보혜사, 심지어 재림 예수라고까지 합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는 실패한 예언자, 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어리석은 죽음을 당한 자라고 비아냥거리면서 자신이 참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백프로 종교 사기꾼들, 범죄자들입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마치 유기견처럼 어린 시절을 보낸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방치됐거나 버림받은 이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사이비교주들의 견습생 생활을 하다가 주워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허풍 신학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심지어 성경을 자기 멋대로 뜯어고치고 붙여서 허무맹랑한 논리로 마치 자신이 새로운 예언자인양 처신합니다.
세 번째, 공포 신앙을 조장합니다. 사람들을 가장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공포심입니다. 종교적 공포심은 일반 독재자들의 공포 정치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독재자들의 공포 정치는 반정부운동을 유발시키지만, 공포 신앙은 신에게 대적해야 하는 것이기에 아무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이비교주들은 지옥설, 구원설, 종말론에 대한 공포심을 신도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온갖 사악한 짓을 다합니다.
네 번째, 사이비교주들은 신도들을 심리적 감옥 안에 가둘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마저 다 차단하게 합니다. 일종의 집단화를 시도하는 것인데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된 상태에서 사람들은 리더격인 사람에게 순종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집단화된 조직 안에서 교주들은 획일화된,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세뇌교육을 합니다. 생각하는 훈련을 멈추게 되면 사람의 뇌가 포유류의 뇌만 발달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이비교주들은 종교인이 아니라 범죄자들입니다. 신도들을 성 착취, 노동 착취를 하는 사이비교주들은 법이 보호할 사람이 아니라 법으로 처벌할 사람들입니다.
가끔 생각 없는 정치인들이 종교 보호 운운하면서 사이비교주들을 옹호합니다만,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사이비교주들은 사회적 암덩어리이기에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야 합니다. 만약 방치하면 암세포가 전이되듯이 사회 전반을 병들게 할 것입니다.
■ 마태 7,15-18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1) 좁은 문
어둡고 컴컴한 마음의 동굴, 탐사해 보셨나요?
■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일까요?
어린 시절 성경을 보면서, 또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읽으면서 ‘좁은 문’이란 문구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것일까? 글자 그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의 길인 것인가? 심지어 좁은 문에 끼어서 쩔쩔매는 꿈까지 꿀 정도였습니다.
열심한 신자분들 중에는 좁은 문 콤플렉스에 걸려서 스스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사람들도 나왔고, 이런 현상은 유럽인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어떤 성당은 입구가 아주 좁은 문으로 된 곳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사람들은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돈을 벌어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가고 싶은 곳 다 가보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 가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구란 것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달에 가고 싶어 하는 것도 그런 욕구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통해 얻은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도 않고 자신의 삶에 큰 변화를 주지도 않습니다. 그저 순간적인 쾌감만을 맛보게 할뿐입니다. 이번에 타이타닉호를 보기 위해서 탐사선을 탄 부자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세간의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기는커녕 ‘돈 자랑하다가 죽었다’고 비아냥거립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는커녕 남은 재산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처럼 바깥에서 행복을 찾는 삶은 그 결말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사람 마음의 행복은 마음 안에서 찾아야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을 찾는 삶이란 외부의 조건으로 자기만족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자신 안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 내적 자원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탐색하는 것이 동굴탐사와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마음탐색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안겨줍니다.
어둡고 컴컴하고 괴물이 나올 것만 같은 마음의 동굴 안에서는 여러 가지 자원들, 보석들이 즐비합니다. 이렇게 마음탐색을 통해 내적인 부자가 된 사람들은 바깥에서 행복을 찾는 것을 잊습니다. 마치 금맥을 찾은 광부와도 같이 좁은 갱도 안을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것입니다.
좁은 문은 특히 정치인들에게서 확연히 보입니다. 정치인들을 보면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미지향형인 정치인과 권력지향형인 정치인.
의미지향형인 정치인들은 권력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고자 하며 자신이 하는 일로 국민들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판단은 역사가 해줄 것이라고 의연한 태도를 갖습니다. 이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권력지향적인 사람들은 마치 똥과 같아서 주위에 똥파리들이 늘 드글거립니다. 이권만을 탐하는 자들과 스스로 도인임을 자처하는 사이비 종교인들이 똥파리들처럼 떠나질 않습니다. 이들은 좁은 문을 피하고 넓은 길로 가는 듯하지만, 결말은 똥파리들처럼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인생 어느 분야에서건 좁은 문의 법칙은 똑같습니다.
■ 마태 7,13-1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2) 해파리 콤플렉스
‘영적 허세’로 이중적인 삶 사는 위태로운 사람들
■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죽은 이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하도록 내버려두라고 하신 말씀에 내가 그렇게 따를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납니다.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려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자상함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복음에서는 이들에게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냉담한 태도를 보이십니다. 어디든지 따라갈 것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날 따라오면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하시고,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는 냉소적이고 섬뜩하기조차 한 말씀을 하십니다.
왜 그러신 것일까? 이들이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이 겉꾸밈에서 나온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일명 해파리 콤플렉스라고 부릅니다. 이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은 진심으로 제자로서의 삶을 살 의지가 없기에 차갑게 대하신 것입니다.
이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은 몇 가지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수행하는 삶보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고통스런 삶의 현장에는 가지 않고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자리에만 있고 싶어합니다. 청소할 때는 얼굴도 안보이다가 사진 찍을 때만 나타나는 것이 이들의 특징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사는 사람들. 이중적인 삶을 사는 것이 이들의 특징입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낭만적으로 보고 싶어합니다. 신학교나 수도원을 둘러보면서 “이런 곳에서 살고 싶어요” 하는 사람들. 그러나 정작 살아보라고 하면 일주일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럽의 성들을 돌아보면서 성의 아름다움에 큰 찬사를 보내지만 그 성을 짓기 위해서 피땀을 흘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 셀카 찍기에 여념이 없어서 옆에서 구걸하는 이들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 한마디로 자기 멋에 겨워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종교인의 삶조차 자기 치장을 위한 삶으로 변질시킵니다.
겉치장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영적 허세’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들은 십자가를 장식하기 바쁜 사람들입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훈련은 하지 않고 자기 외모에만 신경쓰는 것처럼, 수행을 하지 않고 수행하는 척하면서 사람들로부터 관심만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
겉멋이 들린 이런 사람들은 수도공동체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규칙에 대해, 생활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공동체에 분열을 조장합니다. 자신이 마치 개혁가인양 말하고 행동하지만 내심은 수도자로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해서 트집을 잡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신 것입니다.
■ 마태 8,18-22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하고 말씀하셨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3) 약한 자의 기도
파도가 덮쳐오는 순간엔 “살려주세요” 외쳐도 됩니다
■ 성경에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셨는데, 정작 겁이 나서 주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기 일쑤입니다. 겁이 나지 않도록 믿음을 강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오래전 갈릴래아 호수에서 배를 탄 적이 있습니다. 이름은 호수이지만 엄청나게 큰 호수,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갈릴래아 호수를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순례객들을 대상으로 운용하는 유람선을 탔는데 마침 엄청나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왔습니다. 배는 흔들리고 사람들은 기둥을 붙잡고 생난리도 아니었지요. 그때 바로 이 복음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에서 평생을 살아온 베드로 사도가 주님께 살려달라고 할 정도였으면 풍랑이 엄청났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자는 베드로 사도를 비웃기도 합니다. 어부 출신에 주님도 계시는데 웬 엄살을 부렸는가 하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질책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신 것이 이런 비난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이 부분은 세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질책을 하신 것은 배에 탄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이었기에, 주님을 대신해 공동체를 이끌어가야 할 지도자급의 제자들이 그에 합당한 마음가짐을 갖지 못했기에 뼈아픈 충고를 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 말고도 복음에 나오는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들은 거의 다 지도자급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입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기의 순간에 베드로 사도처럼 소리쳐야 합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됐습니다”하고 말입니다.
이것을 ‘약한 자의 기도’라고 합니다. 간혹 일부 종교인들이 이 부분을 들어서 믿음에 대해 지나친 강조를 하곤 하는데 그런 소리들은 성경의 배경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하다간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운동선수들이 체급이 다르고 수준이 다르듯이 신앙생활도 그러하기에 초보자들은 초보자답게 사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도자급의 제자들과 일반인들에게 다른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획일적인 교육을 하고 있어서 많은 이들이 구원 불안증, 종교적 우울증 등의 신경증적 질환을 앓고 있으며 심지어 정신병적인 상태에 빠지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믿음은 필요하지만 무조건적인 믿음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지나치게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경계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이 사람 잡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고, 특히 사이비종교인일수록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기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 마태 8,23-27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4) 마귀, 그 기묘한 존재
현대의 마귀 들린 사람들은 종종 뉴스에 나옵니다
■ 성경에 마귀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는데, 오늘날에도 마귀 들린 사람들이 있나요?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팔자를 타고난 동물을 꼽으라고 하면 돼지를 손꼽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마귀가 돼지형상으로 표현될 때가 자주 있어서입니다.
마귀라는 존재는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오래된 종교들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귀는 선에 대항하는 존재, 악의 세력을 이끄는 존재 등으로 묘사돼왔습니다. 중세 때에는 실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고 지금도 구마영화에서 마귀의 흉물스런 모습이 묘사되고 있어서 마음 약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곤 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귀에 대한 기억을 날려버리는데, 일부 종교인들이 신자들에게 마귀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함으로써 마음 약한 신자들을 신경증적인 상태에 빠지게 하기에 마귀에 대한 고찰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모든 것을 마귀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은 자기 문제를 볼 힘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사람 마음 안에는 어두운 부분이 있는데 이것을 직시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그 어두움에 대한 공포심을 마귀 탓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전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신앙이 깊은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취약해서 그런 것이니 이들을 대단한 신심가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 주의할 것은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무조건 마귀 탓으로 돌리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를 초래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마귀 들림 상태는 거의 대부분 조현병 증세들이란 것이 현장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입니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환청, 환시 등등의 증세가 나타난다면 마귀라고 단정 짓지 말고 정신과를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간혹 일부 종교인들이 마귀를 쫓아낸다고 기도를 해서 심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정말 마귀가 들렸다는 착각을 하게끔 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고, 무지한 종교인들이 구마예식을 한다고 하면서 환자를 학대하거나 구타해서 사망케 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그렇다면 마귀들은 없는 것인가? 아닙니다 지금도 존재합니다.현대판 마귀들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비존재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것들도 진화를 해서 예전에는 자기 실체를 드러냈으나 지금은 자신들이 마치 사람 마음 안의 양심인 양하면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자리에 머무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현대판 마귀 들린 사람들을 정신의학에서는 ‘사이코패스’라고 개념짓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아귀처럼 권력욕에 사로잡혀서 닥치는 대로 먹어치웁니다. 그래서 옛날 마귀보다 신종마귀가 더 무섭다고 하는 것입니다.
■ 마태 8,28-34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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