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1: 12. 천사의 탄원 - 1: 14. 세 가지 말씀
슥 1: 12. 천사의 탄원 -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천사들은 하나님께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고 탄원한다.
1]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런 탄원의 근거로 이들 성읍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노하신지가 70년이 되었다는 점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70년은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통치한 기간이나 예루살렘이 파괴되어 있던 기간을 의미한다.
* 렘 25: 11-12 – 11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 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 슥 1: 12 -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 슥 7: 5 -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2]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 70년에 대한 견해
(1) 하이틀리(Whitly) : 기원전 587 - 515년 사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70년의 시점이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된 때로부터 성전 재건이 이루어진 사이로 보기 때문이다.
(2) 오르(Avigdor Orr) : 기원전 605 - 539년 사이라고 주장한다.
70년이 시작되는 시점을 길가메시 전투에서 바벨론이 애굽을 이긴 605년으로 본다. 이때로부터 유다는 실제로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
마치는 해는 고레스 칙령에 의하여 바벨론의 유대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때이다.
(3) 리핀스키(E. Lipinski) : 70년을 상징으로 해석한다.
70년은 땅에 대한 안식을 의미하거나 신전 도시에 대한 신의 진노가 지속되는 기간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엘살하돈의 비문 내용에 근거한다. 즉 실제 기간은 11년이지만 비문은 마르둑 신이 진노한 기간을 70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사야 23: 15-17에서도 두로가 황폐된 기간을 70년으로 보았다.
* 사 23: 15-17 – 15 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16 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17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4) 저자의 견해
70년이 처음 예언된 것은 렘 25장 11-12절이다.
* 렘 25: 11-12 – 11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레미야서를 기록한 때가 B. C. 626-586년으로 예루살렘의 함락(남왕국 유다의 멸망)으로부터 제2의 성전이 완공된 B. C. 516년으로 본다.
따라서 스가랴서도 B. C. 520-518년에 기록하여 B. C. 458년 에스라의 제2차 귀환과 B. C. 444 년 느헤미야의 제3차 귀환의 때로 본다.
슥 1: 13 여호와의 반응 -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1]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 선한 위로의 말씀
(1) 선한 말씀 :
전 세계를 향한 우주적인 면
* 막 10: 18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 위로하는 말씀 :
이스라엘을 향한 특수적인 면.
* 사 40: 1-2 –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안위(安慰)
몸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위로함. '안위하리라' 원어 '나함'의 기본 뜻은 '한숨 쉬다', 여기서부터 '동정하다', '위로하다’
* 창 5: 29 -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 창 37: 35 -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 룻 2: 13 -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 시 23: 4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나 3: 7 -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 히 6: 18 -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후회하다'는 뜻이 파생되었다.
* 창 6: 7 -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 렘 20: 16 -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이러한 라멕의 기구(祈求)를 통해 우리는 당시 족장들의 극심했었던 생활고와 그 가운데서도 절망하거나 원망치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한 라멕의 순전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1: 14. 세 가지 말씀 -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
1]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 첫 번째 말씀
지나간 과거 속에서 열국이 이스라엘을 지나치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시온을 긍휼하게 여기사 다시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바뀌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에 고난을 더한 이방 나라로 옮겨감을 시사하고 있다.
(1)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예루살렘이란 이름의 뜻은 '평화의 성읍' 또는 '살리무의 성읍'인데, '살리무'는 암몬 사람들의 섬기던 신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루살렘에는 주전 4000년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을 때, 거기에는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 수 15: 63 –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 수 18: 28 – 셀라와 엘렙과 여부스 곧 예루살렘과 기부앗과 기럇이니 열네 성읍이요, 또 그 마을들이라. 이는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기업이었더라.
이 여부스 성읍을 다윗이 비로소 정복하여 다윗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 삼하 5: 6-9 – 6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7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8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9 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다음으로는 남 왕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 도시의 크기와 인구는 여러 해에 걸쳐 변하였다. 다윗 왕 시대에는 예루살렘 면적은 6헥타르이고, 인구는 2000명이었는데, 솔로몬 왕 시대에는 면적은 성전 산을 포함시킴으로 13헥타르로 늘었다.
그 후 히스기야 왕 때는 50헥타르까지 늘었다(왕하 18-20장). 그러다가 느헤미야 때는 다시 면적 12헥타르, 인구 4500-5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다시 번영했던 하스몬 시대(주전 142-63년)에는 그 면적은 다시 65헥타르로 확장되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면적이 약 180헥타르, 인구가 최소한 8만 명까지 이르렀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룩한 도시로 생각되었다. 오늘날 이 도시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가장 거룩한 도시로, 회교도들에게는 (메카와 메디나 다음으로) 셋째로 거룩한 도시로 생각되고 있다.
(2) 시온을 위하여
원래는 "여부스족"의 본거지로서, 다윗이 점령한 여부스 요새의 본 이름인데, 다윗 왕이 빼앗은 "예루살렘"의 한 부분으로 "다윗 성"을 가리킨 말이다.
* 삼하 5: 6-9 - 6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7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8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9 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그 후에 "성전"이 건축된 산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예루살렘 전 도시를 의미하는 시어(詩語)로 사용되었다.
* 사 40: 9 -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이 이름이 성전 산을 가리키게 되고 마침내는 온 예루살렘과 그 주민('시온의 자녀들')의 칭호가 되었다.
* 욜 2: 23 -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신약에서는 예배 공동체나
* 히 12: 22 -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나님의 현존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 계 14: 1 -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3) 크게 질투하셨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질투'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가지신 여호와의 언약 개념에 근거한 거룩한 분노라고 할 수 있다(Baldw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