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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배우는 세계가 있다
-하이타니 겐지로의 삶과 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박경선
내가 애절한 그리움으로 짝사랑하는 분들은 세계 속에서 늘 나를 부르고 있었다. 덴마크로 내 짝사랑을 찾아갈 때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미리 원작 길이로 된 그의 작품을 모두 다시 찾아 읽고 갔다. ‘안데르센!’ 그는 코펜하겐 광장 한 켠에 동상으로 앉아있었지만 생전의 그를 만나듯 가슴이 벅차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2018년 12월에 일본 오키나와로 떠날 여행 계획을 세울 때도 그리워했던 그분 ‘하이타니 겐지로’선생의 삶과 문학에 더 깊이 다가가볼 기대에 설레었다. 일행은 2011년에 서울대교육행정연수반 101기 연수생으로 만나 <사계> 모임이 된 초등교장 여섯 명이다. 남자 2명이 운전을 맡겠다고 나서자 일본어 통역할 사람, 운전석 옆에 앉아 지도 보며 길 찾아줄 조수, 경비 지출 맡을 사람 등을 정하고 보니 별스런 능력이 없는 내게는 연수물 준비 임무가 주어졌다. 이때다 싶어 1990년대부터 짝사랑해 왔던 ‘하이타니 겐지로의 삶과 문학의 향기를 찾아서’로 연수 주제를 정하고 그의 작품 읽기 총정리를 하며 내게 없는 책들은 급하게 주문해서 읽고 간추린 내용을 떠나기 전에 <사계> 밴드에 올렸다.
<하이타니 겐지로의 삶과 문학>
가.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이 살아온 삶
1934년 10월 31일 일본 고베에서 태어나 오사카 학예대학을 졸업하고 17년간 초등교사 생활을 하였다.
① 15살(1948년) 때 -야간고등학교에 입학 ‘야마모토’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분 선생을 만나 문학 공부의 동기를 얻다.- 선생이 추천해준 동인지 <바퀴-일어로 ‘와’>에 글 발표.
- 아이들 시 <기린>지에 투고. 시 100편 써 시집 손으로 만들어 냄
② 33살(1967년) 때 - 형의 자살 사건을 겪고-하이타니 선생이 파인애플 껍질 벗기는 공장에서 일할 때 옆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자신을 자책하며 산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올까요?” 그 말을 평생 간직함.-그제서야 뒤 돌아보는 인생(정신적 병이 들어 형이 죽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실이 선생의 마음을 짓눌러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했다)에서 앞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함. 자신은 아이들하고 살아왔고 아이들 덕분에 살 수 있었고, 아이들의 문학을 통해 형의 죽음을 생각하며 생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상냥함- 생명) 형의 죽음을 자신의 작품으로 표현 <태양의 아이> 책 집필. 큰 작가가 되는 계기가 됨
③ 46살(1980년) 때 - 오키나와 본섬에서 한 시간정도 떨어진 아와지섬(산호초가 아름다움)에 농사 지으며 인세로 받은 돈으로 ‘태양의 아이’ 유치원을 차리고 아이들과 산 이야기를 ‘유치원 아이들’책으로 출간. 이때 섬생활로 생명과 상냥함에 대한 생각이 깊어기며 상냥함의 의미를 생명이 빛날 수 있게 도와주는 의미로 사용함.
-메꽃을 등지고 그 속에 빨려 들어 녹아 버릴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이대로 생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불손한 생각을 했다.”고 고백한다. 오키나와 섬의 어떤 점이 죽음도 편안함과 만족감으로 맞고 싶게 했을까? 그 섬에는 그에게 멘토가 된 시카모토 선생이 있었다. ‘이 섬에는 아이들에게 배우는 세계가 있다.’는 깨침을 주고 ‘인간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것도 몰랐던 나. 그 사실을 시카모토 선생의 수업을 보며 알았을 때의 기쁨은 결코 잊을 수 없다.’며 오키나와의 아이들에게서 생명의 의미를 배웠다고 했다. 하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다른 무수한 생명이 그 생명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상이 인간의 성실함을 낳고 상냥함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배우며 하나의 생명 속에 수많은 죽음이 살아 있고 온갖 고통과 번민이 깃들어 새로운 생명을 길러내고 미래를 만들어 간다는 생각으로 생명을 보듬는 실천을 이어간 섬이다. 또한, 그는 그 섬에서 실성한 노인의 안전을 위해 온 주민이 찾아다니는 인간의 상냥함과 긍정의 뿌리를 배웠다고 했다.
④ 1991년에- 오카니와 작은 섬 ‘토카시카’로 옮겨갔다.
전쟁으로 아들과 남편을 잃어버린 할머니 말
“내가 열심히 살아야 내 안에 있는 남편과 아들이 살아갈 수 있어.”
하는 말에 감동. 오키나와에서 2년 동안 방랑생활을 끝내고 돌아온다.
⑤ 2004년 5월 22일. 양철북 출판사 초대로 한국에 와서 ‘하이타니 겐지로 세종문화회관 강연’을 했는데 문학과 교육에 대한 실천 사례들을 아이들 작품과 받은 편지를 가져와 보이며 강연. 2006년 11월 23일에 세상을 떠나심
⑥ 2015년 4월 28일 양철북출판사에서 ‘아이처럼 살다 전’-서울도서관에서 이오덕(삶이 말이 되고 말이 글이 되어야한다. 글이 말을 지배하면 권위, 거짓, 폭력이 숨어 있다는 생각) 권정생, 하이타니 겐지로의 따뜻한 만남이라는 주제로 세분을 기리는 전시회를 하였다
⑦ 2015년 6월 4일, 하이타니 선생의 교사시절 동료 ‘기시모토 신이치’선생(하이타니 겐지로 사무소 전 대표, 태양의 아이 유치원 이사장)이 서울에 오셔서 친구로서 겪어본 이야기를 들려주는 강연을 하였다. 그는 하이타니 선생을 47년 전에 만나 40년 동안 우정을 쌓음. 넥타이 사건-양복 거부 바지와 셔츠 입고와 교감께 지적당하며 새로 사 입고 온 옷이라 당당하게 말했던 하이타니 겐지로의 모습을 이야기해줌. 하이타니 선생은 창조적 생각을 키우기 위해 작문과 회화교육에 힘썼고 본 대로 말하기 놀이로 구름, 집, 덤불, 연못, 사람을 대상으로 가져오기를 좋아했단다.
하이타니 선생의 삶을 정리하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이오덕 선생님이 겹쳐 보였다. 특히, 아이들의 땀을 사랑하고 ‘넌 항상 너여야 해‘하는 신념으로 아이들을 존중했던 교육은 이오덕 선생의 ‘일하는 아이들’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교육과 맞닿아 있었다.
나. 하이타니 겐지로의 문학작품(인상적인 것 몇 편)
① 『선생님 내 부하해』 -어린이 시 지도 모음집
하이타니 선생이 섬에 살 때 바다에 나가 어업을 했는데 그때 햇빛에 그을린 얼굴 때문에 아이들이 하이 캔(*깜둥이)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때 아이들과 함께 만든 문집 <깜둥이> <깜둥이학교> 에 실려 있는 시가 ‘기린’잡지에 실렸고 그 시를 집대성한 책이 <선생님 내 부하해> 이 책이다. 이 책은 선생들의 작문교육의 바이블이 되고 있다.
하이타니 선생의 글쓰기 지도는 재미있는 방법으로 전개된다. 글쓰기에 흥미를 가지고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으로 어른에게 반항할 갱단을 만든다. 갱단에 들 시험을 쳐서 합격하면 갱단의 무기를 준다. 총은 종이, 총알은 연필, 연필로 마음을 풀어낸다. 그렇게 쓰여진 작품이라서인지 아이들은 자기 마음을 한껏 풀어낸다.
<선생님 내 부하해>-2학년 구보타 신빼이
선생님, 재주 부리는 원숭이가 돼서
사람들 앞에서 쉬해
선생님, 토인종이 돼서
내 부하해
그래서 성적표에 전부 ‘수’ 줘
<엄마 젖>-2학년 아마코토 미소주
엄마 젖은 무지무지 커다란 왕감
맨 꼭대기에 까만 아기가 앉아 있다.
② 『태양의 아이:데나노 후아 』 -장편 동화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키나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본 열도의 남쪽에 위치한 오키나와는 지리적으로는 중국에 더 가까우면서 자신들의 언어가 있는 ‘류큐국’이라는 독립 왕국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문화적 차이가 있으면서도 일본 오키나와 현으로 편입되었고 1945년 미국에 점령되어 27년간 미 군정의 통치를 받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땅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치러졌던 오키나와는 3개월간의 전투에서 주민의 3분의 1인 1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 본토인을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이 방패막이로 이용되었다는 것에 깊은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본토인 역시 오키나와 출신들을 차별하고 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다. 이 책은 그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후짱은 식당을 하는 엄마와 마음의 병으로 자주 발작하는 아버지와 산다.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 속에서 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로쿠 아저씨도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적에게 노출되어 위험해질 수 있어서 자신의 손으로 딸을 죽였던 고통을 안고 산다. 후짱은 오키나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어른들은 아직 어린아이가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꺼려했지만 후짱은 ‘저는 꼭 알아야 할 일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비겁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요.“ (255p)하면서 아빠의 병이 오키나와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전쟁이 원인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간다. 그리고, 둘레의 오키나와 출신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키나와에 얽힌 역사와 전쟁에 관하여 알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후짱의 아빠 병의 원인이 밝혀지고 아빠의 요양을 위해 단체로 오키나와 여행을 준비하지만 출발하기 며칠 전 아빠는 죽음을 맞는다.
이 작품을 작가는 스스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200만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줄곧 읽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은 아마도 ‘인간에 대한 믿음’일 것입니다.‘ 그는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읽어준 인세를 기금으로 1983년에 직접 ‘태양의 아이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며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나는 인세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세 받을 때마다, 기금, 복지재단이나 시설 같은 곳에 흩어버렸는데 그는 끝까지 교육과 아이들을 생각하는 참교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인간됨의 괴로움을 진실로 고민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며 타인이 겪는 고통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보고 보듬어 주는 인간이 되자고 작품 속에서 도 외치고 있었다.
이런 아픈 역사가 오키나와뿐이겠는가! 우리 한국도 6.25 전쟁부터 광주 사태 그리고 세월호까지, 쓰라린 고통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고통 앞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말고 비겁하게 피하지도 말고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 하는 걸음이 인간으로 살아가는길이 되겠다.
③ 『우리집 가출쟁이』
어린이는 인생을 열심히 살아갑니다./자신의 영혼을 힘껏 밖으로 향하려 합니다
어린이들의 마음은 부드럽고 섬세합니다./때로는 상처 받고 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꺽이지 않고, 동물이 촉수를 움직이듯/밖으로 밖으로 크게 뻗어 나가려고 합니다.
어린이가 지닌 활기찬 생명력은 과연 무엇일까요?/어린이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생명의 사랑스러움을 느낍니다./어린이는 많은 생명을 끌어안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소망이/누구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린이의 그런 점에 초점을 맞추어 써 보았습니다.- 하이타니 겐지로의 머리말에서 -
④ 1990년대에 심취해서 읽었던 『내가 만난 아이들』 책도 꺼내보았다. 표지는 노랗게 바래었지만 이 책을 만난 덕에 아이들과 교감하며 지냈던 추억은 싱싱하게 되살아났다. 이 책은 작가의 어린 시절 가난을 통해 제자들의 결핍을 받아들이며 아이들 영혼에 다가가려고 노력했던 자서전 같은 이야기였다. 비슷한 삶을 살아왔기에 내이야기 같아 공감이 컸다. 2년제 교육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이 되었던 우리시대에 교육대학은 거의가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선택한 길이었다. 처음에는 희미한 사명감으로 들여놓은 길이었지만 제자들이 가진 가난이 나를 확고한 사명감으로 이끌어갔다. 그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일이었고 가난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 경험이 내가 맡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더 깊게 이해하고 보듬는 자원이 되었다.
“나는 그 아이를 통해 저항의 의미를 배웠다. 절망과 맞부딪쳐 이겨 내지 않고서는 진정한 상냥함을 지닐 수 없다는 노 철학자의 말이 되살아나자 지금껏 나는 상냥한 사람들의 고독과 절망을 먹으며 살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는 그의 말에 가장 크게 공감하였다.
⑤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책도 꺼내어 들었다. 이 장편동화는 63판 발행 베스트셀러가 되고, 1978년 국제 안데르센상 특별 우수 작품으로도 선정되었다는 점도 연수물에 적었지만 ‘이 책은 90년대에 내게 아동관과 수업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준 스승 같은 책이다.’란 점을 강조해 적었다. ‘빌려온 지식은 통용되지 않으며 오로지 참된 인식을 이끄는 질문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작가의 수업방법에 이끌려 고학년 담임할 때뿐 아니라 저학년을 담임할 때도 우리 반 아이들은 토론을 즐겨했다. 이 책의 주인공 초임 여교사가 쓰레기 처리장 동네 아이들을 만나 학부모들과 부딪히며 사회적인 문제에 눈 뜨고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도 교사로 버거운 일을 겪으며 교단에 섰던 내 이야기 위에 덧입혀져 울며 읽은 기억이 난다. 주인공 데쓰조오는 부모 없이 할아버지랑 쓰레기장 근처에 살다가 친하게 된 파리를 잡아 연구하는 취미를 갖는다. 글씨도 모르고 반항적이지만 파리에게 그토록 섬세한 관심과 애정을 쏟으며 연구하는 과정에서 선생님께 글씨도 배우고 자기 마음도 다잡으며 자라난다. 그 과정에 선생들은, 쓰레기 처리장 가까이 사는 아이들이 급식 당번하는 것을 비난하는 학부모들의 항의 등, 버겁고 외로운 교사의 길을 걸어가는데, 현직에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대변해주는 듯하였다. 가장 크게 공감한 것은 “아이들에게 배우는 세계가 있다.”는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물건을 훔친 제자에게 쓴 편지가 어린 시절, 먹을 것이 없어서 옥수수 훔치러 간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고 고백했다. ‘선생님은 왜 나를 예뻐해 주세요?’ 라는 글은 다른 교사들이 그 아이를 차별했다는 구체적 증거라고 했다. 반항하는 아이들 행동 속에 자신의 인간성과 상냥함을 지켜내려는 의지가 있음을 헤아린 그의 인격에 감동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순간을 살아내는 아이들한테서 참 많이 배워가는 참 교사였다.
⑥ 『큰고추 작은 고추』 단편집에서-<로쿠베 조금만 기다려>
그의 작품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저학년 동화이다. 웅덩이에 빠진 개를 구하려고 애쓰는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보석처럼 빛나는 작품이라서. (길이도 짧아서 이 작품 원본은 연수물에 그대로 옮겼다) -이하 생략
오키나와 여행으로 일본 다시 보기
① 오키나와 평화기념 공원-한국인 위령탑공원에서 역사 살펴보기 ② 오키나와 민속 음악 등 오키나와 특유의 문화 들여다보기 ③ 하이타니 겐지로의 삶의 흔적과 문학 향기 찾아보기 |
일본인들이 한국영화 ‘겨울연가’에서 배용준의 매력에 이끌려 한류스타 신드롬을 앓듯이 나는 ‘하이타니 겐지로’를 작가 이전에 아이들을 사랑한 교육 동지애로 그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가 살던 섬에 가서 골목골목을 다니며 ‘인간이 공부를 하는 건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지. 그러니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지요.’하는 그가 만났던 할머니 같은 분도 만나고 싶고 <태양의 아이> 책속, 후짱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찾아가 빌었다는 여우 신사도 가보고 싶었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숙소가 있는 좁은 골목길도 걸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행의 계획은 오키나와현의 동서부, 남부, 북부, 중부 지방을 하루 한 곳씩 다녀보는 코스로 짜여있었다. 그 바탕 위에서 내가 중점을 둔 것의 여행 목적을 가다듬어 보았다.
① 한국인 위령탑공원에서 역사 살펴보기
오키나와현 이토만시에 있는 한국인위령탑공원을 찾아갔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조선인 1만여 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오키나와 사람들이 세운 탑이다. 우리가 찾아가 한국인위령탑 앞에 섰을 때 말짱하던 하늘에서 여우비가 흩뿌렸다. 여우비를 맞으며 우리 동포들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의 원혼이 하늘에서 함께 하는 듯 했다. 1945년 아시아 태평양 전쟁 때 오키나와 전투에 강제 징용되어가 전사한 조선인 병사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돌무덤 같은 ‘한국인 위령탑!’ 그 옆에 노산 이은상의 ‘영령들께 바치는 노래’비가 한글로 세워져 그들의 원혼을 가만 가만 쓰다듬고 있었다. <바라보면 조국은 원한의 먹구름/첩첩이 쌓이고 가린 천리만리/ 역사의 흙탕물 폭포같이 쏟아질 적에/ 양떼처럼 희생의 제물이 되어(20줄 중략)/ 산천이 울리게 승리의 합창 부르며/ 돌아가 그 품에 안기시라/그 품에 안겨 겨레의 힘이 되시라. 1975년 8월> 이렇게 비석까지 세운 이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위안부 문제에 죄의식을 못 느끼며 사무라이 정신으로 살아가는 그들과 같은 종족인가? 아니다. 이들은 1등 신민인 본토 일본인과 같은 대접을 못 받고 ‘리키징’이라며 야만인 취급을 받고 조선인과 함께 일반 식당 출입도 금지당하며 차별받던 오키나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945년 4월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면 미군에게 붙잡혀 탱크로 깔아뭉개지고 여성에겐 성폭행 당한 후 잔인하게 죽임 당한다고 선전하는 일본정부에 의해 자살을 설득당해 죽어갔다. 시무구가마로 피신했던 천 명 주민 중에 영어가 가능했던 두 사람이 미군에게 살려줄 것을 약속 받아 그곳의 천 명만 모두 살아남았단다. 그러고 보면 이들 오키나와 사람들은 1872년 메이지 시대 오키나와에 류큐빈이 설치되면서부터 주권을 상실했고 우리 조선인들처럼 일본제국주의의 피해자가 되었으니 서로 동질감에서 더 친근감을 느꼈을까? 일본 오키나와에 ‘한의 비’를 세우면서 한국의 경북 영양에도 동시에 세워주었다니 고맙기 그지없다.
‘이렇게 일본의 어느 한 구석에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구나.’
무조건 가상의 적으로 생각해왔던 일이 미안해졌다. 오키나와 향토마을에 들렀을 때 큰 나무 옆에 소원을 적어 매달아둔 흰 쪽지들을 보았다. 저 쪽지들 중에도 ‘독도를 자기네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도둑놈 심보를 버리고 조선인을 위안부로 괴롭혔던 과거도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 국위를 되찾고 싶다.’는 염원의 쪽지도 쓰여 있을 것만 같았다.
② 오키나와 민속 음악 등 오키나와 특유의 문화 들여다보기
반짝이는 불빛으로 현란한 오카니와의 국제 거리를 걸으며 민요를 라이브로 연주 한다는 민속 음악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저녁을 먹으며 오키나와 전통 민요를 부르는 여인의 구성진 노래를 들었다. 일본어 통역을 맡은 교장이 옆자리의 일본인에게 무슨 뜻의 노래인가 물었는데 그들도 우리가 방언을 대하듯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벽에 걸린 옛 오키나와 사람을 그린 그림은 하이타니 선생의 『태양의 아이』 장편 동화 속 사람들 삶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 같고, 전통악기 연주와 여인의 노래 음률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슬픔과 한을 고스란히 애잔하게 전해주었다. 『태양의 아이』 작품 이해를 돕기 위해 배경으로 가져왔던 오키나와 역사 자료가이미 우리 일행의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어 그들의 민속 음악에 더 깊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③ 하이타니 겐지로의 삶의 흔적과 문학 향기 찾아보기
하이타니 선생의 작품은 여행 떠나기 전에 이미 단체 밴드에 올려 연수를 한 터라 현지에 온 만큼, 작고한 하이타니 선생을 대신해 그를 기억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해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관광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마다 바빴고 슈리성에 학생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온 선생들 중에 하이타니 겐지로를 아는 선생 두 분과 잠시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그 다음부터는 식사 시간을 노렸지만 식당에서도 옆자리에 앉은 한 팀의 사람들만 하이타니 선생을 안다고 했다. 우리가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을 존경한다는 말에 대뜸,
“당신네는 우리 일본인을 미워하지 않는가요?”
되물었다.
“당신네들 가운데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미워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잘못한 행동에 대해 사죄하고 위령탑을 세워주거나 하이타니 선생처럼 좋은 교육을 하는 작가는 친구로 생각한다.”
며 다정한 눈빛을 나누었다. 그리고 아오자이 섬과 토카시카 섬에 가면 하이타니 선생을 기릴 것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아오자이 섬에는 <태양의 아이> 유치원만 있고 토카시카 섬에 가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운전대를 잡았던 두 교장이 ‘일정이 쫓기는데 오키나와까지 온 것만으로 만족하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물어왔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운전석이 오른쪽인데다 초행길이라 길 찾는 일도 만만찮아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들에 비해 무임승차한 나로서는 얼른 “좋아요.”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이타니 선생이 위로하는 음성이 들렸다.
‘그렇게 해요. 내가 아이들을 생각할 때 항상 오키나와가 있었고 오키나와를 생각할 때는 항상 아이들이 있었죠. 오키나와는 내게 그런 곳이라 여러분이 오키나와까지 오신 것만 해도 충분해요.’
우리는 하이타니 선생이 살았던 오키나와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 잠자리를 고시원 같은 게스트 하우스로 정했다. 침대가 이층으로 놓여 있고 화장실과 샤워장도 방 밖의 긴 복도를 지나야 있었다. 좀 불편했지만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최소 공간을 최대로 활용하는 지혜가 엿보였다.
<콩나물을 다듬으면서/나란히 사는 법을 배웠다/줄이고 좁혀서 같이 사는 법/물마시고 고개 숙여/맑게 사는 법> 이향아의 시가 생각났다.
아침을 먹으려고 승강기를 탔다가 고양이를 안은 일본인 노부부를 만났다. 고양이가 귀엽다고 연신 쓰다듬으며 웃는 그들을 보다가 문득 일본인들은 고양이의 습성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고양이를 유독 좋아해서 고양이 전문 서적만 파는 상점도 있으니 말이다. 아베 정권이 교과서에서 위안부 이야기를 삭제하려하고 독도에 대해 탐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우리의 분노를 사고 있지만, 오키나와 사람들 양심에 감사하는 마음과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조용하고 깨끗하게 생활하려는 개인의 기본 생활 습성은 <아이들에게 배우는 세계가 있다>를 넘어 <일본 어른들에게 배울 세계가 있다>로 확장되어 보였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모르는 인생을 아는 것이다.’
고 했던 하이타니 겐지로가 살던 나라 일본의 오키니와! 우리의 한을 대신해 ‘한의 비’를 세워준 양심 있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사는 곳이어서 ‘일본인이 좋다 나쁘다’의 간극 본능을 넘어서서 그들을 따스하게 기억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러고 보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민간외교관이다. 배용준 배우가 한국의 민간외교관이라면 하이타니 선생은 일본의 민간외교관인 셈이다. 국가 전체 국민을 ‘좋다 나쁘다’는 간극으로 보고 사람을 함부로 미워하는 일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얼마나 무례하고 무서운 편견인가?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생각해보니 문득, 1995년에 쓰고 2008년에 18세를 출간했던 나의 장편 동화 『신라 할아버지』에 대해 최윤정 평론가가 그의 평론집 <슬픈 거인>책에서 언급했던 말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입체적인 작가의 시선은 일본과 우리나라를 새롭게 생각하게 하고 예술가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길인가를 마음속에 심어준다. (중략) 손끝에 묻은 일본 독을 빼내고 아이들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박물관 선생이 되는 다분히 도식적인 구조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작품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진지한 태도로 사태의 표면적 묘사에 머물지 않고 입체적인 시선으로 사물의 본질을 건드리면서도 흑백 논리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타주의의 편협함에 갇히지 않은 이 작가에게서 우리 어린이 문학의 밝은 미래 한 자락이 보인다>
예전부터 일본에 대해 좋고 나쁨의 간극을 넘어 생각해왔던 내 모습이 『신라 할아버지』 책 속에도 녹아있음을 깊이 살펴 읽어준 그 분께도새삼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2020.1. 18.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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