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생몰연대 : 1899~1970
그 시대의 나이로는 72세까지 장수하고 죽은 그는
이화여대를 나온 신여성이었으며
그 시대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중에 한사람이었다
2020년 5월 29일 페북의 Designersparty와 위키백과에서
그의 업적을 간단하게 제목만 열거해 보았다
대표적인 여성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인천 출생으로, 초명(初名)은 기득(己得), 호는 우월(又月),
세례명은 헬렌(Helen)으로
그 헬렌을 한문으로 쓴 것이 활란活蘭으로 이름이 된 것이다
그는 1918년 당시 이대를 졸업했으며
1919년 3.1혁명 당시 이화여고 영어교사로 재직하였다
1923년초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독립하여
여자들의 YMCA인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창설하였다
내가 중학교 시절 그 YWCA소속으로서
불광동 수양관에서 1주일(기억이 희미함?)인가 합숙훈련을 한적이 있다
일제 강점기 1936년 전후로 일본의 강경노선에 따라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
그는 강연, 논술활동을 하는 한편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8월 20일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과 간사를 맡았으며,
제3차 조선교육령 공포 후인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 학생 400여 명을 동원,
이화애국자녀단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았다.
1941년 아마기가츠란(天城活蘭)으로 창씨개명 후
전시 체제에 협력하여 칼럼, 강연, 학도병 독려 등의 활동을 펼치며
임전대책협력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이 되었다
1941년 12월 27일 조선보국단 주최로 부민관에서
'결전 부인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여성의 무장〉(1941.12)이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1942년 싱가포르 공략 대강연회에서는
〈대동아 건설과 우리 준비〉(1942.2) 등의 주제로
조선총독부 정책에 협력할 것을 권고하는 칼럼, 강연 등을 하였다.
연사로는 박인덕, 김활란, 모윤숙, 박순천, 임숙재, 최정희 등이었다.
이후 그는 부인궐기촉구 강연,
결전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 12
태평양 전쟁 기간 중
학도병 징집을 독려하는 강연 활동에 참여하고
여러 잡지에 학도병 징집을 독려하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등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여
조선 민중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활발하게 종용하는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은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
“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 12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하 중략)
... 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
매일신보, 1943. 12. 25
이화여대생들에게 정신대 참여를 독려한 강연도 있었으며
그렇게 정신대에 자원한 이대생들중
속아서 위안부로 끌려간 여대생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직도 파악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광복 이후에는 반탁운동에 참여한 뒤
48년 장면, 조병옥과 함께 파리 UN 총회에 파견되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받고 귀국했다.
1948년 제헌국회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떨어졌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전시 내각에 참여했다가
정식 공보처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을 맡았으며,
언론인으로는 영자(英字)신문사
'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 사장을 맡았다.
내가 이대 정문 바로 아래 신촌기차역에서
태어나 대학교까지 젊은 청춘을 살았기에
이대총장 김활란이야기는 가끔 듣고 자라
그 당시에는 엄청나게 훌륭하신 여성지도자로 알고 있었기에
이글을 읽기 전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지만
이글을 읽은 후엔 내가 역사적으로 그 진위여부를 증빙할 실력은 없지만
마음의 동요가 일어남은 어쩔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똑같은 시대에 태어나 똑같은 이화학당을 다닌 유관순누나는
3.1혁명을 했다는 이유로 19살 꽃같은 나이로
가진 고문을 당하다가 순국하셨는데
같은 배움이라도 사람마다 그 배움을 실천하는 지혜는 각자 다 다른 모양이다
사람이 시류에 휩쓸리는 것은
결코 훌륭하다고 할수 없는 타고난 이기적인 인성탓이리라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D%99%9C%EB%9E%80
https://www.instagram.com/designersparty/
http://www.designerspart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