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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 환자를 치유하신 예수님(12-16)
예수님께서는 소외된 우리 인생에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의 피 묻은 손으로 부정한 우리를 만지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과의 손을 잡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치유하실 때, 육체적인 치유만이 아닌 근원적인 접근을 하십니다.
12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4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5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12-16)
첫 제자를 부르신 후에 공적 첫 사역이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43에서 다른 도시들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도시에서 온 몸에 나병이 퍼져 있는 환자를 만나십니다(참조, 막 1:40; 마 8:2). 나병환자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에(레 13:45-46)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거리를 두도록 ‘부정하다’를 두 번 외쳐야 했습니다.
(1) 예수님이 나병환자의 몸을 치유(12-13)
본문에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율법과 사회적 관습을 깨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슨한 시점과 장소에 예수님께서 계실 때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치유 능력에 의지해 절박하고 겸손한 자세로 엎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을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나병 때문에 그는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심한 사회적 종교적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율법적으로 제의적으로 부정하다 선언되었기 때문에 성전 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에서 격리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단절되었기 때문에 고통 가운데 있던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찾아와 치료를 요청합니다. 병자들을 치료하시고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식을 그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12). 그는 치유의 주도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뵙고 엎드리는 자세와 요청하는 표현에서 그가 얼마나 예수님께 겸손하면서도 간절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한 칭호인 ‘주’는 5:8에 이어서 단순히 존경을 표현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지만, 제의적으로 정결하지 않은 자신이 과연 깨끗하게 될 수 있는지 고민하며 예수님의 긍휼을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선언하십니다(13). 그때 즉시 나병이 떠났습니다. 나병환자의 몸에 긍휼과 능력의 손을 댔을 때 부정은 결코 예수님을 전염시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하는 능력과 거룩함이 그에게 전염됩니다. 하지만 나병환자를 만지는 것이 어떤 부정한 결과를 가져온 지에 대해 율법에 명확한 설명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을 격리하라는 것을 볼 때(레 13:1-9), 부정한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것은 제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손을 대신 것은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희생 없는 치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추하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면 깨끗해지고 거룩해집니다. ‘떠나다’(아펠센 απῆλθεν)는 귀신이 떠난 것처럼 나병환자를 부정한 자로 만든 나병이 떠난 모습을 시각화합니다. 나병에서 자유하게 된 상태는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 선언에서 예고한 복음에 해당합니다(4:18-19).
(2) 예수님이 나병환자의 관계를 치유(14)
예수님께서는 나병에서 치유 받은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치유의 사실을 알리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참조. 4:41). 예수님께서는 나병이 치유된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마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전하는 말씀보다 단순히 질병의 치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방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치유 소문이 필요 이상으로 확대 재생산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모세의 법에 따라 치유 받은 나병환자가 제사장에게 몸을 보여 완쾌된 사실을 입증 받도록 명령하십니다(레 14:1-32). 이것은 환자들이 다시 이스라엘 공동체 안을 들어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인 치유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사회적 소외를 극복하고 공동체 일원으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한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회복까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치유가 확인되면 치유 받은 자는 두 마리의 새를 잡아서, 한 마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속죄를 목적으로 죽이고, 다른 한 마리는 풀어줍니다. 이는 죄 용서를 위한 절차와 비슷합니다.
(3) 사람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반응(15-16)
예수님의 치유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 더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누가는 소문을 ‘말씀’(호 로고스 ὁ λόγος)으로 표현합니다(15).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말씀은 살아서 활동하는 선교의 도구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왔으나 예수님께서는 물러가 한적한 곳, 광야에서 기도하십니다(16; 참조. 4:42). 예수님께서는 인기나 명예보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17-26)
예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병자들을 치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말보다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새로운 교훈을 하십니다.
17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17-26)
하나님의 능력은 말보다 삶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말보다 삶으로 보여준 것이 더 힘듭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전쟁은 육의 싸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1)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17-19)
예수님께서 그러한 것에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환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구경하려는 사람들과 은혜를 입으려는 사람들이 가득히 모여 있었습니다. 집 밖에까지 모여 집안에서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모인 무리들을 특색 있게 소개하는 것은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17)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아서 듣고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모습은 상황을 평가하는 자세를 의미하므로 그들의 등장은 긴장감을 불러옵니다.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함께했습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이 치유로 나타날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역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는 사람들로 쓰임을 받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중풍병 병든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와 치료받기 위해 왔습니다. 그들은 문 앞에서 예수님께 나갈 방법이 도저히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을 뚫고 중풍병에 걸린 친구들 침상 채 예수님 앞으로 매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리고 가야겠다는 그들의 믿음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2)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20-24a)
본문에서 그들의 열정을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20)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놀랐습니다.
먼저 중풍병을 치료하시기 전에, 환자를 보면서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 예수님의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선언하십니다(20). 본 단락에서 중풍병은 시작과 끝에 표현되는 반면(18-19, 24b-25), 죄 용서는 중심에 배치됩니다(20-24). 이와 같이 누가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실행하신 사실을 강조합니다. 24절에는 죄를 용서한 주체가 예수님 자신인 사실이 명시적으로 묘사됩니다. 죄 용서를 선언한 것 자체가 당시 문화에서는 충격적입니다. 그래서 현장에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판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런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십니다(2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판단대로 죄 용서는 하나님께만 있는 권한이었습니다. 1년에 한 번 하나님을 대신해서 대제사장이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신 것이었지 대제사장의 권위로 용서가 집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죄 용서의 대행자가 아니며 대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권위로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용서받았다’(아페온타이)는 완료 수동태이므로 중풍병자의 용서는 이미 실행됐습니다.
그곳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1)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 용서하는 것에 대해 단번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는 것까지는 보고 있었지만, 죄 용서를 선언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볼 때,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22).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23). 실제로는 하나님만의 권한인 죄 용서가 더 어렵지만, 얼핏 보면 말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죄 용서 선언이 더 쉬워 보입니다. 죄 용서는 검증될 수 없어서 거짓말 여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을 치유하는 말은 금방 치유 여부가 나타나기 때문에 바로 검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리기 위해였습니다.
(3)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24b-26)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하시고는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24).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즉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강조할 때 사용합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24). 누가복음에서 ‘인자’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연결됩니다. 이는 죄 용서의 권위가 인자이신 예수님께 있음을 입증합니다(단 7:13-14). 인자는 중풍병자와 같이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분입니다(19:10).
본 단락의 핵심은 중풍병자의 병 치유보다 예수의 죄 용서 선언입니다. 그래서 죄 용서에 대한 내용이 네 번 등장합니다(20, 21, 23, 24). 죄 용서는 예수님께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할 것이라고 선언한 내용의 성취입니다(4:18). 4:18의 ‘자유’(아페시스)의 동사형은 20절의 ‘용서하다’ 또는 ‘풀어주다’(아피에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죄 용서는 희년의 복음이 실현된 실제 사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속박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자유를 선사하며, 무엇보다 죄에 사로잡힌 죄인들이 자유를 얻는 나라입니다. 이런 자유는 예수님의 권위로 주어집니다. 나병 치유가 하나님의 능력에 속했던 것처럼 죄 용서도 하나님의 권한에 속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먼저 해결 받아야 할 문제는 죄입니다. 중풍병자의 죄는 민족적인 죄가 아니라 개인적인 죄에 해당합니다. 죄 용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죄인과 예수님의 관계는 죄 용서로 친밀해집니다. 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께 믿음으로 오는 자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으로 변합니다.
병을 고침 받고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25). 기적의 광경을 목격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26). ‘놀라운 일’(파라독사)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말합니다. 종말에 일어날 것으로 약속된 죄 용서가 ‘오늘’(세메론) 예수님의 권위로 실현됐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침 받은 중풍병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여서 이 광경을 지켜보면 사람들도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겠습니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을 소개하고 자주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는 것을 여러 부분에서 강조합니다. 동일한 내용을 소개한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은 이를 주목하지 않지만,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중요하며 서글픈 것은 그 사건을 통해 “믿었다”는 말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변하지 않으면 악순환은 거듭됩니다. 관계가 복원되어 그분의 통치를 받지 않고는 다시 죄의 굴례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두 발로 활보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의 마비보다 영혼의 마비가 더 큰 문제입니다.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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