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에 중얼거리다
우체국이 사라지면 사랑은
없어질 거야, 아마 이런 저물녘에
무관심해지다 보면, 눈물의 그 집도
무너져버릴 거야, 사람들이
그리움이라고, 저마다, 무시로
숨어드는, 텅 빈 저 푸르름의 시간
봄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주소가
갑자기 떠오를 때처럼, 뻐꾸기 울음에
새파랗게 뜯기곤 하던 산들이
불켜지는 집들을 사타구니에 안는다고
중얼거린다, 봄밤
쓸쓸함도 이렇게 더워지는데
편지로, 그 주소로 내야 할 길
드물다, 아니 사라만 진다
노을빛이 우체통을 오래 문지른다
그 안의 소식들 따뜻할 것이었다
길
빼앗긴 것들 찾을 수
있을까 도시에서 밀려나오는 길
길어질수록 치욕만 는다
눈감으면 더욱 새파랗게 빛나는 길
무르팍 후들거리는데
시내버스 장의차처럼
이 길 지나갔을까 혁명처럼
도시의 불빛 공중에 부옇다
이 밤 지나면
이 길 돌아오는 길이면
다시 찾는 길은
다시 빼앗는 싸움일텐데
무혈혁명도 도화선처럼 푸르르
이 길로 달려갔을까
치욕에서 화약냄새가 난다
指紋
봄 풀 꽃, 저 햇빛의 작은 지문들
5월 늦은 오후, 깨끗하게 늙어가는 선생을
만나고 돌아오는데, 민들레들 길섶에서
달구어져 있다, 햇살이 지그시
민들레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노오란 이 빛의 방울들
작은 소리를 터뜨리며 번져나간다
세상에 같은 지문은 없는 것이다
선생님은 아직도 문 밖에 계시다
언덕길 오르다 돌아다보니
선생님은 보이지 않는 눈길로 나를
떠밀고 계셨다
내 몸에 몇 개의 지문이 찍힌다
耳鳴
애드벌룬에서 지하도 바닥에 붙은 양말광고까지
이 거리는 소리친다 두 눈과 귀를 닫아도
거리는 한시도 입을 다물지 않는다
저 인구시계로부터 어제의 교통사고 숫자까지
텔레비전은 물론 자명종까지
이 도시는 늘 외치거나 재잘대고 있다
저것들을 멀리하는 그때가 죽음이다
거미여인의 춤
이 그리움은 全方位이다
이 거미줄에 닿지 말아라
거미보다 외롭다
그대는 공기의 한켠 무관심처럼 내다건
이 기다림 보지 못한다 그대는
언젠가 지나가리라
캄캄한 다짐 한가닥
바람에 걸어놓고 눈물도 아껴
거미줄 만드는
이 푸른 도화선의 순간들
거미처럼 기다려 왔다
이 외로움에는 닿지 말아라
그대 기쁨의 처마에서 툭
떨어지면서 그날부터 파랗게 고여
거미줄 만들었거늘, 이제
소리쳐 부르지 않으리라
― 『산책시편』, 민음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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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좋은시
저물녘에 중얼거리다 外 - 이문재
에반겔리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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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29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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