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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성서생활피정강의 묵상집〈1~2 시간용〉
◉ 강의 주제 : ‘여러분의 마음 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 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베드로후서 1장 19절)
저는 베드로후서 1장 19절 말씀을 읽어가다가 마음 속에 동이 트는 것을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듯 분명하게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재림에 대한 동틈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묵시록을 더욱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묵시록은 묵시 1장 4절에서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하였듯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중심으로 예언적으로 이 재림시대에 이루어질 일들을 기록한 책인 것입니다. 그리고 묵시 2장에서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고, 묵시 6장에서 봉인을 떼시고, 묵시 12장에서 성모님이 아들을 낳고 용이 싸우려고 등장하고, 묵시 16장에서 대접의 재난을 내리시고, 묵시 18장에서 바빌론이 패망하고, 묵시 20장에서 천년 왕국이 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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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신의 전쟁을 통해서 결국은 완덕을 이루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생각입니다. 즉 하느님을 아는 것과 완덕을 이루는 것이 즉 ‘상해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 1 (문)(답)에 있듯이 자기 영혼을 구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모성심을 통하여 천주성삼께 영광!!”이란 우리 수도회 표어 그대로 신약시대에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말씀이신 성자를 우리에게 낳아 주셨듯이 이 묵시록의 재림 시대에도 묵시 12장 1-2절 ‘그리고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 그 여자는 뱃속에 아기를 가졌으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습니다.’ 하였듯이 그리고 5절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릴 분이었습니다.’ 하였듯이 성모성심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영신적으로 성모성심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과 자녀들을 낳아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 아기가 태어나느냐가 중요한 것인데 아기가 태어나고 용이 싸움을 걸어오고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나주의 성모님이 울고 계시고 나주성모님의 메시지에 “네가 치르고 있는 산고의 고통이 있기에 출산이 따르지 않겠느냐?” 하는 메시지 내용이 있던데 성모님이 울고 계시고 피눈물까지 흘리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한번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성삼 노래’ 2.에서 ‘천주성삼 이세상 내려오시어 / 천하만민 백성들 보여주시면 / 천하만민 가운데 우리 교우는 / 상등통회 발하는 우리 교우는 / 천주성삼 뵈옵고 천당복락을 / 끝없이도 누리어 누리오리다 / 천주성삼 마지막 공경하오며’ 하였듯이 그리고 노래 3.에서 ‘그 시에는 자기복중 복중을 치며 / 자기 죄를 통회하여 우는 소리가 / 온 세계에 진동을 진동을 하며 / 천주성삼 이세상 회심을 시켜 / 천주성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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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되어오리다’ 하였듯이 이것은 묵시 1장 7절에서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 땅 위에서는 모든 민족이 그분 때문에 / 가슴을 칠 것입니다. /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하였듯이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고 그러면 우리는 상등통회를 발하게 된다는 말인 것인데 이 재림은 바로 묵시록의 영신의 전쟁때인 묵시 16장 16절 ‘하르마게돈’의 전쟁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즈가 12장 11절 므기또 골짜기 하닷림몬에서의 치열한 전쟁처럼 하르마게돈(므기또산을 아마겟돈 또는 하르마게돈 이라고 부름) 전쟁의 시대인 것입니다. 열왕하 9장 27절 므기또산 전투때처럼 묵시 16장 14-16절 모든 왕들을 하르마게돈으로 불러 모으지만 결국 패할 영신의 전쟁에 불러 모아 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시 12장 3-6절 ‘이번에는 큰 붉은 용이 나타났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 용은 자기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리고는 막 해산하려는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그 아기를 삼켜 버리려고 그 여자 앞에 지켜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느님과 그분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들려 올라 갔고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곳은 하느님께서 천 이백 육십 일 동안 그 여자를 먹여 살리시려고 마련해 두신 곳이었습니다.’ 하였는데 즉 이것은 묵시 12장 13-16절 ‘그 용은 자기가 땅에 떨어진 것을 깨닫자 그 사내 아이를 낳은 여자를 쫓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가지고 있어서 광야에 있는 자기 처소로 날아가 거기에서 삼 년 반 동안 그 뱀의 공격을 받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뱀은 그 여자의 뒤에서 입으로부터 강물처럼 물을 토해 내어 그 물로 여자를 휩쓸어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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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땅이 입을 벌려 용이 토해 낸 강물을 마시어 그 여자를 구해 냈습니다.’ 하였듯이 이것은 그릇된 신앙사상을 강물처럼 물을 많이 토해내어 올바른 신앙에 물을 흐리게 해서 성모님을 공격하는 신학사상을 말하는 것인데 성모님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가지고 계셔서 광야로 유유히 피할 수 있어 공격을 당할 분도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고 하였고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땅으로 휩쓸어 내던졌다고 하였으니까 즉 일곱 머리는 칠성사에 열 뿔은 십계명에 거스려 뿔을 치켜올리는 것을 말하고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은 즉 선망의 대상인 사제들의 권위가 삼분의 일이 땅에 떨어졌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용과의 전쟁은 뱀보다 무섭고 더 치열한 전투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묵시 12장 17절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를 위해서 증언하는 일에 충성스러운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싸우려고’ 18절 ‘떠나가 바닷가에 섰습니다.’ 하였듯이 이것은 우리 신앙인들과 영신적으로 싸움을 벌인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신의 전쟁을 치르면서 구원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144,000명이 부른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열심한 신자 분들은 십계명과 7덕(신덕, 망덕, 애덕, 지덕, 의덕, 용덕, 절덕)을 잘 지켜 가시려고 노력하시지만 사제․수도자들은 복음삼덕(정결, 청빈, 순명)을 더 서원하는데 사제․수도자들의 복음삼덕도 절덕에 포함되는 덕으로써 절덕인 정결을 잘 지키면 묵시 14장 4절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사람들이며 숫총각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다닙니다.’ 하였듯이 어린 양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 가는 그런 기분이 자연히 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청빈은 최대의 부다.’ 하였듯이 청빈덕을 잘 지키면 마음의 부유함을 자연히 느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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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는 것이고 ‘순명은 최대의 자유다.’ 라고 하였듯이 순명하면 자유를 자연히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수도자가 장상한테 순명 안하면 그 즉시 번뇌가 생기고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덕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태 19장 21절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모든 것을 버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셨던 사제․수도성소로 부르시는 덕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 19장 27-30절을 보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고 하였듯이 그리고 예수님께서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듯이 그리고 수도회의 서원 예식서에도 보면 ‘완전한 애덕을 추구할 목적으로, 하느님께 정결과 청빈과 순명의 서원을 바라며’ 이것이 서원의 핵심이니까 완덕의 경지는 7덕(신덕, 망덕, 애덕, 지덕, 의덕, 용덕, 절덕)을 지키는 것인데 즉 정결, 청빈, 순명은 절덕에 포함되는 덕으로써 정결, 청빈, 순명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덕행의 종류로는 일곱가지 밖에는 없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절덕만 잘 닦아도 즉 순종하는 덕, 언어를 잘 다스리는 덕, 어린애 같이 자신이 겸손해지는 덕, 이러한 몇가지만 잘 닦아도 성인은 쉽사리 못된다고 하더라도 교리상 완덕을 이루는 사람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서 ‘언어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온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라고 하였듯이 언어를 잘 다스리는 것, 겸손해지는 것, 이러한 것이 불가능하단 말입니까? 줄타는 기술도 우리가 계속 배운다면 1년, 2년만 배우면 마음대로 줄을 탈 수가 있지 않습니까? 밥하는 기술도 3년이면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도사가 된다고 하고 도자기 굽는 기술도 요즈음 같아서는 5년이면 되고 운전도 10년, 20년이면 운전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운전경력 20년 만에 운전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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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를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것을 해내면 덕행을 이루는 것이고, 나를 이기는 것이고,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몇가지만 노력하면 어느 때인가 尋牛圖에서처럼 소의 고삐를 잡듯이 뭔가가 마음에 잡히고 소를 마음대로 몰고 가듯이 나 자신을 잘 다스릴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계명을 지키고 교리대로 사는 길이 정결, 청빈, 순명하고 언어를 잘 다스리는 길이 자유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죄의 올무에서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새가 날아가듯 우리 인간의 죄가 끝나버림을 자유를 느끼고 살아나는 체험인 것입니다. 아무튼 죄를 짓지 않으면 자유를 느끼고 마음으로 훨~ 훨~ 자유의 길이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성무일도 시편 124장 7-8절 ‘올무는 끊어지고 마치 우리 영혼은 새와도 같이 사냥꾼의 올무를 벗어났도다.’ 하는 기도를 읊으면서 내가 새를 놓친듯 올무가 끊어짐을 갑자기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새를 놓친듯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새를 붙들려고 하다가 성무일도서를 떨어뜨릴 뻔 하였습니다. 즉 우리의 영혼은 마치 새와도 같이 자유스러이 죄의 올무를 벗어남을 느끼는 것입니다. 올무는 끊어지고 우리는 살았도다. 즉 죄를 지음으로 번뇌로 매이게 되는 나의 불안이 이제는 끝나 버림을 갑자기 체험하고 자유를 느끼며 살아났다는 애깁니다. 그런데 어떤 성인전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새는 아주 가느다란 실이 매어져 있어도 날아갈 수가 없다고 하였던데 그 말은 이론적으로도 맞는 말이며 우리는 그 말을 잘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도 하루에 일곱 번 넘어진다(잠언 24장 16절 참조)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아직 죄의 습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직 자유스럽지 못한 것도 현실이지만 그런데도 이런 체험이 우리에게는 자유를 느끼게 하는 큰 기쁨의 체험이 되는 것도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덕을 닦아가다보면 고기잡는 어장이 (V)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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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되어 있듯이 어느 정도 좁혀진 구멍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 좁혀진 꼭지점에서야 아무리 작은 고기라도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다 잘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꼭지점에서야 고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얼마나 더 지키기가 쉽습니까? 여기서부터 우리는 영성의 맛을 들이게도 되는 것이고 성인은 쉽사리 못된다고 하더라도 교리상 완덕을 추구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완덕의 길은 대 데레사 성녀가 ‘영혼의 성’이라는 책에서 말씀 하셨듯이 우리 안에 하느님이 임금으로 계시는 영혼의 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은 우리나라 말로 청와대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 안의 영혼의 성도 청와대처럼 방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의 영혼의 성은 칠궁방으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인데 일곱은 완전히 거룩한 숫자이니까 하느님이 계시는 방으로 비유하자면 칠궁방은 바로 여러방들 중에서도 하느님이 계시는 방인 것입니다.
좁은 문, 어둔 밤, 긴-터널, 칠층사다리 등은 모두가 칠궁방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들을 풀이한 것들입니다. 아가서 3장 4절에서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던 / 바로 이 방으로 들어왔다네’ 하는 말도 칠궁방을 말하는 다 같은 말인 것입니다. 이렇듯 완덕이란 말이 있듯이 사람은 완덕을 이루기 전에는 완전한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도 다 같은 마음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알고보면 덕행이 없는 세상이라면 세상이 얼마나 공허하고 나 자신도 덕행 하나 없으면 얼마나 공허하겠습니까? 아무리 유다스 같은 사람이라도 너는 죽을 때 까지 덕행의 열매 하나 맺지 못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라 한다면 아주 실망스러워 하고 고통스러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마태 21장 19절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기에 다행이지 사람을 개인적으로 그렇게 열매 맺지 못할 것이라고 일대일로 저주하셨다면 얼마나 처참 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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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병을 치유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우리 인간을 저주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못 따 잡수셔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 열매를 맺으라고 지혜롭게도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묵시 22장 1-2절 ‘생명수의 강’은 바로 세상에서 농사짓는 법칙을 비유하여 우리 영혼의 농사를 잘 짓기를 비유하신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가서 2장 6-7절 ‘왼팔을 베게 하시고, / 오른팔로 이 몸 안아 주시네. / 이 사랑이 잦아들기까지 / 제발 방해하지 말아다오.’ 하였듯이 즉 하느님께서 영신적으로 우리를 끌어 안아 주시면 만사땡인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아가서 8장 3-4절에서도 ‘왼팔을 베게 하시고 / 오른팔로 이 몸 안아 주시네. /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 이 사랑이 잦아 들기까지 / 제발 방해하지 말아 다오. / 흔들어 깨우지 말아 다오.’하고 반복하였듯이 이 사랑이 잦아 들기까지는 각자가 세월이 얼마나 흘러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은 세상에서 결혼하는 이치를 비유하여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칠궁방에 드는 것을 비유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성요한의 어둔 밤 싯귀 5째 노래에서 ‘굄하는 이와 굄받는 이를 / 님과 한몸 되어버린 괴이는 이를 / 한데 아우른 아하, 밤이여’ 하였듯이 또 7째 노래에서 ‘고요한 당신의 손으로 / 자리게 내 목을 안아주시니 / 일체 나의 감각은 끊어졌어라’ 하였듯이 하느님과 합일함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가서는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인 것입니다. 솔로몬은 꿈에 지혜를 얻었지만 우리는 생시에도 지혜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지혜서, 집회서, 잠언서를 쓴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들의 삶 속에서 지혜가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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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썼는지 지혜를 어떻게 찾아왔는지 지혜를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혜가 사는 곳에 말뚝을 박고 그 곁을 떠나지 말아라’ ‘지혜를 찾아다니기를 아내를 얻으려고 다니듯이 찾아 다녀라’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아름다움 보다도 더 사랑하였다’ 라는 이러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지혜를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혜를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애인을 사랑해야지 그 애인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지혜는 선을 거스리지 않는 것입니다. 선을 거스리고 나는 지혜롭다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이미 철학을 완성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철학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인생의 의미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상해천주교요리 상권 1 (문)에서 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답)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하였듯이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얻은 즉 인생의 목적을 달성한 성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바오로사도께서 골로사이 2장 8절에서 ‘여러분은 헛된 철학의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세속의 원리를 기초로 인간이 만들어서 전해 준 것이지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것은 아닙니다.’ 하고 철학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지 않습니까? 그리고「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하였는데 영혼에 대해서는 ‘상해천주교요리’ 상권 34 에서 영혼은 무엇이뇨? 영혼은 신령하여 불사 불멸하는 체(體)니 육신과 합하여 그 생명이 되느니라. 의 해설에 보면「사람이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될 때 그 영혼은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창조된다.」하였듯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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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묵상해 보면 영혼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풀리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시편 4장 4절에서 ‘치를 떨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였듯이 치를 떨며 다시는 죄를 짓지 맙시다. 그리고 이웃을 용서합시다. 이웃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화해이며 용서인 것입니다. 기구한 사연 축적되어 그 무엇 삶인 것을 누가 삶을 평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성품을 타고 났는지, 혈액형은 무엇이며 어떤 가정환경 속에서 살아왔는지, 영적 성숙과정 등을 잘 알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다 미완성이고 성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불완전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밖에는 모든 것이 다 불완전하다는 점을 알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다 고쳐주라는 완덕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루가 19장 8절 “주님, 저는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 하였듯이 네배로 갚고 싶은 죄들을 이제는 짓지 말고 자캐오의 심정을 통하여 버립시다. 그리고 괜찮은 수사님들 수녀님들, 괜찮은 며느님이고 시어머님이셨구나! 하고 마태 10장 36절 ‘네 집안 식구가 바로 네 원수다’ 하는 올무에서 벗어납시다. 이러한 것이 바로 죄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이러한 것이 바로 자유로운 삶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것에 승리하고 묵시 14장 3절 ‘그 십 사만 사천 명은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하였듯이 이제는 144,000명이 부른 승리의 노래를 부릅시다. 묵시 21장 22절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러니까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예수님이 그 도성의 성전이고 묵시 21장 14절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 두 주춧돌이 있었는데 그 주춧돌에는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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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하였듯이 사도들이 이미 그 도성의 성벽의 주춧돌이 되었듯이 또 묵시 21장 16절 구약시대 때 뽑힌 군사들을 비유하는 ‘만 이천 스타디온’이라는 도성의 넓이나 묵시 21장 17절 ‘또 그가 성벽을 재어 보았더니 사람의 자로 백 사십 사 척이었습니다. 이 자는 천사의 자이기도 했습니다.’ 하였듯이 묵시 21장 9-21절 “이리 오너라. 어린 양의 아내인 그 신부를 너에게 보여주겠다.” 하였듯이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 성벽을 비유로 한 144척×1,000=144,000척인 그 도성의 성벽의 주춧돌이 또는 성벽이 되어지는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산상수훈을 노래합시다. 내가 하늘나라를 얻으려고 싸웠는데 하늘나라가 누구의 나라가 되겠습니까? 싸우지도 않은 사람들의 나라가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대한민국을 위해서 싸우면 대한민국이 우리의 나라가 되지 누구의 나라가 되겠습니까? 마태 5장 6절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즉 만족을 얻으려고 얼마나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르도록 옳게 살아왔겠습니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르도록 옳게 살아왔는데 어찌 그들이 만족을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하늘나라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즉 하느님을 위해서 박해를 달게 받는데 우리를 세상에 내어 놓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런 사람들을 사돈네 팔촌쯤 될 것이다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진복팔단의 조건은 신덕, 망덕, 애덕, 지덕, 의덕, 용덕, 절덕을 지키는 완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이마에 죄의 낙인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하느님의 낙인인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삶을 살아갑시다. 묵시 15장 2-3절 ‘그 수정바다 위에는 그 짐승과 그의 우상과 숫자를 가지고 이름을 나타냈던 그자를 이긴’ 즉 666을 이긴 사람들이 승리의 노래를 부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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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하였지 않습니까? 666은 무엇이겠습니까? 묵시 13장 18절 ‘바로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영리한 사람은 그 짐승을 가리키는 숫자를 풀이해 보십시오. 그 숫자는 사람의 이름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그 수는 육백 육십 육입니다.’ 하였듯이 이 말씀은 바로 묵시 13장 18절 바로 여기에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 이 숫자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되어 왔는데 가장 무난한 해석은 ‘네로황제’일 것이다. ‘네로’라는 단어의 각 알파벳의 숫자를 따지면 666이 된다.
라 틴 어 : NERON(네로)
N=50 E=6 R=500 O=60 N=50
N(50) + E(6) + R(500) + O(60) + N(50) = 666
히브리어 : Caesar Neron(네로황제)
Cae sa r ne r o n
100 + 60 + 200 50 + 200 + 6 + 50 = 666
360 + 306
묵시록은 아시아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일들이지만 특히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서 묵시 3장 8-9절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네 힘은 비록 미약하지만 너는 내 말을 잘 지켰으며 나를 모른다고 부인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너를 위해서 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수 없다. 자칭 유다인 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네 앞에 나와 네 발 앞에 엎드려 너를 경배하게 하겠다.”라는 이 말씀은 즉 “그리고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수 없다.”면 성인이 되게 이끌어 주겠다는 말씀인 것인데 “네 힘은 비록 미약하지만 너는 내 말을 잘 지켰으며 나를 모른다고 부인한 일이 없다.” 즉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하느님의 뜻과 대치되는 그릇된 신앙사상을 묵인하거나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고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그런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이실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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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요한 14장 15-26절 ‘성령의 약속’ 편에서 15-17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 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즉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에 대한 말씀으로써 23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하셨듯이 묵시 3장 8-12절 “너는 내 말을 잘 지켰으며 나를 모른다고 부인한 일이 없다.” “참고 견디라는 내 명령을 너는 잘 지켰다.” “나는 내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성의 이름, 곧 하늘에서 내 하느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로운 이름을 그 이기는 자 위에 새기겠다.” 하신 말씀처럼 새로운 일이 이 재림시대에 이루어질 말씀으로써 바로 협조자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이루실 일로써 예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새로운 일을 이루실 그런 사람이라면 요한 14장 23절 말씀을 묵시 3장 8-12절 말씀처럼 살으시고, 힘있게 가르치시고, 또 쓰신 분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인데…???
즈가리야 12장 9-11절 ‘그 날이 오면, 그들은 내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한 일을 외아들이나 맏아들이라도 잃은 듯이 슬퍼하며 곡하리라.’ ‘그 날이 오면, 므기또 골짜기 하닷림몬에서처럼 예루살렘에 곡성이 터질 것이다.’ 라고 하였듯이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즈가리야 12장에서 14장까지를 보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하고 14번씩이나 말했듯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날은 와버렸는데 또다시 이번에는 당신께서 직접 요한 14장 20절에서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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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요한 16장 23절에서 “그 날이 오면 너희가 나에게 물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또 마태 24장 36절에서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또 마태 25장 10-13절에서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잠겨졌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고 “그 날이 오면” “그 날과 그 시간”이라는 말씀을 다시 여러번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재림으로써 “그 날과 그 시간이 오면” 즉 다니엘 7장 13절. 마태 24장 30절. 마태 26장 64절. 사도행전 1장 11절처럼 또 특히 묵시 10-12장을 배경으로 묵시 8장 1절 ‘약 반 시간 동안 침묵’이 흐른 중요한 일로써 묵시 10장 7절에서 ‘이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터인데 그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해 주신 대로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이 완성될 것이다.’ 하였듯이 묵시 1장 7절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 땅 위에서는 모든 민족이 /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하였듯이 즉 묵시 4장 6-8절에서 (이사야 6장 1-13절, 7장 10-17절 참조) 임마누엘 예언과 같은 말씀을 다시 하였듯이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지만 그 날과 그 시간의 기적은 모두가 볼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께서 모두가 잠잘 때 기적을 하시겠습니까? 어떻게든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의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한 죄를 뉘우치며 통회하는 일이 예수님시대와 흡사하게 다시 실현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마태 24장 36-44절 “그 날과 그 시간”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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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살아 있을 때에 데려가는 특별한 내용과 묵시 11장 7-12절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그 짐승이 올라 와서 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그들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이며 상징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에집트라고도 합니다.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시체를 구경할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교환할 것입니다. 이 두 예언자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괴로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사흘 반이 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셔서 그들은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 두 예언자는 자기들을 향해서 “이리로 올라 오너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서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예언자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갔습니다.’ 즉 죽고 사흘 반이 지나서 살려서 데려가는 내용과 즉 살아서와 죽어서 살려서와 내용이 다르면서도 일치하는 말씀으로써 즉 살아서 데려 갈 사람도 새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일로써 즉 공심판 때 깨어있으면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말도 되지만 즉 천년왕국을 튼튼히 세우시려고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은 깨어있다고 굳이 살아서 데려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즉 하느님께서 모세의 시종인 별로 특별한 신분도 아닌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택하셨듯이 또 엘리야의 제자로 엘리사를 택하셨듯이 물론 누구든지 깨어있는 사람을 전제로 하시겠지만 천년왕국을 믿는 사람 중에서 누구든지를 택하셔서 천년왕국을 튼튼히 세우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듯이 결국에는 이미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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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어야 하겠지만
또 같은 내용으로써 마태 25장 10-13절 “그 날과 그 시간”에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즉 “그 날과 그 시간”이 지나서는 “문은 잠겨졌다.”는 즉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 날과 그 시간”이 지나서는 즉 기적이 끝나서는 문은 잠겨지는 이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활속에서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리하여 묵시 20장 1-3절 ‘나는 또 한 천사가 끝없이 깊은 구렁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늙은 뱀이며 악마이며 사탄인 그 용을 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끝없이 깊은 구렁에 던져 가둔 다음 그 위에다 봉인을 하여 천 년이 끝나기까지는 나라들을 현혹시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탄은 그 뒤에 잠시 동안 풀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듯이 묵시록 6-8장의 일곱 봉인을 떼는 것은 즉 묵시 20장 2-3절의 사탄이 갇히는 봉인을 반대로 하는 것으로써 사탄이 갇히고 봉인이 시작되는 천년왕국의 시대인 새 천년의 시대는 열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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