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그날 천이 나를 동행해주었다.
해림시내를 벗어난 택시가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덜컹거리자 천은 어느결에 나의 손을 잡았다. 나도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맞잡고 있노라니 그의 손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오르고 있었다. "저기 저 산이 보이죠? 저 산을 에돌아 서남쪽으로 쭉 가면 바로 신안진이에요."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푸른 들판 한끝에 련면히 기복을 이룬 산봉우리들과 산기슭을 휘우듬히 감싸고 있을 산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택시는 그러나 그 산길을 향해 달리지 않고 멀리 바라보이는 산시로 내달렸다. 그날 우리의 목적지는 신안진이 아니라 산시진이였던것이다.
산시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다. 1970년대에 한 퇀장급 제대군인이 목단강지구내에서 자신이 가고싶은 곳을 선택하게 되였는데 산시(山市)를 택했다. 그런데 가족까지 거느리고 산시역에 내리고보니 산시는 결코 그 이름에 걸맞는 상상속의 도시가 아닌, 자그만한 시가지였다.
그때 그 제대군인은 알고 있었을가. 대한독립군총사령관 김좌진장군이 바로 이곳 산시에 본거지를 두고 항일독립운동을 지도하다가 생을 마감했다는것을. 그러나 청산리대첩이후 밀산, 목릉, 녕안 등 곳을 거쳐 1927년9월에 신민부 본부를 산시로 옮겨오고 1930년1월 24일 피살되기전까지 김좌진장군의 10년 행적에 대해 나도 사실 아는게 별로 없다. 다만 북만주 곳곳에서 둔전양병과 교육계몽에 주력했던 김장군께서 한(韩)족총련합회를 설립하고 주석으로 취임했으며 성동사관학교, 해림신창학교를 비롯해 50여개소 학교를 설립했다는 정도로 료해하고 있을뿐이다. 한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해 둘러본 산시는 여전히 작은 역전마을이였다. 역전에서 불과 10분도 안걸려 우리는 좁은 골목길 한끝에 위치한 김좌진장군 유적지를 찾아갈수 있었다. 길건너편 벽돌집에 살고있다는 수더분한 한족아줌마가 괴춤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검은 철제대문의 빗장을 풀었다. "어서 오게나!" 둔중한 철제대문을 열어제끼는 순간, 걸걸한 목소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나는 어리벙벙한채 주위를 두리거번렸다. 시골 농가처럼 꾸며졌지만 여느 농가보다 훨씬 너른 마당 한가운데 김좌진장군님이 계셨다. 물론 흰대리석 흉상이였지만 너무 고독하셨을 장군님께서 어서 오라고 말씀하셨나보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장군님 앞에 오래도록 서있었다. 천도 내 곁에 묵묵히 서있었다. 검은 대리석좌대우에 모셔진 한복차림의 장군님께서 멀리 하늘가를 바라보고 계셨고 어깨까지 높게 자란 푸른솔 너머로 장군님께서 동족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셨던 정미소의 곰삭은 벼짚이엉이 바라보였다.
홀연간 흰대리석동상 뒤면 어딘가에서 표범무늬의 금빛 나비 한쌍이 날아오르더니 푸른솔 주위를 배회하다가 솔나무아래 화단우를 하늘하늘 날아다녔다. 그 나비한테서 눈길을 떼지 못하던 천이 문득 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 나의 팔을 잡으며 나의 귀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저 나비가 참 이쁘죠? 금빛어리표범나비라고 깊은 산속에 서식하는 희귀종이거든요. 사진으로만 보았었는데 오늘 여기서 이렇게 실물을 보게 될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못했어요…참 신기하죠? " "그래 정말 신기하구나. 혹시… 장군님의 혼이 환생하신건 아닐가?"
"장군님의……혼? 그렇게 상상하셔도 무방하겠지만, 그런데 왜 한마리가 아닌 한쌍일가요? " "그건 그때 장군님곁에 네처럼 아름다운 녀자가 한분 계셨기때문이야. 두 분의 혼이 함께 환생하셨나봐." 그 시절 장군님곁에는 나의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녀자가 한분 있었다. '장군의 아들'이라는 한국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협객 김두한의 생모가 아닌, 그리고 중국조선족사회에서 '장군의 딸'로 회자되였던 김강석의 생모도 아닌 라혜국(罗惠国)이라는 녀성. 그녀는 1923년 22세때 당시 녕고탑이라고 불렀던 발해진에서 김좌진장군과 결혼했다. 자신보다 열두살 우인 김좌진장군에게 부인이 고국에 살고있다는 사실을 모를리 없었지만 역시 독립지사였던 아버지의 허을 받아 결연히 김장군과 결합했다고 한다.
"한 녀성이기 이전에 조국광복의 동지라고 생각하고 내 스스로가 장군의 뒤바라지를 나섰던것이 그분의 안해가 된 동기였지요." 1986년 8월15일 경향신문 기사에 나오는 라혜국녀사의 말씀이다. "우리는 만주중동선의 작은 기차정거장인 산시에서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장군은 그날 기계 시운전을 보신다고 아침 일찌기 집을 나가셨어요. 기계에 달린 체에 구멍이 나서 그걸 손보고 계시는데 그자가 총질을 해서 그만…그자는 산시에서 함께 살며 쪽제비사냥으로 생활하고 있어서 몇번 본적이 있어요."
1977년 2월 28일 동아일보 기사에 적힌 말씀이다. 라혜국녀사의 산시에 대한 기억은 이처럼 생생한 세부로 돼있어 후날 기사를 읽는 나에게 한결 신선하게 다가온다. "장군은 별세 전날밤에도 썩은 좁쌀을 쌀벌레까지도 버리지않고 드셨어요. 저가 너무 송구스러워 사과를 드렸더니 그인 그런건 광복이 되여 본국에 돌아가서 가리자고 너그럽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라혜국녀사는 장군과 함께 광복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장군과 낳아 기른 어린 두 남매만 이끌고 귀국했다. 장군이 피살된 이듬해인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나고서였다. 아들 김철한을 김좌진장군의 차남으로 호적에 올렸을뿐 녀사는 삯바늘질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먼 후날 1984년에 그는 50여년전 신발속에 숨겨와 간직했던 김장군장례식 추도사 (弔辭)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한다. 그날 산시에서 나는 천에게 나한테도 산시에 대한 처절한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오늘 산시에 처음 온다면서요?" 천이 의아해서 물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가족에 그런 기억이 있는거야…1942년 겨울 우리 아버지께서 열다섯 소년때 조선에서 만주땅으로 솔가이주하며 산시를 다녀갔었거든." 저녁무렵 산시역에 내린 부친께서 세살짜리, 열살짜리 남동생과 여섯살짜리 녀동생 그리고 임신중이던 엄마까지 이끌고 엄동설한에 40리 밤길을 걸어 신안진에 있는 큰집에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으며 나는 그럴수 있냐고 믿어지질 않았다. 그러나 부친의 이야기중 하나의 세부가 나로 하여금 그 진실성을 확신하게 했다. "신안진 7반에 도착하니 새벽이였어. 그런데 눈사람처럼 큰집 마당에 줄 늘어선 우리 다섯을 보더니 큰아버지가 나한테 호통부터 치시는거야, '이 눔 자식이 엄마 동생들 다 얼어죽일라고 이 밤길을 걸어왔냐?' 하고." 산시를 다녀온지도 어언 10년이 다가온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서도 내내 나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던 천은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였단다. 세월은 그렇게 무정하게 흐르고 우리의 인생 또한 그토록 무상한것 같다. 다행히 지난 삶 그속에는 함께 한 사람만이 공유할수 있는 애틋한 세부가 남아있다. 영웅호걸이든 범상한 속인이든 가장 진실한 기억은 바로 그 세부속에 남아있고 부각되는지 모를 일이다. 력사 또한 그런 세부로 기억되는게 아닐가.
후날 아주 먼 후날 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한쌍의 금빛어리표범나비로 환생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