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서 만난 사람들/정동윤
혹독한 추위에
바깥 눈치만 살피려니
온몸에 좀이 쑤셔
두툼한 방한 장비 챙겨
문 닫은 힐튼 호텔 위로
천천히 올라간다
북한산 보현봉을 향해
말 타고 칼을 뽑아
아직 수복하지 못한 반쪽
북을 향해 진격하는
통일 신라의 영웅
김유신 장군께 먼저 경례하고
백범 광장으로 뛰어올라
자애롭게 미소 짓는
이시영 부통령께도
해방 조국의 발전과
만주 벌판의 투쟁에 감사하며
늦은 인사드리고
아직도 문화 강국을 향한
연설을 이어가고 계신
김구 선생의 외침에
눈 뒤집어 쓴 소나무도
늘어난 광장의 비둘기 떼도
백범의 간절함에 귀 기울인다
한량도성길 중에
유일하게 누워있는 도성길
성이 누우면 길이 되는 곳에
태극기 웅켜잡고 서 있는
안중근 의사의 기개가
세워놓은 바위마다 박혀있다
남산 도서관으로 앞에는
내가 좋아하는 두 분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
두 분은 시대를 초월하여
책과 후학을 보살피시느라
몇 년째 이곳을 지키고 계십니다
조금 위쪽 언덕 마당엔
김소월의 나지막한 시비가 있고
시비엔 '산유화'가 적혀있는데
생활고에 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32 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지만
앞 큰 길 이름은 소월길로 남아있다
남산 안쪽으로 들어서면
한양도성 전시관으로 연중무휴
일제의 신사, 이승만 대통령 동상
그리고 열대 식물원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옛 도성의 무게 앞에서
모두 역사 속으로 자릴 옮겼다
팔각정 올려다보며
북쪽 계단으로 내려서서
산책로로 나아가면
꽃밭과 나무 울타리로 안에
청록파 조지훈 시비가 보이고
시 '파초우'가 새겨져 있다
다시 산책로를 걷다 보면
왼쪽의 오솔길 지나 내려가면
이회영 기념관이 나오며
이 일대는 일제 통감부 때부터
옛 안기부 지역으로 바뀌면서
어둠의 권력이 남긴 흔적이 보인다.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느티나무 쪽으로 돌아서면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 흉상이
고뇌하는 모습으로 묵상하고
'전쟁과 평화' 비롯한 수많은 역작이
그의 악필에서 흘러나왔다고 한다
옛 안기부 지역을 관통하여
제5 별관 언덕으로 나가면
다시 산책로와 합류하는데
여유롭게 한참 걷다 보면
동국대 가는 안내 표시가 보인다
그 길로 들어서면 동국대 교정
교정의 가장자리 따라 직진하면
넓은 광장엔 불교적 상징이 즐비하고
그 끝의 만해 광장에는
한용운의 대표 시 '님의 침묵'의
시비가 웅장하게 서 있으니
읽지 않을 수가 없다
정문 쪽으로 내려가 밖으로 나서면
바로 오른쪽에 이 대학 출신의
시인 신경림 시비가 비켜서 있는데
'목계장터'가 새겨져 있다
스님 출신인 고은 시인을 보좌하여
판문점을 통과하려는 결기도 보였다
조지훈 한용운 고은 신경림 모두
불교와 인연 깊은 문학인이다
문학 정신과 예술가의 자유로움을
착각하지 말라고 충고할 듯한
이웃 사명대사의 동상은
장충단을 그윽하게 내려봅니다
을미사변으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위문하려 세운 장충단을
일제는 공원으로 폄하하였는데
위 쪽의 이준 열사 동상을 지나면서
'의사'와 '열사'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며 지나갑니다
다시 국립극장으로 올라가
그곳 구내식당에서
가성비 좋은 점심을 챙기고
남산 산책길 크게 휘돌아 나오니
2만 보를 훌쩍 넘겼고
몸도 마음도 쾌청, 날씨도 온화함.
아, 귀갓길에
어떤 여류 시인이
남산 쉼터에서 친구 둘과
자신의 시집을 올올이 풀어내며
동영상으로 담아가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 시에 귀 기울이다
흥에 겨워 시 한 편 데려오는
살아있는 사람들과 만나는
이런 날의 남산은
그냥 시가 된다
첫댓글 사진 작가 음유시인 정동윤 선생님, 오래 오래 건강하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