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의지해야 할 지혜와 능력” 頼るべき知恵と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2월 4일이 절기상으로 입춘이었습니다만, 그 날 아침이 되자, 드디어 시작 되었습니다. 바로 꽃가루 알러지 증상입니다. 절기에
맞게 꽃가루가 날리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절기에 맞게 제 몸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전에도 좀 코가 근질근질
거리기 시작했었거든요. 그래서 감기기운인가 했었는데, 아, 이제 확신이 왔습니다. 틀림없어요. 바로 그 증상이에요.
꽃가루 알러지를 앓기 시작한 게 제가 2015년 3월 일본에 오면서부터인데, 그러니까 이제 꽃가루 알러지도 5년 차가 되는 셈이지요.
그러다 보니 이제 좀 감기와 꽃가루 알러지의 분별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본래 코가 좀 신통치 않아서 맨날 코가 막히고
찌륵찌륵 거리기도 합니다만, 이 꽃가루 알러지 때는 좀 달라요. 뭐가 다르냐 하면 바로 그 냄새가 납니다.
이 냄새가 꽃가루 자체의 냄새인지 아니면 제 코 안에서 꽃가루 알러지 반응이 일어남으로 인한 냄새인지,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합니다만, 아무튼 그 꽃가루 알러지 증세 특유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년 같았으면 그래도 좀 더 버텨보기도 했겠습니다만, 특히 지난 해에는 참 고생이 심했기 때문에 올해에는 좀 겁이 나서, 비교적 일찍
병원을 찾고는 처방을 받았습니다.
그 알러지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몸에 어떤 안 좋은 균이나 물질 같은 것이 들어왔을 때, 우리 몸은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몸 바깥으로 몰아내려고 하는 증상, 말하자면 대단히 뛰어난 작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기침이나 재채기, 콧물
같은 것이 막 나오는 것도, 몸 속에 들어온 안 좋은 것을 바깥으로 내보내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러지라고 하면 꽃가루나 아니면 특정 약에 대한 알러지도 있겠습니다만, 음식에 대한 알러지도 상당히 많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달걀 알러지나 우유 알러지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달걀이나 우유 같은 것은 본래 사람한테 있어서 해로운 게 아니지요. 해롭기는커녕 열반적으로 영양가가 높은 음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바로 달걀이나 우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한테 있어서는 이것이 전혀 해롭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해로운 물질로
몸이 판단해서 막 바깥으로 내보내려고 하는 증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그러다 보니 몸 여기저기에 이상이 일어나기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기 쉬운가요? 믿음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전혀
불편함이 없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항상 은혜와 감사와 찬송이 넘치나요? 그렇다면 물론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어떨 때보면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대단히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일요일에, 정말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꿀맛 같은 달콤한 일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예배만 드리나요? 노는 날에 그렇게 수고를 했으면
돈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십일조, 감사헌금, 주일헌금까지 내야 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제가 한국에서 찬양대를 섬길 때에는 예배 시작 몇 시간 전까지 가서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린
다음에는 또 연습을 해야 했고, 또 주일만이 아니라 금요일에도 나와서 연습을 해야 해요. 가끔 보면 어떤 분은 또 찬양대를 하면
사례비를 받는 줄 아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물론 지휘자님이나 악기를 연주하시는 분들에게는 사례비가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일반
대원들한테 사례비는 무슨 사례비에요. 오히려 매달 운영회비를 내면서 섬깁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를 보면 그것만이 아니지요. 구역 모임도 있고 여러 가지 봉사활동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게 정상이에요? 적어도 인간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정상이 아닙니다. 남들은 불금이다 주말이다 일요일이다 하면서 재미있게
노는데, 이건 뭐 돈 바쳐, 시간 바쳐, 수고도 바치고, 정말 해야 할 일들이 이만 저만이 아니지요.
누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요. 아~ 그래도 기쁨으로 섬기고 은혜로 섬기고 감사로 섬기고……아, 물론 그래요. 좋은 말이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교회 모임이라고 해서, 다툼이 없어요? 안 좋은 일들이 없어요? 없긴요. 왜 없습니까. 성가대도
그렇고 구역도 그렇고 어느 조직이든지 간에 크고 작은 다툼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가 거룩해요? 거룩한 것은 하나님이 거룩한 것이죠. 예수님이 거룩한 것이죠. 성령님이 거룩한 것이죠. 조금만 알고 보면 사실
목사나 장로님이나 권사님이나 집사님이나 평신도나, 그리고 주일학교 아이들이나 다 똑같습니다. 굳이 따지고 본다면 주일학교 유년부
아이들이 그나마 좀 나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저도 평신도 일 때 정말 교회에 가기 싫어질 때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는 것은 고사하고, 정말 세상에 살다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여러 모로 좀 불편할 때도 있었습니다.
정말 참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면 참 쉬운데, 눈 딱 감고 내 생각대로 하면 더 잘 될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같은 경우에도 보면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 믿었다면 어떤 인생을 보내고 있을까.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편안한 생활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겠습니다만,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알러지 증상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해요. 너무나도 좋은 것이에요. 그냥 좋은 것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25절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ユダヤ人はしるしを要求し、ギリシア人は知恵を追求します。
しかし、私たちは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を宣べ伝えます。ユダヤ人にとってはつまずき、異邦人にとっては愚かなことですが、
ユダヤ人であってもギリシア人であっても、召された者たちにとっては、神の力、神の知恵であるキリストです。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오늘 말씀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뭐냐 하면 유대인들은
무엇이든지 놀라운 일, 신기한 일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2장 38절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そのとき、律法学者、パリサイ人のうちの何人かがイエスに「先生、あなたからしるしを見せていただきたい」と言った。
마태복음 16장 1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パリサイ人たちやサドカイ人たちが、イエスを試そうと近づいて来て、天からのしるしを見せてほしいと求めた。
누가복음 11장 16절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また、ほかの者たちはイエスを試みようとして、天からのしるしを要求した。
이게 뭐겠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야? 그럼 뭐 신기한 걸 보여줘 봐. 그럼 내가 믿을게.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유대인들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던 내용이지만, 그 때까지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연구한 율법학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누추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는, 우리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못했던 것이지요.
물론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표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출애굽기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홍해를 가르시기도 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40년 동안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사막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도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적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 난 이렇게 신기한 일을 행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나를 믿어.”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그러셨던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런 것은 싸구려 점쟁이나 사이비 종교집단들이 하는 속임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표적을 행하신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타내시기 위해서 홍해를
가르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표적은 모두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완성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1960년대, 당시 미국과 소련은 우주개발에 대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1962년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텍사스 라이스 대학에서의
연설에서,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불행히도 그는 그 이듬해인 1963년에 흉탄에 맞아 쓰러지고 맙니다만, 그러나 미국은 그의 약속대로 1960년대가 끝나기 전인
1969년 7월에 유인 달 착륙을 실행하고, 그리고 모두를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는 놀라운 일을 달성하게 됩니다.
1960년대라고 하면 정말 옛날 일입니다. 그 로켓에는 컴퓨터가 탑재되어 있었습니다만, 일반 사람들은 컴퓨터라는 게 뭔지도 모를
시대였지요. 그 때 당시 아폴로 11호에 탑재되어 있던 컴퓨터 성능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스마트폰보다도 훨씬 떨어지는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 성능의 컴퓨터를 가지고 달에 무사히 착륙하고 돌아왔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하는 어떤 전문가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도 이 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혹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들 중에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인류가 달에 간 게 맞냐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은, 사실 그 때 달에 갔다는
것은 완전히 NASA, 미 항공우주국의 거짓말이고, 달에 착륙한 사진이나 영상은 어디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NASA에서 찍은 이런 영상, 저런 사진은 지구 밖 생물체인데,
NASA는 이걸 숨기고 있다……이런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NASA는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고 설명도 하고 그래왔습니다만, 2001년부터는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한
반박을 모두 중단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아무리 증거를 제시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도 안 믿을 사람들은 안 믿는다는
거죠.
지금까지 사람이 달에 착륙한 것은 1969년 아폴로 11호만이 아닙니다. 1969년 11월에 12호, 1971년 1월에 14호,
1971년 7월에 15호, 1972년 4월에 16호, 1972년 12월에 17호까지 총 6번이에요. 6번이나 사람은 달에 착륙을 하고
여러 조사들도 하고 돌멩이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50년 전에 사람이 달에 몇 번 씩이나 갔다 왔다고 하는
사실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6장 4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悪い、姦淫の時代はしるしを求めます。しかし、ヨナのしるしのほかには、しるしは与えられません。」こうしてイエスは彼らを残して去って行かれた。
너희들은 무슨 표적을 본다 하더라도 어차피 믿지를 못해. 그러니까 요나의 표적. 즉 이는 큰 물고기에 삼켜졌다가 사흘 만에 나온
요나처럼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게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죄 사함을
증명해주시고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를 모르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전하면, 제대로 믿을 생각도 없으면서 맨날 표적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면 대단히 불편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되면, 유대인 자신들은 구세주를 자기들 손으로 죽인 것이 되니 얼마나 받아들이기를 꺼려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헬라인은 어땠냐 하면, 헬라인은 요즘 말로 하자면 그리스인이지요. 현대 학문의 출발점이라고 하면 바로 그리스를 꼽을 수 있을
만큼, 그리스는 학문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그리스에의 필수학문이라고 하면 무엇이었을까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철학>이라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동양에서 4서라고 하면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서양에서의 4과라고 하면 천문학과 수론, 음악, 기하학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문법과 수사학과 변증론이 더해지고 해서 7과가 되는 것인데, 이처럼 그리스는 세상적인 학문이 상당히 발달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 마디로 수학……이라고 하면 무슨 문제를 수학 공식대로 풀어서 딱 답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어떤
수학자의 말에 의하면 그건 수학이 아니라 <산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수학은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증명>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중학교 때도 배우잖아요? 두 삼각형이 합동인 것을 증명하라, 닮은꼴인 것을 증명하라……그것이 바로 증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증명이 바로 이 그리스에서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흥미로운데,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따지기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완벽한 논리가 아니라면 좀처럼 납득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바로 이 증명, 말하자면 수학이나 논리학이
발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참 머리가 좋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렇게 논리석인 사람들한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시키냐 하는 것이죠. 이와 같이 세상 학문에 집착하는 사람들한테는 아무리 하나님의 이적을 보인다 한들, 마치
NASA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중에서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는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24절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ユダヤ人であってもギリシア人であっても、召された者たちにとっては、神の力、神の知恵であるキリストです。
여러분, 우리가 지금 예수남을 믿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해보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정답인 것
같아요? 국영수를 공부해보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하는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했어요? 아닙니다. 이는 세상적인 지식이나
학문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유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표적을 보여라, 기적을 행하라. 논리로 증명하라, 이치로 설명하라고 하지만, 세상적인 감정이나 지식에 얽매이게 되면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여도, 아무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설명을 해도 안 받아들이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동양인이건 서양인이건 간에 예수님의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세상적인 잣대로 생각한다면 이는 우리 몸 안에서 알러지 반응이 일어납니다. 자꾸 이를 거부하려고 해요. 그러나 복음을
세상적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 진정한 지혜와 진정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롭다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지혜로울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힘이 강하다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지혜롭고 누구보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 3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8장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우리 모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우리 앞에 막아 선다 하더라도, 모든 의심을 떨쳐 버리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싸워 넉넉히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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