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일상삼매(一相三昧)란 진여(眞如)의 세계는 차별이 없고 한결같은 모습을 한 하나의 본성, 하나의 모양이라고 보는 삼매를 말한다. 우리 심중에 모든 선악과 사량 분별을 없애고 오직 일원상(一圓相)과 같은 원만 청정한 마음을 기르자는 것이 일상삼매이니, 일상(一相)은 일원상의 약칭이다. 삼매는 입정(入定)의 상태를 말한다.
※일원상(一圓相)---선종에서, 완전한 깨달음이나 마음의 본래 모습을 표상하는 동그라미.
사바세계란 능히 인내하고 살아야하는 세계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결국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되기에 마음을 바꾸어서 살고자 한다면 살만한 세계이고 더 나아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이란 결국은 마음을 바꾸는 것이며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
중생들은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 속에 살고 있다. 많다 적다, 있다 없다, 더럽다 깨끗하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고통의 원인이 된다. 흔히 말하는 상대적 빈곤감도 이분법적 사고의 산물이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서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고 마음의 벽(이분법적 사고)을 깨나갈 때에 마음의 벽이 무너진 만큼 자유롭고 행복해질 것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다 걷어내고 마음의 벽이 온전히 다 무너져 너와 내가 없는 하나가 됐을 때를 일상삼매(一相三昧)라고 한다. 그리하여 나를 보나, 너를 보나, 또는 산을 보나, 물을 보나, 또는 미움을 보나, 무엇을 보나, 모두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이것도 역시 제법의 실상이구나, 이와 같이 일체존재를 불성으로 보고 실상으로 보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삼매의 상태가 자기의사와는 무관하게 지속되는 상태가 일행삼매(一行三昧)이다. 즉, 일상삼매의 마음을 온전히 유지할 적에 일행삼매라고 한다. 일행삼매란 일상삼매, 즉 우주를 하나로 보는 그런 경계가 지속됨을 말한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는 정혜쌍수定慧雙修와 같은 뜻이다. 일상삼매는 혜(慧)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定)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정(定)과 혜(慧)가 온전함이 곧 일상삼매이자, 일행삼매임을 말한다. 여기서 정(定)은 선정(禪定)을 말하기 때문에 일행삼매(一行三昧)에 해당하고, 혜(慧)는 참다운 지혜, 즉 반야지혜(般若智慧)를 말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천지가 오직 하나의 도리라는 일상삼매(一相三昧)에 해당한다. 일상삼매, 그리고 일행삼매라야 참다운 선이다.
모든 존재의 뿌리를 하나로 보는 삼매가 일상삼매이다. 모두를 진공묘유(眞空妙有)로 보는 삼매이다. 무량광명(無量光明)으로 보는 삼매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의 부처님으로 보는 삼매이다. 좀 더 살펴보자.
• 일상삼매(一相三昧) ― 천지는 하나의 도리, 하나의 부처뿐, 하나의 실상,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란 말이다. 우리가 상(相)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이익이 있다든가 이익이 없다든가 성취한다든가 허물어진다든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때문에 번뇌 및 오염이 생긴다. 그런 것을 생각 말고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제법이 공한 자리에서 반야지혜를 가져 담박하고 안온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한다. 이것이 일상삼매다.
천지우주가 조금도 차이 없는 하나의 진리 자리다. 즉, 모든 존재를 진여불성 하나의 자리로 귀일시키는 것이 일상삼매다.
• 일행삼매(一行三昧) ― 우주를 하나로 보는 경계의 지속, 정혜쌍수(定慧雙修), 정혜균등(定慧均等), 성명쌍수(性命雙修), 차조동시(遮照同時)와 같은 말이다.
일행삼매는 일체처에 다니나 머무르나 앉으나 누우나 간에 순일직심(純一直心)이 부동도량(不動道場)이면 정토를 이루리라. 이것을 일행삼매라 한다. 순일직심은 순수한 하나의 곧은 마음이며, 도량이라 할 때는 근본적인 본체다. 일상삼매를 닦아서 행주좌와(行住坐臥)에서 본체를 안 여윌 때는 현실 그대로 정토를 성취한다는 말, 이것이 일행삼매다. 관(觀)하고 생각하되 관(觀)의 일상삼매로 견성(見性)하고, 염(念)의 일행삼매로 오도(悟道)함이다.
<육조단경>에서 육조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종지(種智)를 성취하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닦아야 한다.”라고 하셨다. 종지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말한다.
“만약 일체 처에 처하더라도 상(相)에 머물지 않고, 현상적인 여러 가지 상황 상중(相中)에 있다 하더라도,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원래 법이란 평등하고 조금도 어려운 것이 없는 것인데, 괜히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때문에 번뇌가 생기고 오염이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또한 취하고 버리지 말 것이며, 이익이 있다든가 이익이 없다든가 또는 성취가 된다단가 허물어진다든가 하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고, 그저 편안하고 고요하고 안온한 것과, 허융담박(虛融澹泊-마음이 허공과 같이 맑음)이라, 조금도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아주 깨끗하게 밝아지는 경계가 일상삼매라고 한다.
천지우주가 오직 조금도 차이 없는 하나의 진리 자리가 이른바 일상삼매이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천차만별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일상삼매가 못 된다. 모든 존재를 진여불성 하나의 자리로, 만법을 귀일시켜 버려야 이른바 일상삼매가 된다.
만약 사람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갖추는 것은, 마치 땅에다 종자를 뿌리면 대지가 종자를 머금어서 오랫동안 잘 기르고 익혀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일상삼매나 일행삼매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불종자(佛種子)를 마음 밭에다 심어 놓고 오랫동안 가꾸고 거두어서, 상(相)도 안 내고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인 일상삼매의 자리를 안 여읜다면, 종자가 땅에 떨어져서 잘 관리하면 열매를 맺듯이, 우리 마음도 역시 우리 마음자리에다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두고서 오랫동안 닦아 나갈 때는, 일체종지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내가 지금 설법하는 것은, 마치 때에 알맞게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과 같다. 그대들의 불성도 비유하면, 종자가 비를 만나 충분히 습기나 윤택을 받고 모두 싹이 나오듯이, 내가 말한 일상삼매 일행삼매의 뜻을 받드는 자는 결단코 진여보리(眞如菩提)를 성취하고 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자는 진실로 부처님의 묘한 과보를 성취한다.
그리고 나의 게송을 들으라.
심지함제종(心地含諸種) - 마음 밭에 모든 종자를 머금어서,
보우실개맹(普雨悉皆萌) - 두루 비에 적셔 빠짐없이 싹을 낸다.
돈오화정이(頓悟花情已) - 문득 이런 뜻을 깨달아서 들뜬 범부의 망정이 다하면,
보리과자성(菩提果自性) - 보리 열매가 저절로 성취가 된다.
법에는 본래 돈점(頓漸)이 없다. 다만 근기가 날카롭고 둔함으로 돈점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닦고 증하는 수증(修證)에도 깊고 옅음이 있는 것이니, 돈오점수(頓悟漸修)라 해 그릇됨이 될 수가 없고, 점차나 차서나 고하를 논하지 않는 무염오(無染汚) 수행을 역설하는 의미에서의 돈수이니 돈오돈수(頓悟頓修)가 그릇됨이 아니며, 다만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수기설법(隨機說法-듣는 사람의 이해 능력에 맞추어 진리를 해설)일 뿐이다.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것은 불조(佛祖)의 통설이다. 선오후수(先悟後修)란, 먼저 견성오도를 다 해가지고 닦는다는 의미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혜지(乾慧智)로 깨닫는 해오(解悟)를 먼저 해 놓고서 닦아야 흐트러짐이 없이 바로 갈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삼세제불의 정설이다.」
※간혜지(乾慧智)---아직 원숙하지 못하고 메마른 지혜. 참다운 지혜를 발현하지 못하는 ‘알음알이’ 단계라 할 수 있다.
육조 대사께서 위와 같이 말씀하셨는데, 일상삼매는 일원상의 진리의 정(靜)한 상태, 일행삼매는 동(動)의 상태를 말한다. 동할 때는 일행삼매의 경지에서 일원상의 진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활용하고, 정할 때에는 일상삼매의 경지에서 일원상의 진리를 그대로 지키는 공부이다. 일상은 진리의 당처 곧 진공(眞空)의 실상을 말하고, 일행은 묘유(妙有)의 활용을 의미한다.
일상삼매는 선정(禪定)을 말하는 것으로, 진여삼매라고도 한다. 진여의 세계는 평등해서 한결같고 차별이 없는 모양이라고 보는 삼매가 곧 일상삼매이다.
일행삼매는 마음을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삼매를 말한다. 일행삼매에는 이(理)의 일행삼매와 사(事)의 일행삼매가 있다. 이(理)의 일행삼매는 일상삼매와 같은 뜻이고, 사(事)의 일행삼매는 염불삼매를 말하는 것이다.
일행삼매(一行三昧)는 일상생활 모든 곳에서 바로 부처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일행삼매를 진여삼매(眞如三昧)라고도 하는데, 마음을 정(定)하고 하나의 행(行)에 전념해 닦는 삼매이다. 일행삼매의 실천수행법은 특히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道信, 580~651)의 법을 이은 제5조 홍인(弘忍, 601-674)의 선법(禪法)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 하는데, 이 동산법문에서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중시했다.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신도의 보시만으로는 교단을 유지할 수 없어 자급자족의 경제체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경작과 잡역에 종사하면서 불법의 대의를 얻으려 했고, 거기서 선을 체험적, 정신적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입장은 마침내 선을 출가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개방해 일상생활에 전개시키는 계기가 됐으며, 집단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선원 생활의 규범인 청규(淸規)를 형성하려는 기운이 나타나게 됐다.
그런데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에 설하기를 “법계는 하나의 모양인데(法界一相), 법계에 계합함’이 일행삼매라고 했으며, 육조 혜능(慧能) 대사는 ‘일체 생활 가운데서 항상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이 일행삼매라고 정의했다.
그리하여 <육조단경>에 “선지식들이여, 일행삼매(一行三昧)란 오고가며 앉고 눕는 모든 삶 속에서 한결같이 곧은 마음을 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일행삼매란 어느 곳에서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항상 한결같은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유마경(維摩經=淨名經)>에 이르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이며, 곧은 마음이 정토(淨土)다.”라고 했다. 마음으로는 아첨하고 굽은 짓을 하면서 입으로는 곧은 체하거나,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마음은 곧지 않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중생들은 이분법적 사고(思考) 속에 살고 있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고통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분별을 떠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상을 떠난 것을 일상삼매(一相三昧)라 하는데, 이러한 일상삼매의 상태가 지속되는 상태가 일행삼매(一行三昧)이다. 즉, 일상삼매의 마음을 온전히 유지할 적에 일행삼매라고 한다.
다시 <육조단경> ‘정혜품’에 나오는 말을 살펴보자. “가고 멈추고, 앉고 눕고 간에 항상 곧은 마음을 쓰는 일이 일행삼매이다. 절을 할 때에는 그저 절만 해야 한다. 앉아 있을 때에는 그저 앉아 있기만 해야 한다. 사물을 바라볼 때 역시 그저 바라봐야만 한다.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행동을 할지라도 항상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무엇을 하든지 한결같이 부처님 마음을 실행하며 사는 것이 일행삼매이다.
다음은 청화 스님의 말씀이다.
“일행삼매(一行三昧), 일상삼매(一相三昧), 이런 것이 같이 가지런히 갖추어져야 우리 마음의 번뇌가 빨리 녹는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의 본심(本心)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다 같이 아울러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정과 혜를 원래 갖추고 있다. 지혜만 있고서 선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혜도 원만히 또는 선정도 원만히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지혜만 닦고 선정이 없으면 공부가 잘 계합이 안 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우리 마음자리, 불성자리가 지혜와 자비가 또 지혜와 선정이 온전히 갖추고 있어서 우리 공부하는 것도 거기에 걸맞게 균등히 나아가야 계합이 되는 것이다.”
[출처]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작성자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