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의 꿈이 숨쉬는 곳"
"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탐방.,"
(왕궁리유적지,쌍릉,등.,)
"백제역사지구는 백제의 도읍과 연관된 배제후기(475~660)의 유산으로
웅진 왕도 유적지인 공산성과 송산리고분, 사비도성 관련 유적인 부소산성,
정림사지, 또한 사비시대의 복도(復都) 관련 유적인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등
으로 구성된 문화유산입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들판~한 송이 달맞이꽃)
"답사를 가든 여행을 가든,우리의 마음과 눈을 가장 즐겁게 해 주는 것은
자연 그 자체입니다.장엄한 산,시원한 바다,유장한 강줄기 또한 이렇게 여름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바다, 그 사이를 비집고 뻗은 길, 눈과 마음의 호강입니다."
(쌍릉 안내판)
"720번 지방도를 타고 익산 시내로 들어가다 보면 금마사거리에서
길 오른쪽에 쌍릉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고,그 옆 좁은 도로를
800m 정도 들어가면 쌍릉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쌍릉 입구 주차장~배롱나무)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가는 삼거리)
"오른쪽으로 가면 대왕릉, 왼쪽으로 가면 소왕릉으로 가게되며
대왕릉과 소왕릉은 소나무 숲길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왕릉 가는 소나무 숲길)
*대왕릉(大王陵)과 소왕릉(小王陵)~쌍릉(雙陵)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그동안 발굴된 자료로 대왕릉은 백제 무왕(武王), 소왕릉은 선화공주(善花公主)가
그 주인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아직도 아무도 모르는 역사적 과제이며,
지금도 발굴하고 있는 중입니다."*
*서동요(暑童謠)를 지어 신라 진평왕의 딸(善花公主)과 결혼했다는 서동(暑童),
백제 30대 임금이자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武王)입니다."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이야기)~~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三國遺史)*에는 훗날 백제 무왕이 되었다는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 사이의 사랑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마(麻)를 캐
생계를 유지하던 서동이 선화공주가 절세미인이라는 풍문을 듣고 서라벌로
가서 *공주가 서동을 몰래 숨겨 두고 정을 통한다* 는 내용의 노래를 퍼뜨립니다.
급기야 그 말이 왕의 귀에 들어가자 공주는 궁에서 쫓겨나고
서동이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는 이야기입이다."
(대왕릉 : 大王陵)
"소나무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 조촐한 이 릉(陵)은 백제 무왕(武王)의
묘로 알려져 있으며 지름이 30m,높이 5m 정도의 원형분입니다."
(대왕묘에서 소왕묘로 가는 소나무 숲길)
"소왕묘는 대왕묘 옆으로 뚫린 솔밭 사이 오솔길로
200m 쯤 가면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소왕릉 : 小王陵)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묘로 알려진 이 릉(陵)은
지름 24m에 높이 3.5m의 원형분(圓形墳)입니다."
(왕궁리유적지로 가는 길)
(왕궁리유적지 안내판)
"익산 미륵산에서 남으로 이어지던 산자락이 끝나는 얕은 구릉지대가
예로부터 마한 또는 백제의 궁궐터였다고 전해오는 왕궁평입니다.
이곳의 지명인 왕궁리도 궁궐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말기에 간행된 익산읍지인 *금마지*에 따르면
왕궁평은 용화산(미륵산)에서 남으로 내려온 자락이 끝나는 곳에 있으며
마한 때의 조궁(朝宮) 터라는 성터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왕궁리유적 터)
(남측 궁궐담장)
"궁궐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으로 동서 길이가 약 240m,
남북이 약 490m의 직사각형입니다. 담장의 폭은 3m 정도로,
잘 다듬은 석제를 쌓아 올려 만들었습니다."
(대형 건물터)
"이 건물터는 왕궁리 유적 건물터 중 가장 큼니다.
건물은 7칸(31m),측면 4칸(15m)의 크기로 남문과 같이
왕궁의 남북 중심축에 있습니다."
(백제왕궁 후원 가는 길)
(왕궁리오층석탑 : 王宮里五層石塔)~국보 제289호
"곱고 붉은 배롱나무 꽃망울 사이로 우아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왕궁리오층석탑이 서 있습니다."
"이 왕궁평의 야트막한 언덕 위 툭 트인곳, 비바람에 시달려도
석 달 열흘(100일) 동안 고운 빛을 간직한 배롱나무(목백일홍)들 사이로
손짓하듯 오층석탑이 서 있습니다."
"안내 표지판에는 고려 초기의 탑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탑의 생김새나
여러가지 이유로 백제탑,고려탑,신라탑이라고 하는 등 엇갈리는 가운데
지명을 따라 왕궁리 탑(王宮里 塔)이라고 부릅니다."
"조성 연대에 관해 많은 이설(異說)을 갖고 있는 이 탑은 멀리 떨어져서 보면
날아 갈 듯 경쾌하다가도 가까이에서 보면 장중하게 느껴지는 등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줍니다."
"이 성은 돌을 사용하지 않은 토성으로 이곳 사람들이 밭을 갈다보면
기와 조각이 깔려 있고 더러는 굴뚝이 나오며 종종 옥패와 동전 쇠못 등을
습득 했다고 합니다."
(왕궁리유적지 전경)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 石造如來立像)~보물 제46호
"금마에서 왕궁리 오층석탑쪽으로 가다 보면 길 왼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이어지고 오른편으로 논이 펼쳐집니다.
그 논 가운데 기다란 석불 두기가 마주보고 서 있습니다."
"높이 4.24m의 두 석불은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약 2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마주보고 서 있습니다. 사시사철 변해가는 들판 가운데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 석불(石佛)은 금마 땅을 지키는 수문장이라고 합니다."
"이 둘은 각각 남자와 여자인데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안고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 간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태봉사 : 胎峯寺 표지석)
"태봉사가 자리잡 태봉산은 마한의 왕 기준이 세 아들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하여 태봉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태봉사는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에 한 스님이 산신으로 현몽하고
이 삼존불(三尊佛)을 발견하여 그 자리에 지은 절이라고 합니다."
(태봉사 대웅전)
(익산 태봉사 삼존석불 : 胎峯寺 三尊石佛)~전북 유형문화재 제12호
"가부좌한 본존불(아미타불) 좌우에 두 협시보살이 조각되어 있는데
광배와 함께 모두 한 장의 판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오른쪽 보살은 관세음보살로
감로수병을 들고 있고, 왼쪽 보살은 지장보살로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있습니다."
(석불사 : 石佛寺 입구)
"익산 미륵사터에서 함열쪽으로 조금 가다가 만나는 마을이 삼기면 연동리입니다.
이 마을 사거리에는 보물 제45호로 지정된 석불좌상을 모신 석불사가 있습니다."
(석불사 대웅전과 종각)
"근래에 지은 석불사 대웅전에는 연동리 석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근래에 보기 드문 백제 시대의 석불입니다."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 石造如來坐像)~보물 제45호
"대웅전 안의 석불을 바라보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소원을
참 많이도 들어주었을 듯한 듬직한 기분을 갖게 하는 석불(石佛)입니다."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가는길)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가 있습니다.
생가를 알리는 표지석을 보고 마을길로 접어들어 10여 채의 민가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단정한 초가가 나타납니다. 이병기 선생의 생가입니다."
(생가 입구 이병기 선생의 동상)
"가람(가람 : 1891~1968)은 우리나라 시조 중흥의 기틀을 다지고
시조의 현대적 혁신을 위한 새로운 운동을 펼쳤으며 스스로 수많은 시조를
창작한 시조 시인이자 국문학자입니다.
"이집은 한국 현대시조의 중흥을 이룩한 시조시인이며 국문학자이신 가람 이병기
(가람 李秉岐) 선생의 생가입니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국문학전사* 등을 펴내고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습니다."
(생가 안채)
"조선 말기 선비의 가옥 배치를 따르고 있는데,
안채,사랑채,헛간,정자 등이 남아 있습니다."
(가람 이병기 : 李秉岐 선생 초상)
(사랑채~수우재 : 守遇齋)
"수우재라는 사랑채 이름에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며 평생을 지조 있는
선비로 살아온 그의 풍취가 은은하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수우재 앞 연지 : 蓮池)
(배롱나무 숲속의 생가 풍경)
"조선 말기 선비 집의 형태로 크지는 않으나 옹색하지도 않은 집채,
여름철이면 몇 그루의 파초가 늘어서는 동구, 정자 앞의 연못을 둘러싼
묵은 산수유와 배롱나무, 조붓한 마당 한편에 놓인 맷돌과 안반, 안채 옆의
가지런한 장독대, 뒤의 대밭에 이르기까지 선비집의 은근하고 담백한 생활의
멋을 느끼게 하는 생가(生家)입니다."
"청 풍 명 월~~유네스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탐방....................................,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