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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을 등지고 실체로 돌아와 벽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은
나도 없고 남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항상 어떤 것을 갈망하고 있다.
모든 현상계는 공허하다.
그것들은 추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며
복과 화는 영원히 함께 한다.
모든 현상은 텅 빈 공이다.
거기에는 더러움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하다.
그는 환상을 그치며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대가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도 안에 있다.
삼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마음으로 돌아온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들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한다.
"그들이 말하는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그대는 묻는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나는 대답한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시작도 없는 영겁의 세월을 통해서
그대가 무엇을 행하든지,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것이 바로 그대의 진짜 마음이다.
그것이 그대의 진짜 부처이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는 그대는 다른 어떤 부처도 찾을 수 없다.
과거와 미래의 부처들이 오직 이 마음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 마음이 부처이다.
그리고 부처가 마음이다.
마음을 벗어나서는 부처가 없고, 부처를 벗어나서는 마음도 없다.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처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중생이다.
그러나 중생의 본성과 따로 떨어진 곳에서 부처의 본성을 찾으려 한다면
그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중생의 본성이 곧 부처의 본성이다.
이 본성을 벗어나서는 부처도 없다.
부처는 우리의 본성이다.
이 본성 외에 더이상의 부처도 없고
부처 외에 더이상의 본성도 없다.
부처는 계율을 따르지 않는다.
부처는 선을 행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부처라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만약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그대는 결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는 깨달음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그대의 진짜 몸, 즉 진신은 그대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시작도 없는 영겁의 세월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그것은 결코 살지도 죽지도 않는다.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지도 않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깨끗하거나 더럽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그것은 과거의 것도 미래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그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그것은 승려나 속인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늙은이나 신참자도 아니며,
성자나 바보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업으로부터 고통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떤 힘이나 형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과 같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물론 잃어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산이 막혀도 통과하며 강이나 바위도 그냥 지나간다.
그것의 멈출수 없는 힘은 오대의 산을 넘어가고
삼사라의 강을 건너간다.
어떤 업도 이 진짜 몸을 제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마음은 너무나 미묘해서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감각적인 마음과 같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이 마음을 보고싶어 한다.
그리고 이 마음의 빛에 의해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이 마음이 뜻하는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다.
그것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은 왜 그것을 보지 못할까?
붓다는 사람들이 망상에 빠져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행위를 통해 끝없는 윤회의 강에 뛰어든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망상에 빠지지 않았다면
왜 그들은 그들 바로 앞에 존재해 있는 것에 대해 물어보겠는가?
그들 중에 한사람도 자신의 손과 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붓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망상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부처가 된 사람만이 헤아리기 어려운 그 무엇을 알며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진정 지혜로운 자만이 이 마음을 안다.
이 마음은 다르마의 본성으로 불린다.
또한 이 마음이 해탈로 불린다.
삶과 죽음이 이 마음을 제한하지 못한다.
이 마음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또한 멈출 수 없는 여래, 불가해한 것, 신성한 자아,
위대한 현자로도 불린다.
그 이름은 여러가지로 불려지지만 그것의 본질은 하나다.
부처들 역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마음의 능력은 한계가 없다.
그것의 나타남 또한 다함이 없다.
그대의 눈으로 형태를 보고
그대의 귀로 소리를 들으며
혀로 맛보고
모든 방식으로 느낄지라도
그것은 모두 그대의 마음이다.
매순간 언어로는 가 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으며, 그의 깨어있음 또한 마찬가지다."
라고 했다.
이 끝없는 모습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떤 동작, 어떤 형태의 것이든 사물을 구분하는 능력은
마음의 깨어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어떤 특정한 모습을 갖고있지 않으며
그 깨어있음에도 한계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의 깨어있음 또한 마찬가지다."
네가지 요소로 구성된 육체는 문제가 있다.
물질적인 육체는 삶과 죽음에 따라서 좌우된다.
그러나 진신은 존재함 없이 존재한다.
여래의 진신은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부처의 본성이란 자기가 항상 갖고있는 어떤 것임을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라고 했다.
마하가섭도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또 경에 이르되,
"모습을 가진 모든 것은 환상이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부처가 있다."라고 했다.
그대의 마음이 부처이다.
부처로 하여금 부처를 숭배하게 하지말라.
부처나 보살이 갑자기 그대앞에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그를 존경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이 마음은 비어있으며 어떤 모습도 담고있지 않다.
겉모습에 매달리는 자들은 모두 마귀들이다.
그들은 길에서 떨어져 나간다.
왜 마음에서 일어나는 허깨비를 숭배하는가?
그것을 숭배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는 자는 숭배하지 않는다.
숭배하게 되면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진다.
내가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까 염려해서이다.
부처의 본래 면목은 어떤 모습도 갖고있지 않다.
어떤 기이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이 말을 명심하라.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그대의 마음이 본래 순수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말라.
그대의 순수한 마음 어디에 그런 모습이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귀신이나 마귀나 신령한 것들이 나타난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존경하지도 말라.
그대의 마음은 본래부터 텅 비어있다.
모든 겉모습들은 환상일 뿐이다.
겉모습에 집착하지 말라.
만일 그대가 부처나 다르마나 보살을 상상하고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품는다면
그대는 자신을 죽을 수 밖에 없는 중생의 위치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직접적인 이해를 얻기 원한다면
어떠한 모양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뜻을 이룰 것이다.
나는 그것 외에 다른 어떤 충고도 해줄 수 없다.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부처와 한가지 마음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왜 우리는 부처와 보살을 숭배하면 안됩니까?"
마귀와 귀신들은 모습을 나타내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온갖 가장을 하고서 보살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가짜다.
그것들 중의 어느 하나도 부처가 아니다.
부처는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그대의 숭배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지 말라.
부처란 본래 범어로서 '깨어있음'을,
'블가사이한 깨어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반응하고 이해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박이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그대의 불가사이하게 깨어있는 본성이다.
그리고 이 본성이 바로 마음이며
그 마음이 부처다.
그 부처가 곧 도이다.
그 도가 선이다.
그러나 선이란 말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선이다.
만약 그대가 수천가지 경전을 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의 설명은 중생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
진정한 도는 너무나 위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구절의 글도 읽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도를 찾을 수 있다.
부처가 말하는 모든 것은 그의 마음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의 몸과 표현이 본래 텅 빈 것이므로
그대는 말에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
도는 본래 완전하다.
그것은 또다시 완전해질 필요가 없다.
도는 형체나 소리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붙잡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그대가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그대는 물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찬지 안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는 없다.
오직 여래만이 아는 그것은 인간이나 신도 알지 못한다.
중생의 깨어있음은 결코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모양에 집착하는 한
그들의 마음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물의 외양에 집착하는 실수때문에
그들은 도를 잃는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안다면
집착하지 말라.
한번 그대가 집착하게 되면 그대는 깨어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고나면
경전 전체가 덧없는 장광설로 들릴 것이다.
수천가지 경문이 하나의 밝은 마음에 못 미친다.
진정한 이해는 문장 중간에 얻어진다.
그러니 교리가 무슨 소용인가?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를 초월한다.
교리는 말의 차원이다.
그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말 없음이다.
말은 환상이다.
그것들은 궁전이든 마차든
밤중의 꿈에 나타나는 사물과 다르지 않다.
그것들을 가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그것들은 모두 윤회의 요람이 될 뿐이다.
그대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이 사실을 명심하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죽음이 왔을 때 한 순간만 머뭇거려도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질 것이다.
그대의 진신은 순수하고 결함이 없다.
그러나 망상에 빠진 까닭에 그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것때문에 그대는 헛되이 고통 받는다.
그대가 즐거움을 발견하는 곳이면 어디든
거기에 속박이 있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본래의 존재와 마음을 깨우치면
그대는 더이상 어떤 집착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세속을 위해서 초월을 포기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모두 중생이다.
부처는 좋은 운명이나 나쁜 운명에서도 자유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그의 힘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는 행위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행위라도 부처는 그것을 탈바꿈 시킨다.
천국이나 지옥이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만일 그대에게 확신이 없다면 행동하지 말라.
한번 그대가 행동하면
그대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할 것이며,
피난처가 없음을 후회할 것이다.
이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행동함이 없이 행동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여래의 안목으로 사물을 보게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본다면
그대는 더이상 경전을 읽거나 부처에게 빌 필요가 없다.
학식이나 지식 따위는 한낱 쓸모없는 것일뿐 아니라
의식을 가리는 구름이다.
경전의 교리는 그대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한번 그대 자신의 마음을 본 이상
교리에 집착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중생에서 벗어나서 부처로 가기 위해서는
그대는 모든 행위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대의 깨어있음을 키우고
삶이 가져다 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번 중생이 그들의 본성을 보면
모든 집착이 끝나 버린다.
깨어있음은 더이상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이 순간에서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직 지금 뿐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도를 찾고 싶다면
어떤 것에도 매달리지 말라.
한번 그대가 모든 행위에 종지부를 찍고
그대의 깨어있음을 키우면
남아있는 모든 집착은 사라질 것이다.
이해가 저절로 찾아온다.
그대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광신자는 붓다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더욱 애쓸 수록 그들은 성인의 본뜻에서 더욱 멀어진다.
하루 종일 그들은 부처에게 빌고 경전을 외운다.
그러나 자신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서 그들은 여전히 장님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이다.
그는 복과 명성을 좇아서 뛰어다니지 않는다.
결국은 그러한 것들이 뭐 그리 좋겠는가?
자신의 마음이 부처임을 아는 사람은
머리를 깎을 필요가 없다.
속인도 부처다.
머리를 깎은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않으면
한낱 광신자에 불과하다.
일단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면
성이란 기본적으로 허깨비에 불과하다.
그대가 그속에서 즐거움을 구하지 않음에 따라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
설령 어떤 습관이 남아있더라도
그것들은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그대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오온의 허깨비 몸 속에 살지언정
그대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순수하다.
그것은 결코 더럽혀질 수 없다.
한번 그대가 집착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조차도.
그대는 모든 것을 탈바꿈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는 평화로울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의심하면
그대는 어떤 것을 통해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번 그대가 행동하면 그대는 생과 사의 바퀴를 피할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자신의 본성을 보면
그대는 이미 부처다.
설령 그대가 백정의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나는 오직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나는 업을 짓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업은 우리를 잡아두지 못한다.
내가 중국에 온 단 한가지 이유는
이 마음이 부처라는
대숭불교의 즉각적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다.
나는 계율이나 헌신 혹은 고행수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말과 행동, 견해나 개념은 모두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들이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마음은 움직이지도 않고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 작용의 본질은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어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움직임 없이 움직이고
떠남 없이 떠나고
봄 없이 보고
웃음 없이 웃고
들음 없이 듣고
앎 없이 알고
기뻐함 없이 기뻐하고
걸음 없이 걷고
머무름 없이 머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에 이른다.
"언어를 넘어서 가라. 생각을 넘어서 가라."
나는 계속할 수도 있지만,
이 간단한 설법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번역 : 류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