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인연은
한량없는 세월 속에서
바람처럼 스치며 지내온 사이였는지 모른다.
그 옛날, 너는
내가 만석꾼 집에 머슴살이를 하며
연초록 세상 5월 들판에 모내기를 준비할 때
이른 아침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던
앵두나무집 부지런한 아가씨 이었거나,
내가 소금가마 짊어지고
더운 여름 날 지리산 둥구재를 넘던 장돌뱅이로 지낼 때
막걸리 한 사발 선심 쓰던 내밀던 주막집 주모였는지도 모른다.
옛날 옛적에 나는
네가 큰절에 탑돌이 가던 날 길목 허름한 초가집에서
호롱불 밝히며 밤새워 글을 읽던 선비였을지도 모른다.
서늘한 가을 추석 무렵 친구 집에 마실 갔다 돌아오는 길에
네 집 돌담 골목길을 지나가다
네 어머니와 네가 함께 다듬이질 할 때
아름답고 청아한 다듬이 소리를 듣고
밝은 달 빛 아래 몸을 숨기며 너를 그리워하던 사이였는지 모른다.
세상 인연(因緣)은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시절인연이 무르익지 않으면
바로 옆에 두고도 절대 만나지 못하고,
아무리 만나기 싫다고 발버둥을 쳐도 시절의 때를
만나면 기어코 만날 수밖에 없다.
너와 나는
그렇게 무심히 스치고 지나치던 오랜 인연으로
지금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사는 사람으로
지친 삶을 행복하게 살고 있는 마을 사람 일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만남이
그저 스쳐가는 사소한 인연일지라도
시절인연 (時節因緣)이라면
그 마지막 모습이 넉넉하고 아름다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