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본래 가르침이 나라마다 고유한 문화와 역사로 변화해가면서 다양성에 기초한 생명력이 꽃피우기도 하고 실패와 변질의 부정적인 면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불교는 지금, 일본불교 편.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이신 원광대학교 원영상 교수와 이야기 나눕니다. 안녕하세요?
1. 우리는 통불교적인 전통이 있는데 반해 일본은 종파적 특색이 강하고 종파마다 다양한 모색과 발전을 이루고 있는데요. 일본에서 주류 내지 중심이 되는 종파는 어떤 종파입니까?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13개의 종파가 생겼다고 합니다. 세분화해서 보면 더 많겠지요. 대체로 한국이나 일본에는 이 종파들이 먼저 전해지고 나중에 독자적인 성격의 종파들이 발생합니다. 일본도 고대에는 중국의 종파가 전해집니다. 한반도에서 불교가 전해지고, 이후에는 당나라에 직접 건너가서 불법을 가져옵니다. 나라가 수도였던 고대 전반기에는 육종이 전파되는 데요. 육종은 삼론종(三論宗). 성실종(成實宗). 법상종(法相宗). 화엄종(華嚴宗). 율종(律宗). 구사종(俱舍宗)을 말합니다. 처음부터 종파로 발전한 것은 아니고요, 하나의 학파로서 전달됩니다. 원래 중국에서도 학파가 종파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구사론을 연구한 사람들이 구사종을 만든 것과 같습니다. 나라의 동대사에는 이러한 6종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있었습니다. 후대에는 역시 종파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수도를 지금의 교토로 옮기고 나서는 천태종과 밀교, 즉 진언종이 중국에서 유입됩니다. 남도 6종, 즉 남쪽 수도인 나라를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천태종과 진언종은 종합불교입니다. 그리고 12세기 말부터 시작되는 중세에는 정토종, 정토진종, 임제종, 조동종, 일련종, 시종 등 다양한 종파가 발생합니다. 비로소 그 내용에 있어서 독자성을 갖게 됩니다. 불교의 토착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럼 먼저 선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 임제종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에사이(榮西, 1141~1215)선사는 중국 임제종의 두 주류인 황룡파(黃龍派)와 양기파(楊岐派) 중 황룡파에 속하는 분입니다. 송나라에 이르러 이 두 파가 발생해 5가에 더해 7종이라고 하죠. 스님은 1168년 첫 번째 중국 유학 때는 천태산에서 공부하고 천태서적들을 가지고 입국합니다. 그리고 1187년 두 번째 유학 때에는 천태산 만년사(萬年寺)의 허암회창(虛庵懷敞)으로부터 임제선을 배워 4년 후에 귀국합니다. 그러나 세력이 가장 컸던 천태문중에 의해 포교가 중지됩니다. 그래서 『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을 지었습니다. 선이 발전하는 것이 호국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성종단의 공격으로부터 선을 방어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위해서입니다. 1장, 계율을 지켜 청정하면 불법은 영원히 주한다는 것, 2장, 선종을 받들면 제천은 그 국가를 수호한다는 것 등으로부터 선의 종지 등 선의 사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중세의 실질적인 권력체인 카마쿠라 막부의 지지를 받아 수복사(壽福寺)를 열어 선종을 포교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교토의 건인사(建仁寺)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에사이 스님은 일본 최초의 차서(茶書)인 『끽차양생기(喫茶養生記)』를 지어 일본의 차문화에도 공헌합니다. 이후에도 송나라에서 임제계통의 여러 선승들이 들어왔습니다. 여러 본산을 중심으로 14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조동종 및 황벽종과 더불어 일본의 선종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중흥조는 근세의 하쿠은(白隱, 1685~1768)선사입니다. 실질적인 선을 주장하며 화두의 요목인 공안(公安) 불필요론과 염불선을 주장했습니다. 현재 임제종은 약 6천개의 사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3. 같은 선종의 맥이지만 묵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조동종도 영향력 있는 종파 가운데 하나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도겐선사도 천태종의 본산인 연력사에서 공부했습니다. 당시 천태종은 중세불교의 조사들을 배출한 학당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종합불교인 만큼 공부할 내용들이 풀부했기 때문입니다. 도겐선사는 일체중생은 원래 부처라고 가르치는데 부처인데도 어찌하여 수행에 전념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임제종에서 공부하다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1223년 송나라로 건너갑니다. 거기서 선은 특수한 사람들만이 공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동상양개(洞山良价)의 법손이자 중국 조동선의 법맥을 이은 천동사(天童寺)의 여정(如淨)선사의 제자로 입실해서 크게 깨닫게 됩니다. 묵조선의 핵심인 지관타좌(只管打坐)의 선을 계승했습니다. 온 심신을 쏟아 오직 좌선하는 것 외에는 불법을 체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겐선사의 가르침인 『정법안장(正法眼藏)』에서는 참선이라는 것은 심신탈락(心身脫落)이며, 지관타좌로 시작해서 얻는다고 합니다. 한다. 이는 도겐선의 특색을 이루게 된다. 1227년에 귀국하여 법을 펴게 됩니다. 역시 천태종의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교토에 흥성사를 세워 참선을 하며 제자들을 양성합니다. 여정선사의 가르침이야말로 불조단전(仏祖單仏)의 정법이라는 확신 아래 말법사상이나 염불과 기도 등의 행위를 엄격히 배격했습니다 깨달음을 향한 과정이나 수단으로 인식하지 않고 본래 깨달은 상태에서의 수행 그 자체가 불법의 행이자 묘수인 본증묘수(本証妙修)를 설파합니다. 화두를 드는 공안선을 배척하고 오직 좌선 한길에 깨달음이 있음을 주장합니다. 후쿠이현에서는 영평사(永平寺)를 열어 조동선의 근본도량으로 하게 됩니다. 중국의 조동선을 더욱 치밀하게 닦아 도겐류의 선을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동종은 임제종과는 달리 권력과는 담을 쌓고 민중 속에서 전국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도겐선사 이후에는 2대 코운 에죠(狐雲懷奘), 3대 텟쯔 기카이(徹通義介), 4대 케이잔 죠킨(瑩山紹瑾)으로 이어지고 케이잔에 이르러 아산파(峨山派)와 명봉파(明峰派)로 나뉘어 집니다. 조동종에서는 도겐을 고조(高祖), 케이잔을 태조(太祖)로 칭하고 있습니다. 약 만 5천개의 사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4. 그러면 서구사회에 Zen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 흐름이 임제종과 조동종과 같은 선종이라고 보면 될까요?
예 맞습니다. 일본의 선종은 이 임제종과 조동종이 전파된 것입니다. 이미 선종은 중국에서 5가7종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서구에서의 선은 일본에서 선의 발음인 젠으로 전해진 것처럼 활발한 이 양 종파인 임제선, 조동선인 린자이젠, 소토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미 양 종은 서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서구도 독자적인 선을 창안하게 되리라고 봅니다.
5. 좀전에 도겐스님에 대해서 잠깐 말씀 주셨습니다만, 우리에게도 일화와 게송이 종종 소개된 분이지요?
예 도겐선사와 관련해서는 여러 일화가 있는데요, 두 가지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중국에서 얻은 전좌교훈인데요. 선방의 직책 가운데 먹을거리를 책임진 직책인 이 전좌의 노승이 한 여름에 반찬거리를 구입하러 나온 것입니다. 도겐선사는 노승께 왜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승은 “내가 하지 않고 누가 하겠는가”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왜 이런 더운 때에 하느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노승은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는가”라고 답했습니다. 거기에서 도겐선사는 크게 깨친 것입니다. 선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그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불성을 굴리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실권자가 선사의 활동에 고무되어 땅 2천석의 토지를 기증하고자 했습니다. 그 기진장(寄進狀), 즉 땅을 하사한다는 증서를 가져언 수좌 겐메이가 기쁜 마음으로 도겐선사에게 보고했습니다. 선사는 “더럽다”고 하고, 제자를 빈출(擯出) 즉, 파문시켰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앉아 수행하던 자리를 뜯어내고, 그 자리의 아래에 있는 흙마저 파내버렸다고 합니다. 도겐선사가 깊은 산속의 영평사로 들어간 것도 국가권력과의 거리를 두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조동종은 막부가 중국의 제도를 본떠 제정한 5산10찰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민중 가운데에서 선을 전파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육조 혜능이 대통 신수와는 다르게 당시 수도와는 먼 남쪽에서 선을 전파하며, 국가권력과 거리를 둔 것과 같은 전통입니다. 제자를 파문시켰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만큼 국가권력과는 거리를 둔 교단전통을 강조한 것은 다름이 없습니다.
6. 일본의 천태종 역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종파 가운데 하나인데요.
사이쵸스님은 12세에 국가의 사찰인 국분사(國分寺)에 들어가 유식과 선법을 배우고, 15세 때에 정식 승려가 됩니다. 804년 견당선(遣唐船)에 올라 9개월간 천태산 등지를 역방하며 원선계밀(圓禪戒密)이라고 하는 소위 4종상승을 받고 귀국 후 수도 비예산(히에이) 천태법화종을 세웠습니다. 국가에 연분도자(年分度者)를 2인의 허락을 얻어 비로소 일본의 천태종이 개창되었습니다. 그가 세운 이치죠시칸인(一乘止觀院)에 대승계단의 설립이 이루어지고 연력사(延曆寺)라는 사호를 받아 비로소 천태종 총본산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가져온 전적은 2백30부 4백60권에 달했는데 국가에서는 이들 법문을 서사하도록 함과 동시에 여러 종파의 대덕(大德)들이 받아가도록 하여 교학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남도육종의 법상종 토쿠이츠(德一)와의 논쟁이 대표적입니다. 법화경 사상을 공격하게 된 것입니다. 818년 제자들과 더불어 소승 2백50계의 폐기를 선언함과 동시에 히에산에 대승계단을 건립하기로 결의하고 12년간 산에서 두문불출하는 농산(籠山)수행을 정했습니다. 남도불교계는 이를 비난했습니다. 결국 822년 사후에 히에산에 천태계단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로써 법화일승의 통일불교를 일본에 완성시켰습니다. 이후 뛰어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쓴 엔닌(圓仁, 794~864)은 오대산에서 5회염불, 즉 인성(引聲)염불을 도입하여 천태정토교의 발생과 카마쿠라의 정토교 조사들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를 만드는 한편 밀교를 배워 천태종계의 밀교인 소위 태밀(台密)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헤이안 정토신앙 결사인 25삼매회를 이끈 겐신(源信)과 같은 뛰어난 승려도 나왔습니다. 후에 천태종은 (園城寺)의 사문, 연력사의 산문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전국(戰國)시대인 1571년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히에산의 사원들이 거의 소실되었으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토쿠가와(德川)막부에 의해 재건되어 중흥의 길을 걷게 됩니다.
7. 일본불교는 고대에 신라, 백제,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잖아요. 천태종을 비롯해서 여러 종파와 사찰이 사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리나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죠?
당연히 고대불교는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나라의 법륭사에 가면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고대국가를 확립한 쇼토쿠태자의 스승은 고구려의 혜자스님입니다. 일본의 17조 헌법을 만든 쇼토쿠태자는 일본인들 모두의 존경의 대상입니다. 섭정을 통해 고대왕권국가를 확립했는데 불법과 유교 등의 동양사상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법화경, 승만경, 유마경에 대한 주석서인 <삼경의소(三經義疏)>를 썼습니다. 지금도 전시되어 있는 국보 백제관음은 고대문화의 정수입니다. 일본말로는 쿠다라관논입니다만 그 아름다움은 불상 예술의 백미입니다. 교토 광륭사의 국보급인 미륵반가사유상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상들은 한반도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초기 계율로 한반도에서 건너갔습니다. 불교 건축의 기술도 한반도의 기술자들이 직접 건축하거나 전수한 것입니다. 고대국가의 관료, 기술자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거나 그들의 후예들입니다. 불교문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후반으로 넘어가면 일본은 고의적으로 한반도 불교를 배제하고 인도, 중국, 일본이라는 삼국관을 제시합니다. 그럼에도 한반도의 불교는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의상스님의 화엄사상이나 원효스님의 정토사상은 일본에 큰 영향을 주어 그곳에서 화엄이나 정토불교가 꽃을 피우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의 언어인 가나문자도 한반도에서 불경을 읽는 방식이 전달되어 만들어진 문자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네, 오늘은 일본의 주요 종파 가운데 선종의 흐름과 천태종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그밖에 정토종 등 다른 종파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계불교는 지금’ 지금까지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원영상 교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