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유학자 위영복 문집, 《 역주(譯註) 다암유고(茶嵒遺稿)》 출간
조선후기 전남 장흥의 유학자로 활동한 다암(茶嵒) 위영복(魏榮馥, 1832~1884) 선생의 시문을 모은 문집 《다암유고(茶嵒遺稿)》가 주석을 붙인 국문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역주 국역판은 장흥문화원이 2024년 제8차 정남진 고문집 국역사업 대상 문집에 《다암유고》을 선정했고, 최근 '문림의향 장흥 고전국역총서 14번째' 《역주(譯註) 다암유고(茶嵒遺稿)》 국역문집으로 출간하여 보급하게 되었다.
장흥의 문화창달을 선도하고 있는 장흥문화원(원장 김명환)은 장흥을 대표하는 고전문집을 연차적으로 국역 간행하여 문림의 전통 계승과 정체성을 제고하고 있다.
이번 《역주(譯註) 다암유고(茶嵒遺稿)》 는 장흥 출신인 한학자 아양(峨洋) 이병혁(李秉赫, 호남문헌연구회 회장) 박사가 역주했고, 김희태 前 전남 문화재위원이 해제, 발간사에 김명환 장흥문화원장, 축간사에 김성 군수와 김재승 장흥군의회의장, 후손 대표로 위경호 다암선생 5대손이 축간사를 썼다.
책자 전면 표지에 나온 제자(題字) 글씨는 우송(友松) 이영록(李永綠) 서예가가 썼고, 후면 표지에는 다암(茶嵒)선생 손자인 위순식(舜植, 1890년~1976년)의 발문을 넣어 장식했다. 쪽수는 580페이지 분량이다.
장흥이 본관인 장흥위씨는 장흥문화원이 2020년 간암 위세옥 선생 문집인 《간암선생문집(艮庵先生文集)》을 국역하는 등 문림의 고장에서 역대로 가장 많은 유고집을 남겨온 명문 성씨이다.
▶저자 위영복(魏榮馥,1832~1884)
위영복은 조선 순조 32년에 전남 장흥 방촌(傍村)에서 아버지 위도천(魏道天)과 어머니 인천 이씨(仁川李氏)의 맏아들로 태어나 자(字)를 방서(芳瑞) 호(號)를 다암(茶 )이라 하였다. 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광산 김씨 (光山金氏)에게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선비의 기품이 있었으며 조부 해의재(奚疑齋)의 가학(家學)을 배워 수차 향천(鄕薦)을 받았다.
중년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4종조 존재(存齋) 위백규 (魏伯珪)의 학덕을 추모하여 장흥 위씨 집안의 장천재 (長川齋)를 공자형(工字形)으로 중축하고 산일 직전에 있던 《존재집(存齋集)》을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의 서문과 교정을 받아 간행 배포하였으며 <환영지(寰瀛誌)》에 발문을 붙여 간행하였다.
저작으로 <존재집> 간행의 역경을 기술한 <존재집간행시말(存齋集刊行始末)>과 관북과 영남의 일가를 방문한 여행기 <관령견문록(關嶺見聞綠)>, 그리고 병자수호조약에 반대해 각처에 보낸 <척왜통문(斥倭通文)>, 삼남 지방을 휩쓴 흉년의 피해를 적시한 <병자기사(丙子記事)>, 여행길의 경계를 기록한 <계행서(戒行書)> 등이 특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만년에는 고산 임헌회를 추모하는 사우들과 추양계(秋陽契)를 조직하여 교류하면서, 장천재에서 향음주례(鄉飲酒禮)와 죽천(竹川)의 들판에서 향사례(鄉射禮) 등을 베풀어 날로 해이해진 향풍(鄉風)의 진작을 도모하였다. 고종 21년에 계춘동(桂春洞)에서 향년 53세로 세상을 떠나니, 존재 위백규를 모신 다산사(茶山祠)에 제향되고, 문집으로 《다암유고(茶嵒遺稿)》 4권 1책이 전한다.
▶역주 이병혁(李秉赫)
전남 장흥 출신으로 호가 아양(峨洋)이다. 광주광역시청에서 정년퇴직하여 녹조근정훈장을 받았으며, 전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에 번역주 석서 《역주 지지재유고(譯註止止齋遺稿)》 《역주 남파집 (譯註南坡集)》 《역주 청금유고(譯註聽禽遺稿)》 《역주 청강유집(譯註清江遺集)》 《역주 간암선생문집(譯註艮庵先生文集)》 《역주 사복재집(譯註思復齋集)》 외에 연구논문 <전라도 장흥도호부 수군 만호진 회령포 연구> <임진왜란 중 전라도 수군의 역할과 승전요인> <장흥지역 문집의 간행실태 비교고찰> 등이 있다. 현재 호남문헌연구회 회장이다.
▶문림의향 장흥 고전국역 총서(文林義鄉 長興 古典國譯總書)
¤ 1차 2017년
《계서유고(溪西遺稿)》 백진항(白鎮恆, 1760~1818), 수원백씨
¤ 2차 2018년
《만수재유고(晚守齋遺稿)》 이민기(李敏琦, 1646~1704), 인천이씨
¤ 3차 2019년
《청강유집(淸江遺集)》이승(李昇, 1556~1628), 인천이씨
《제암집(霽岩集)》 정명열(丁鳴說, 1566~1627), 영광정씨
¤ 4차 2020년
《방호선생문집(放湖先生文集)》 김희조(金喜祖, 1680~1752), 영광김씨
《간암선생문집(艮庵先生文集)》 위세옥(魏世鈺, 1689~1766), 장흥위씨
¤ 5차 2021년
《운암선생문집(雲巖先生文集)》 정두흠(鄭斗欽, 1832~1910), 진주정씨
《송포유고(松浦遺稿)》 정노수(丁魯壽, 1877~1965), 영광정씨
《반계사진법(盤谿祠陣法)》
¤ 6차 2022년
《헌헌헌선생문집(軒軒軒先生文集)》 김여중(金汝重, 1556~1630), 영광김씨
《사복재집(思復齋集)》 송진봉(宋鎮鳳, 1840~1898) 여산송씨
¤ 7차 2023년
《무민재집(无燜齋集)》 문취광(文취광, 1752~1835), 남평문씨
《동곡유고(東谷遺稿)》 이복연(李복연, 1768~1846), 인천이씨
¤ 8차 2024년
《다암유고(茶嵒遺稿)》 위영복(魏榮馥, 1832~1884), 장흥위씨
▶ 위순식 발(跋)
삼가 생각해보면, 부군은 글을 지어 후손에 남길 계책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혹 글을 짓더라도 바로 휴지통에 던져버렸는데, 돌아가신 아버지 계사공(桂史公)과 막내 숙부 계양공(桂陽公)이 늦게야 이를 수집하여 몇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혹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족손 대환(大煥)에게 다시 살펴 차례를 정리하게 하고 오류가 명백한 것은 고르게 하였으며, 친우 강헌(剛軒) 허영재(許永栽)에게 정서를 청하여 장차 인쇄에 부치고자 하였다.
이 일은 마침 서울 경인문화사 한상하(韓相夏) 사장이 《존재전서(存齋全書)》를 영인(影印)하기를 청해 이때 큰아들 용철(容喆)과 족손 계환(桂煥)이 이 일로 상경하니, 한 사장이 말하기를 "다암공(茶公)은 일찍이 《존재집(存齋集)》 간행에 공이 있는데, 지금 들어보니 또한 남긴 글이 있다니 또 내가 인쇄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소 문중이 각각 약간의 재물을 출연하고 족제 석한(錫漢)과 족질 계본(啓本)이 또한 이를 주선하여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아! 참으로 한 사장의 호의와 여러 종인의 높은 덕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으며, 우리 할아버지 유집 인쇄가 마침 《존재전서>를 영인 배포한 뒤에 잇달아 이루어지고, 그 일이 교묘하게 모여서 드러남이 때에 맞는 것은 또한 우리 집안 문풍이 다시 떨쳐 일어날 조짐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감탄하며 책의 말미에 쓴다.
-단기 4308년 을묘년(1975) 3월에 손자 순식(舜植)이 삼가 기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