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강의 - 중용(中庸) 4
[제13장]
《어류》에, “인지위도(人之爲道)의 위(爲)는 위인유기(爲仁由己)의 위(爲)와 같고, 불가이위도(不可以爲道)의 위(爲)는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의 위(爲)와 같다.”라고 하였다. 주자의 뜻은 대개 위의 위(爲) 자를 배우는 자에게 소속시키고 아래의 위(爲) 자를 도(道)에 소속시킨 것이다. 그러나 《장구》에 이른바 ‘도(道)를 행하는 자가 그 비근(卑近)한 것을 싫어하여 도리어 고원(高遠)한 것에 힘쓰면 도(道)를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말로 보자면, 또한 위아래의 위(爲) 자를 모두 배우는 자에게 소속시킨 것인 듯하다. 어느 학설을 정론으로 삼아야 하는가?
[김처암이 대답하였다.]
《장구》의 위의 위(爲) 자는 경문(經文)의 위도(爲道)의 뜻을 풀이한 것이고 아래의 위(爲) 자는 경문의 불가이위도(不可以爲道)의 뜻을 풀이한 것입니다. 위의 위(爲) 자를 학(學)에 소속시키고 아래의 위(爲) 자를 도(道)에 소속시킨 것이니, 또한 당연히 경문(經文)의 예와 같습니다.
교도(敎導), 권면(勸勉), 유액(誘掖), 훈도(薰陶)가 어느 것인들 치인(治人)하는 일이 아닌 것이 없어서, 유독 사람들에게 허물이 있기를 기다린 뒤에 다스리는 것은 아닌데, 여기서 굳이 ‘고치면 그친다’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혹자는 “여기의 개(改) 자는 《대학》의 신민(新民)의 신(新) 자와 같이 그 구염(舊染)을 혁신한다는 말이지 한갓 한마디 말이나 한 가지 행동에서의 잘못을 고친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이 학설이 과연 어떠한가?
[구득로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도 또한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은 것으로써 다스리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람으로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효(孝)가 그 사람의 몸에 있는데도 그가 어버이 섬기기를 극진히 하지 못한다면 곧 그 사람이 지닌 효(孝)로써 그에게 분수를 다하게 하고, 분수를 다하면 곧 그치고, 다시 고원(高遠)한 일로 그에게 책임을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것이 ‘고치면 그친다’라는 것입니다. 이 장의 개(改)는 곧 불원인(不遠人)의 가르침인데, 《대학》의 신(新)은 곧 명명덕(明明德)의 효험이니, 혁구(革舊)의 뜻으로 보고 이 개(改) 자를 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횡거(橫渠)가 말한 ‘중인(衆人)으로써 사람들에게 기대하면 쉽게 따른다’라는 학설에는 의문이 있다. 군자(君子)가 사람을 다스리는 마음은 스스로를 닦는 마음과 차이가 없으니 반드시 지어지선(止於至善)으로 표준(標準)을 삼는다. 그러므로 “대장(大匠)은 졸공(拙工)을 위해서 승묵(繩墨)을 바꾸지는 않는다.”라고 하였고, 또 “중도(中道)에 서 있으면 능한 자는 따른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혹시라도 사람들이 쉬이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반드시 피부에 닿는 아주 비근(卑近)한 일로써 기대한다면 이는 곧 구차하고 고식적인 의논이니, 어찌 이른바 ‘군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君子愛人之恕]’이겠는가.
풀이하는 자가 말하기를, “중인(衆人)이란 용렬한 일반 대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임금이나 순임금 같은 성인도 그 안에 들어 있다.”라고 하는데, 이는 또 꼭 그렇지 아니한 것이 있다. 시험 삼아 ‘이종(易從)’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보자면, 횡거가 말한 중인(衆人)이라는 것은 결국 중인(中人) 이하를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을 겸하여 말하였다면, 성인의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이 어찌 사람마다 견주어 의논할 수 있는 바여서 이에 쉬이 따른다는 말을 한단 말인가.
[구득로가 대답하였다.]
‘중인으로써 사람들에게 기대하면 쉬이 따른다’라는 것은 바로 성인(聖人)으로써 사람들을 책려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학문을 하여 성인에 이르는 방법은 또한 이 ‘쉬이 따를 수 있는 것’을 말미암아 해 나가는 것이니, 이것을 구차스럽고 고식적인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으로써 사람들에게 미쳐 감은 성인(聖人)의 인(仁)이고 자기 자신을 미루어서 사람들에게 미쳐 감은 학자(學者)의 서(恕)이다. 인(仁)과 서(恕)는 자연히 그 얕고 깊음, 크고 작음의 분별이 있는데, 《장구》에서 장자(張子)가 말한 진인(盡仁)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충서(忠恕)의 뜻을 풀이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리고 충서(忠恕)라는 두 글자는 학설이 한둘이 아니다. 혹자는 “자신이 원치 아니하는 것[施諸己而不願]이 충(忠)이고,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않는 것[亦勿施於人]이 서(恕)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자신이 원치 아니하는 것과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가 서(恕)의 일인데, 그 알맹이가 곧 충(忠)이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어느 학설을 더 정밀한 학설로 보아야 하는가?
[김희락이 대답하였다.]
인(仁) 자와 서(恕) 자는 자연히 분별이 있습니다. 장자(張子)가 말한 진인(盡仁)이라는 말도 또한 서(恕)를 인(仁)에 해당시킨 것이 아니라, 애써 열심히 서(恕)를 하여 행하면 인(仁)을 구함이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베풀기를 바라지 않는 것과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않는 것은 모두 실심(實心)으로 해 나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비록 이것이 서(恕)이기는 하지만 자사자(子思子)가 충서(忠恕)의 아래에다가 붙여 놓은 것이니,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충(忠)의 뜻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중의 학설이 정밀한 듯합니다.
충서(忠恕)와 중화(中和)는 같은가, 다른가? 충(忠)은 체(體)가 되고 서(恕)는 용(用)이 되며 충은 안에 존재하고 서는 밖에서 행해진다면, 비록 충을 중(中)에 소속시키고 서를 화(和)에 소속시켜도 안 될 것이 없는가? 그리고 첫 장에서는 도불가리(道不可離)를 말하고는 중화로써 매듭지었고, 이 장에서는 도불원인(道不遠人)을 말하고는 충서로써 매듭지었으니, 이는 필시 정밀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가리켜 진달할 수가 있겠는가?
[구득로가 대답하였다.]
도불가리는, 이 도는 없는 곳이 없고 그렇지 않은 때가 없음을 말한 것인데, 그 광대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정(靜)할 때에는 보존하고[靜存] 동(動)할 때에는 살펴서[動察] 대본 달도(大本達道)의 공효에 이르니, 이것이 중화로써 매듭을 지은 까닭입니다. 도불원인은, 이 도가 인심(人心)에 갖추어져 있고 인륜(人倫)에 존재함을 말한 것인데, 그 절실하고 가까운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자신을 미루어서 남에게까지 미쳐서 위인 입도(爲仁入道)의 방법을 구하는 것이니, 이것이 충서로써 매듭을 지은 까닭입니다. 그러나 충서가 지극하게 되어 인(仁)에 이르면 충(忠)은 바로 순역불이(純亦不已)이고 서(恕)는 바로 만물각득기소(萬物各得其所)이니, 이것은 중화위육(中和位育)의 오묘함과 한가지이지 두 가지가 아닙니다.
소구호붕우(所求乎朋友)라는 두 구절은 위 글의 용례로 보자면, 마땅히 ‘소구호붕우(所求乎朋友)로 이교인(以交人)을 미능(未能)이니’라고 해야 하는데, 이에 글을 바꾸어서, ‘선시지(先施之)를 미능(未能)이니’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아들에게 바라는 바는 효(孝)이고 신하에게 바라는 바는 충(忠)이고 동생에게 바라는 바는 제(悌)이고 붕우에게 바라는 바는 신(信)인데, 오품(五品) 가운데에서 유독 부부(夫婦)에 대한 것만을 빠뜨린 것은 또한 어째서인가?
앞뒤의 여러 장(章)들에서 모두 지(知)와 행(行)을 대응시켜 말하였는데, 이 장에서는 유독 언(言)과 행(行)을 서로 대응시켜 말하였으니, 이 또한 각기 해당하는 바가 있는가?
[구득로가 대답하였다.]
이 장의 네 개의 소구(所求)는 말뜻이 《대학》 혈구장(絜矩章)의 여섯 개의 소오(所惡)와 같습니다. 대개 내가 위와 아래의 중앙에 있으면서, 아래에 바라는 바로써 위를 섬기는 것인데, 오직 붕우는 단지 나와 대등한 것이어서 다만 저들에게서 바라는 바를 먼저 저들에게 베푸는 것일 뿐입니다.
부(夫)가 바라는 바는 부(婦)와 다르고 부(婦)가 바라는 바는 부(夫)와 다르니, 이것이 바로 오품 가운데에서 유독 부부에 대한 것은 뺀 까닭입니다. 몸이 실천하는 것으로는 언과 행보다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대응시켜서 말한 것입니다.
위는 제13장이다.
[第十三章]
語類云人之爲道之爲。如爲仁由己之爲。不可以爲道之爲。如克己復禮爲仁之爲。朱子之意。蓋以上爲字屬之學者。下爲字屬之道也。然以章句所謂爲道者。厭其卑近而反務高遠則非所以爲道之語觀之。則又似以上下爲字幷屬之學者。當以何說爲定論也。
處巖對。章句上爲字。釋經文爲道之義。下爲字。釋經文不可以爲道之義。上爲字之屬之學。下爲字之屬之道。亦當如經文之例矣。
敎導勸勉誘掖薰陶。無往非治人之事。不獨待人之有過。然後治之。而此必曰改而止者何也。或謂此改字。如大學新民之新。革其舊染之謂。非徒一言一行之改過也。此說果如何。
得魯對。治人者亦不遠人以爲治。是謂以人治人也。如孝在其人之身。而他未盡於事親。則卽以其人之孝。使他盡分。盡分則斯已矣。而更不責他高遠底事。是謂改而止也。此章之改。卽不遠人之敎。而大學之新。卽明明德之效。則不可以革舊之義。看解此改字矣。
橫渠以衆人望人則易從之說可疑。君子治人之心。無間於自修之心。必以止至善爲標準。故曰大匠不爲拙工改廢繩墨。又曰中道而立。能者從之。苟或爲人之易從而必望以卑近膚淺之事。則是乃苟且姑息之論。豈所謂君子愛人之恕哉。解之者曰衆人非謂庸衆之人。雖堯舜之聖。亦在其中。此又有未必然者。試以易從二字觀之則橫渠所謂衆人。畢竟是中人以下。若兼聖凡言則聖人之盛德至善。豈人人之
所可擬議。而乃謂之易從耶。
得魯對。以衆人望人則易從者。乃謂不以聖人責人。而所以學至於聖人者。則亦由此易從者做得。是可謂之苟且姑息之語哉。
以己及人。聖人之仁。推己及人。學者之恕。仁與恕自有淺深大小之別。而章句引張子盡仁之語。以釋忠恕之義者何也。且忠恕二字。說者不一。或謂施諸己而不願爲忠。亦勿施於人爲恕。或謂施諸己而不願。亦勿施於人。皆恕之事。而其實處卽忠。當以何說爲精也。
煕洛對。仁恕字自有分別。張子盡仁之語。亦不是以恕當仁。強恕而行。求仁莫近故云爾。至如施己不願。亦勿施人。無非實心做去者。故雖是恕也。而子思子足之忠恕之下。則這裏便可見忠之義。後說似精。
忠恕與中和。同歟異歟。忠爲體而恕爲用。忠存於內而恕行於外。則雖以忠屬中。以恕屬和。亦未爲不可耶。且首章言道不可離而以中和結之。此章言道不遠人而以忠恕結之。是必有精義之所在。可指陳歟。
得魯對。道不可離。言此道無處不在無時不然。而其廣大也如此。故靜存動察。以致大本達道之功。此所以中和結之也。道不遠人。言此道具乎人心。在乎人倫。而其切近也如此。故推己及人。以求爲仁入道之方。此所以忠恕結之也。然忠恕到底至於仁則忠是純亦不已。恕是萬物各得其所。是則與中和位育之妙。一而非二矣。
所求乎朋友二句。以上文例之則當曰所求乎朋友。以交人未能。而乃變文言先施之未能者何歟。所求乎子孝也。所求乎臣忠也。所求乎弟悌也。所求乎朋友信也。而五品之中。獨闕却夫婦者又何也。前後諸
章。皆以知行對言。而此章則獨以言行對言。此亦有各有攸當者耶。
得魯對。此章四所求語意。與大學絜矩章六所惡同。蓋我居上面下面之中央。以所求乎下者。以事乎上。而惟朋友只與我爲對。直以所求乎彼者。先施乎彼而已。夫之所求異於婦。婦之所求異於夫。則五品之中。獨闕却夫婦者也。以身之踐履則莫重乎言行。故所以對言也。以上第十三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