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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8장 1-7절. 가난한 중에서 드린 풍성한 연보. 요약설교
1. 고린도후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7장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거짓 사도로 매도했다가, 디도의 중재로 회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 사도가 크게 위로받았음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8-9장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구제 헌금을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10-13장은 아직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바울에게 대항하는 율법주의 교인들에게 이번에 바울이 가서 처벌하겠으니, 속히 회개하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2. 구제 헌금에 관한 내용이 8-9장에 나오는데, 8장 1-15절은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을 말하고, 16-24절은 헌금 모금을 위해 디도를 보낸다는 것과, 9장 1-15절은 구제 헌금에 대한 권면을 한 내용입니다.
오늘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가난한 가운데서도 후한 연보를 했다고 자랑하면서, 부유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연보를 후하게 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3. 말씀의 순서에 따라서, 몇 주간은 할 수 없이 헌금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4. 오늘 설교 제목은 <가난한 중에서 드린 풍성한 연보>입니다.
1절.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1.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은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등을 가리킵니다. (행 17:10-15)
그 중에서도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전도사역이나 구제 헌금에 특출났습니다. (빌립보서 4:15: in the matter of giving and receiving, you only)
마게도냐 교회들에 대한 설명은 사도행전 16장 9절과 로마서 15장 26절을 보시고, 빌립보 교회가 헌금에 특출난 것에 대해서는 빌립보서 4장 10절과 15-16절과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은혜를...알게 하노니
(1) 마게도냐 교회들이 전도자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한 것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마게도냐 교회들은 환난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2절) 기쁨으로 힘에 넘치도록 연보를 했다고(2절)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게도냐 교회들이 헌금한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God’s gifts)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질병과 가난과 싸움이 있기 때문에,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 후에 구제 헌금을 하려면, 거의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회들처럼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다른 한 편에서 기쁨과 사랑을 가지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동정심을 갖고 돕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눈물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극심한 가난’이 마게도냐 교인들에게는 구제 헌금을 막는 요소가 되지 못했습니다.
따뜻한 마음과 따뜻한 말과 따뜻한 기도도 좋은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냉혈적인 신중함(cold-blooded prudence)을 갖기보다는 극히 어려운 이웃에 대해 보다 따뜻한 희생과 기쁨을 갖기를 바랍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서(5절), 많은 구제 헌금을 했습니다.
즉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물질에 대해서도 자기 소유라고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희생적인 헌금을 한다고 해서 자기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나 자녀 교육이나 부모 병원비 등을 중단하고, 헌금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헌금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만 가난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평균적인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13-14.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가족의 병원비를 빼서 구제 헌금한다든지, 자녀 교육비를 빼서 헌금한다든지, 기초적인 생활비를 빼서 헌금한다든지, 장기를 팔아서 헌금한다든지, 피를 팔아서 헌금하는 것과 같은 지나친 헌금은 불신자보다 못한 행위입니다.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어떤 이단자들은 이런 악한 일을 하고, 결혼도 이단 포교로 위장해서 아이까지 낳아놓고, 이단으로 가지 않으면 이혼하고 아이를 버린다고 협박하기까지 합니다.
(2) 바울이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금을 ‘은혜’라고 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은 뜻이 있습니다.
보통 헌금을 하라고 할 때, 사람들은 부담을 느끼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말할 때는 관심을 가지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이 헌금한 것을 은혜였다고 말함으로써, 마게도냐 교인들이 구제 헌금으로 은혜받은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구제 헌금을 통해서 은혜받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입니다.
정말 기도하고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은혜를 체험한 것은 우리 마음에 큰 기쁨이고,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극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게 구제 헌금을 함으로써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와 감사와 기쁨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여기서 ‘은혜’란 헌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헌금( money-giving: money contributions: subscriptions)을 ‘은혜’라고 표현한 것은 마게도냐 교회와 관련해서 두 번(1절과 4절), 고린도 교회와 관련해서 두 번(6절과 7절) 사용되었습니다.
은혜(恩惠, Grace)라는 말이 처음 나온 곳은 창세기 6장 8절(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입니다.
이 '은혜'란 말의 원어 '헨'(חֵן)은 '하난'( חָנַן: 불쌍히 여기다, 아랫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다)에서 나온 말로서, 하나님께서 경건하면서도 고생하는 자를 불쌍히 여겨서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사랑, 은혜, 긍휼(favor, grace, mercy) 등을 의미합니다.
바레트(Barrett)는 '은혜'가 관대함을 뜻하는데, 마게도냐 성도들이 죄인으로서 심판(審判)을 받아야 마땅하고 아무런 용서받을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체험한 후로, 아무런 조건 없이 가련한 사람들(가난한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관대함을 베푸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3. 알게 하노니
(1)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알게 해주는 이유는, 그 말에 고린도 교인들이 자극되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경쟁심(honourable emulation)을 갖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전도사역의 후반부에서는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는데, 이것은 인종과 종교와 사회 계급으로 인해 생긴 큰 간격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됨으로 메꾸려는 노력이었습니다. MacLaren's Expositions
(2)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 1-4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준비하도록 이미 말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다른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유한 형편이었지만, 아직까지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4절)
그래서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적인 헌금 사례를 거론하면서, 고린도 교인들도 이 구제 헌금을 준비하라고 재촉한 것입니다.
디도의 설득으로 고린도 교회가 구제 헌금을 시작하기는 했으나, 반대파들)이 방해해서 신실한 성도들이 구제 헌금을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3) 그런데, 바울 사도가 헌금에 관한 문제를 '은혜'의 관점에서 말씀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헌금을 기쁨으로 분에 넘치게 한 것은(2-4절)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관대함이란 의미로서, 죄인으로서 심판(審判)을 받아야 마땅하고 아무런 용서받을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데도,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게도냐 교인들이 이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자비를 베푸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꼭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마게도냐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2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1.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마게도냐 교회들이 당한 시련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는데(빌 1:29,30, 살전 1:6; 2:14; 3:3-4, 살후 1:4-10), 그 구체적인 내용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환난과 같은 것을 마게도냐 교인들도 받았다고 말씀한 것뿐입니다 (살전 2:14).
그러므로,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당한 환난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당한 환난이었습니다.
아마 사도행전 17장에 나와 있는 대로, 유대인 적대자들에게 모함을 받고 직접적인 공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행 16:20, 17:5, 13).
또한, 마게도냐 교인들은 로마 제국에 피식민지 백성으로서 받는 시련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시련’(trial)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인내와 정절을 위해서 주신 시련이란 표현입니다.
이 모든 시련 가운데서도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넘치는 기쁨 속에 살았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시련하려고 주신 여러 가지 고난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성도들은 기쁨으로 돕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가난한 가운데서 많은 은금을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고(대상 22:4, 70인역에 according to my poverty), 가난한 과부가 가난한 가운데서 생활비 전부를 기쁨으로 드리는 것을 가리킵니다(막 12:42).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이 기쁨은 마게도냐 교인들 자체에서 나온다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Schlatter).
아무튼,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시련을 당할 수록 오히려 넘치는 기쁨을 누렸는데,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매우 성숙한 수준에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마치 그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바울 사도의 모습(6:10)과도 같습니다.
2.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극한 가난’이란 헬라어는 죽을 지경까지 내려간 가난이란 뜻입니다. (their deep poverty—Greek, "their poverty down to the death of it)
당시에 마게도냐 지방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금광이나 은광, 선박용 나무를 베는 권리 등의 수입원을 모두 로마인들에게 빼앗겨 구조적인 가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지방은 전체적으로 농업, 광업, 목재 산업 등이 번성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원인만으로 ‘극한 가난’의 상태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Barrett).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의 형편을 ‘극한 가난’으로 표현한 것은 경제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통치자에 의한 박해가 있었고(행 16:19-20), 데살로니가에서는 유대인들에 의한 박해가 있었습니다(행 17:5-6)
빌립보 사람들의 가난은 여성들이 주로 경제적 책임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마게도냐 지방과 아가야 지방의 사람들은 세 번의 전쟁(the three wars between Cæsar and Pompeius, between the Triumvirs and Brutus and Cassius, and between Augustus and Antonius) 때문에 가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또한 교인들은 신앙 때문에 지역민들에게 비난과 박해와 투옥과 재산 몰수까지 당했습니다
이런 시련들 때문에 마게도냐 지방 성도들은 자신의 생계에 관심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으나, 본문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외부의 박해와 가정의 가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in the Holy Ghost) 복음으로 인한 기쁨이 충만해서 풍성한 연보를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능력에 따라 구제 헌금을 했으나, 그들의 환경에 비해 기대 이상으로 헌금을 했습니다.
여기서 ‘연보’라는 헬라어(ἁπλότης: 아플로테스)는 ‘소박’, ‘단순’, ‘순수함, 관대함, 아량’(simplicity, sincerity, purity, graciousness, generosity)이라는 뜻으로, 헌금의 기본적인 태도는 마음의 순수함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관대함(liberality)이란 기대 이상으로 많은 구제를 한 것을 가리킵니다( much greater than could be expected from persons so poor)
한편, 본문은 ‘가난’이라는 상황이 남을 돕거나 하나님께 드리는데 인색함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됨을 말해줍니다.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마치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바친 한 가난한 과부처럼 (막 12:44), 극한 가난 속에서도 자기들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6:10).
3절.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1. 바울 사도가 보기에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기대 이상으로 연보를 드렸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헌금이 요청이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원(自願)해서 드렸다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오히려 물질적 원조가 필요로 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구제 헌금을 해달라고 요청하기를 주저했습니다(Lowery).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교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외면하지 않았고, 바울 사도가 말하지 않았지만, 자원하여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헌신이요 사랑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9:7.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런 말씀에, 고린도의 교인들은 상당히 마음의 자극을 받았던 것입니다.
4절.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1. 마게도냐 교인들은 곤경에 처한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이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특전’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에게 그 특전을 나누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반스(Barnes)는 마게도냐 교인들이 헌금을 걷어서 유대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간청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Jamieson-Fausset-Brown) 마게도냐 교회란 특히 빌립보 교회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The Macedonian contributions must have been from Philippi)
왜냐하면 당시 바울에게 선교 헌금을 보낸 교회는 빌립보 교회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빌 4:10, 15-16).
매튜 폴(Matthew Poole)도 본 절의 의미를 ‘자신들이 헌금한 것을 바울 사도에게 가지고 가서, 그 헌금을 유대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에 동참하게 해달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또 길(Gill)도 마게도냐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헌금하여 보냄으로써 성도들 간의 교제(κοινωνίαν:fellowship)를 나누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2. 여기서 곤경에 처한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유대 지역 사람들은, 사도행전 11장에 나오는 대로, 글라우디오(Claudius, A.D. 41-54) 황제 때의 심한 기근으로 대단히 궁핍한 생활을 했습니다(행 11:27-30).
더구나 예루살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비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안 믿는 유대인들로부터 종교적인 탄압을 받고있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상업적인 길드 조합을 결성하고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상업에 종사할 수 없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친밀한 형제애로 굳게 뭉쳐 서로를 돕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마게도냐인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헌신적으로 나선 것은 그들도 가난해서 가난한 자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마게도냐 성도들의 신앙을 본받아, 가난한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후한 연보를 할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5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1.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우리의 바라던 것 뿐만 아니라’(not as we hoped)는 ‘우리가 바라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far beyond our hopes)란 뜻입니다. (Jamieson-Fausset-Brown)
마게도냐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행위들은 바울 사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한 신앙 행위였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단지 동정이나 인간적인 사랑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에서 헌금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하나님께 은혜 입었음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소유도 필요시에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Bruce).
이처럼 마게도냐 교인들은 헌금에 있어서, 감동을 주는 모범적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바라던 것 뿐만 아니라’는 것은 바울이 바라던 것은 구제 헌금이었는데, 마게도냐 교인들은 구제 헌금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과 시간과 생각과 에너지를 먼저 주님께 드렸고, 또한 바울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Ellicott)
마게도냐 교인들은 바울이 기대했던 것만 헌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의 가난을 알았기 때문에, 적은 헌금만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인들은 바울의 기대 이상으로 많은 헌금을 했던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했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헌금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정직하게 헌신한 것 때문에, 어려운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해 헌금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Barnes)
2.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는 말씀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께도 헌신했고, 또한 ‘바울에게도 헌신하였다’는 뜻입니다.
즉 마게도냐 교인들은 하나님께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자기들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종으로 존중하였고, 그를 헌신적으로 잘 섬겼습니다.
그들은 사도에 대한 이런 마음이 곧 주님께 헌신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신앙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 의지대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것을 가리킵니다. - Ellicott)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란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인들을 감동해주셨음을 가리킵니다.
즉 마게도냐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알고, 바울에게도 헌신했음을 가리킵니다. Barnes
다른 사람(Jamieson-Fausset-Brown)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by the will of God)란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따라’(moved by the will of God)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신을 먼저 주님께 드렸고, 주님을 섬기는데 헌신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 헌신했고, 구제 헌금을 드렸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인 바울에게도 드렸습니다. (Matthew Poole)
‘자신을 먼저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는 것은 마게도냐 교인들이 자신과 모든 소유를 주님께 드렸고, 그들 중이 일부는 자신의 거주지와 가족들을 떠나서 바울 사도의 사역에 동참하고 싶어 했으며, 마게도냐 교인들은 모두 바울 사도의 지도와 돌봄과 지시에 따라 살기를 원한 것을 가리킵니다. Gill
6절.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1.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마게도냐 교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헌신이 디도를 고린도에 보내 모금 사업을 완성하게 하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바울 사도는 앞 절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은 외부적인 박해와 내부적인 극한 가난의 상황에서도 능력 이상으로 헌신한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상대적으로 박해도 받지 않고 가난에 시달리지도 않는 처지에서 마게도냐교인들 보다도 더 많은 헌금을 빨리 드릴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바울 사도가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서 '눈물의 편지'를 전달하고 범죄자들을 회개하게 한 것 외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고린도 교인들이 동참케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구제 헌금을 데살로니가 교회보다 먼저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헌금 상황이 지지부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이 고린도후서를 가지고 디도를 재차 보내, 이미 약속한 구제 헌금을 빨리 완성하라고 했습니다.
2. 고린도 교회는 헌금을 작정했으나, 믿음이 없어서 중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작정 헌금은 믿음으로 드릴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작정해야 합니다.
터무니없이 많게 작정하는 것은 시험거리가 되고, 터무니없이 적게 작정하는 것은 믿음을 줄여 먹습니다.
어느 교회의 성도는 단돈 10만 원도 잘 못 쓰는 가난한 분이 기도원에 가서 200만 원을 작정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으니, 헌금을 그 정도는 드려야 병이 낫는다고 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 교역자가 너무 딱해서 그 성도에게 말하기를, 먼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기도원 원장을 찾아가서, 도저히 드릴 수 없는 입장임을 말씀드리고, 작정한 금액을 해결 받도록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어느 교회 여성도는 가정 경제 사정이 어려워 파출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건축 헌금을 1억을 작정했습니다.
그리고는 감당을 못해서, 정신까지 혼미해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헌금이 은혜가 되어야지 큰 시험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작정하고 드리되,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고, 터무니없이 작정했다가, 시험 들어 교회를 떠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 가난한 성도를 위한 구제 헌금을 이미 약속한 대로 완성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헌금’ '은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또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즐거이 주님께 헌신하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구제 헌금으로 성취해 드린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하나님께 은혜 받아서 약속한 구제 헌금을 성실하고 신속하게 이행함으로써,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고 이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약속한 헌금을 어서 완성하라고 재촉한 것은 당시에 고린도 교인들이 박해나 아무런 궁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생활이 다급함이 없었으므로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 헌금에 지체하고, 소홀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7절.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1.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었고(고전 12:9; 13:2, 13), 말과 지식이 풍부했으며(고전 1:5), 바울 사도에 대한 간절함과 사랑을 풍성히 가지고 있었습니다(7:7).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과 사도 앞에서는 바르게 서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형제 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사랑하는 이 사랑( in your love to us)에 근거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가난한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2.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아무리 믿음과 말과 지식과 간절함이 풍성해도 그런 영적인 은사와 좋은 성품들이 이웃에게 은혜 베푸는 일로 귀착되지 않으면, 무익하고 완전한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Barnes)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좋은 성품은 반드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행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3. 여기서 가난한 예루살렘 교인들을 구제하는 이 사랑을 “은혜”로 표현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헌금하도록 요청한 것은, 그들에게 어려운 짐을 지워주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더 풍성하고 온전히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진심 어린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을 본받아,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기도하고 성령님의 은혜를 받아 아름다운 헌금을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커다란 은혜를 체험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